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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강해 33 (엡3:17) / 로이드존스

새벽지기1 2016. 6. 17. 06:44


성경: 엡3:17절


1. 마음에 계시는 그리스도


이 구절은 참으로 난해한 구절 중의 하나입니다. 에베소의 성도들은 이미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고 교회의 몸이신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으며, 그들은 이제 주님 안에 그리고 주님은 그들 안에 계십니다. 다시 말한다면, 사도 바울은 이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비록 주님께서 이미 그들 속에 오셨을 지라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마음에 계신 것을 믿도록 하기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지 않다면 그는 결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는 바울의 진술이 있습니다.

그 말씀은 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이지만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인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이 그들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마음속에 계시기를 원한다고 한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과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일반적인 상태와는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계신다.”는 말씀에서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집으로 삼고 그 안에 산다.”는 복합어로서 “아래로”라는 의미를 가진 접두사를 붙인다면 그 단어는 “정착하여 집안에 산다.”는 뜻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거처를 차지한다는 관념을 강조하기 위하여 일부러 이 말을 선택하여 사용했습니다. 계3:20은 라오디게아교회에 보내는 편지로서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닫힌 문을 두드린다는 그 말씀은 그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며, 특별히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로서 영적인 생명을 소유했지만 매우 가난하고 아직 미숙한 상태에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과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그에게 지배를 받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틀림없이 주님과 관계있는 위치에 있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의 삶의 중심에 계시지 않은 것입니다. 주님은 실제로 그들의 마음에 “계시지” 않으며, 그들의 마음속에 “거하시지” 않으며, 그곳에다 “주님의 거처를 삼지” 않으셨습니다.


오디게아 교인들에게 보내는 이 편지는 에베소 교인들을 위한 사도 바울의 기도를 깨닫는 열쇠를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일어난 모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들에게 더욱 가능한 일이 무엇인가를 깨닫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으며, 또한 그들이 특별히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과 더욱 친밀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은 그들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강건해지기 전에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위대하고 특별한 손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우리 자신이 집으로서 준비되어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미 그들에게 말씀한 바와 같이 그 교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거처”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그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거처가 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마음이 아직 에베소 교인들에게 준비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바울은 그들이 그것을 준비하기를 열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진술 속에는 이것을 더욱더 확실하게 설명하는 차원 높은 요소가 있는데, “거한다.”는 말의 시제를 부정과거형을 사용했다는 것이며, 그것은 단번에 일어났지만 영원토록 효과를 미치는 어떤 의미를 수반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는 에베소 교인들에게 단순히 일반적인 축복이 아니라 특별한 축복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는 것이며, 이 축복은 “지금까지는 내가 실제로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몰랐지만 이제는 주님이 자신을 나에게 나타내셔서 나는 그분을 알고 주님은 참되시며 나에게 살아계시며, 그것은 내 인생의 최고의 순간이라고 말 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축복입니다.

그 다음에 이것은 주님과 의식적인 교제를 할 수 있게 하며 주님을 기뻐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의식적인 교제를 즐기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의식적인 교제를 즐기는 것이 없이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고, 우리가 주님과 의식적인 교제와 주님의 임재에 대한 인식, 그리고 주님과의 의식적인 즐거움을 갖지 못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주님을 의지하고 그가 하신 일을 의지한다면 우리는 주님께 기도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주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 모든 것을 지배하신다는 것이며 그리스도께서는 성령께서 우리의 몸 안에 거하시는 것과 같이 똑같은 방법으로 들어오신다는 것입니다.

“만일 네가 문을 열기만 하면 내가 친히 네 속에 들어갈 것이며 네게 나 자신을 나타내겠다. 네가 그때 이제까지 결코 경험하지 못했던 친교로서 나를 알 것이다. 나는 네 속에 들어가 네 안에 거하리라.”고 하시는데, 이것은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믿음으로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2. 진리의 서광


우리가 이 구절을 대하면서 항상 명심해야 할 것은 이 기도는 이미 성도가 된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며, 기초가 튼튼한 성도들과 여기서 지적한 가능성들과 견주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우리의 신앙이 어느 지점에 도달한 그 위치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경지까지 계속 발전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며, 이전의 것은 버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귀한 소명과 상급과 푯대를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거하신다는 것과 성령의 인침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성령으로 인 쳤다는 것은 우선 구원의 확신의 문제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후사이며 그 기업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것이 되기로 되어 있다는 직접적이며 즉각적인 확신을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거하신다는 것은 주로 주님과의 교제의 문제입니다. 성령의 인침은 우리가 주님과 관계되어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증하는 것이라면 이 체험은 우리를 주님과 더욱 깊고 위대한 교제로 인도합니다.


분명히 두 가지 체험은 아주 위대한 것이지만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거하신다는 체험은 인친다고 하는 그것보다 더욱 영구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성령의 인침이란 종종 반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에게는 훨씬 영구적인 어떤 것이 있습니다. “거한다.”라는 말은 바로 “거주한다.”, “거처로 삼다.”라는 의미를 강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거하신다는 것을 너무 강조하여 구분해서도 안 되지만 실제로는 구분이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침에서 사람이 의식하는 것은 긴급성과 광명인데, 이는 모든 것이 갑자기 분명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거하신다는 체험은 더욱 깊은 수준이며 더욱 영구적인 것이어서 오히려 더 감미롭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남녀 간의 문제에 비유로 들 수가 있는데, 처음에 연애 할 때의 감정과 부부가 된 상태에서 오랜 세월이 흐른 뒤의 상태를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연애 할 때에는 열렬한 사랑의 표현들을 합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른 부부의 사랑의 표현은 감소됩니다. 그렇다고 사랑이 없어지거나 적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사랑은 원숙하여 지고 더욱 발전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의 인치심과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거하신다는 것 사이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거하시는 것은 더욱 위대한 사랑과 지식이며 더욱 절친한 친밀성이며 더욱 깊은 교제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의 처음 체험인 짜릿한 요소가 항상 수반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를 이해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은 이해를 초월하는 신비적 진술이며 체험입니다. 우리가 들은 바와 같이 우리의 몸은 우리 속에 거하시는 성령의 전이며, 성령은 하늘에 계십니다. 그러나 내 안에도 계신데, 이것은 신비적 관계라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지적인 이해의 영역보다 아주 더 고상한 다른 영역이 있고 우리는 진리의 광명과 광채에 대하여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거하시고 정착하실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거처로 삼으시고 그리스도께서 안에 거하신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생활을 지배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말로 한다면 “그리스도께 도취 되어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준비 된 마음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확실히 계시는지를 아는 것과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 최상의 특권과 이 지극히 큰 기쁨의 원천을 즐길 수 있는가를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것을 향한 우리의 욕망을 돋우고 우리의 소원을 일으키기 위해서 이것이 무슨 뜻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위대한 경험 중에 찰스 웨슬리의 찬송가중 하나를 예를 들겠습니다.

 

당신의 풍요롭고 신성한 사랑으로 고요한 평안의 원천에 숨기시네.

나의 원수로부터 나의 도움이 되고 피난처 되시니

당신께서 나와 같이 할 때 나는 안전하네.

보라! 죄와 슬픔과 부끄러움에서 예수님, 당신의 이름으로 나를 숨기옵니다.

당신의 능력 있는 구원의 이름은 나의 행복한 영혼을 지키네.

그것은 안락과 능력과 평화와 기쁨과 끝없는 사랑을 가져오네.

당신의 사랑스러운 이름으로 나에게 용서와 신성함과 천국을 주시네.

피곤할 때에 나의 휴식이 되시며, 고통 중에 나의 안락 되시니

예수님, 당신은 나의 모든 것 중의 모든 것 되시옵니다.

나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고 전쟁 중에 평화와 잃은 중에 얻게 하시네.

고통 중에 나의 미소가 되시며 부끄러움 중에 나의 영광과 나의 왕관되시네.

내가 궁핍할 때에 풍부하게 채워 주시고

약할 때에 나의 능력 있는 힘이 되시네.

속박 중에 나의 완전한 자유되시며

사단의 어두움 속에서 나의 빛이 되시네.

내가 부를 때마다 나의 도움 되시며, 내게 머무르시고

죽음 중에 나의 생명 되시며, 나의 천국이며, 나의 모든 것이니이다.


우리가 이것을 경험할 수 있고, 또 그렇게 말할 수 있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의미가 될 수 있으며,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마음속에 계실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사귐과 그로 인한 충만한 만족을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찰스 웨슬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완전한 만족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주께서 만일 누구든지 그에게 오는 자는 “결코 배고프지 아니하고”, 만일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결코 목마르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신 것들을 진리라는 것을 증명했으며, “영원한 생명의 샘물이 솟아오르는 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속박당한 심령의 완전한 자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육신을 믿으며, 성령의 능력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삶에 아무런 효력을 발생시키지 못한다면, 그 삶은 그리스도의 참 평안과 자유, 그리고 그로부터 오는 많은 영적인 복들을 누릴 수가 없으므로 참으로 가여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경험은 우리 중 모든 사람들에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구원을 얻었고, 같은 생명을 선물로 받았으며, 같은 체험을 할 수 있고, 같은 삶을 살 수 있으며, 같은 부활에 대한 지식을 알고, 같은 천국에 간다는 것을 기뻐할 수 있기 때문에 이 경험을 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평범한 개개인의 축복된 경험을 하고 그것에 대해서 증거할 수 있는 것은 완전한 역사적인 사실로서 에베소 성도들에게서 증명됩니다.


우리가 그것을 믿고, 또 그것을 알고, 그것에 대해 깨닫고,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고 그것을 구하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며, 성령께서 우리를 강건케 하시고, 우리 안에 역사하시며, 우리를 감동케 하사 우리가 원하고 할 수 있게 되며, 우리의 마음속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 들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분은 그분 자신의 약속을 실현하실 것인데, 그 약속은 “나는 너에게 나를 나타낼 것이며, 내가 와서 네 속에 나의 거처를 정할 것이고, 아버지와 나는 네 속에서 살리라.”는 것입니다.

 

 

4.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짐


우리는 이제 17절의 마지막 말씀인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라고 하신 말씀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혀져 왔고 터가 굳어져 왔다고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언제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축복이나 거룩함보다 우선적으로 주님 자신을 구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 안에 있는 모든 거룩함과 축복과 모든 상태는 우리와 인격적으로 교제하시는 주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의 결과로서 주어집니다. 우리의 첫째 소망은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거나 더 나아가서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교나 불교의 안에는 “거룩한 사람들”을 지향하는 정신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 관한 특별한 진리는 우리의 거룩함이 주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의 결과이며 주님과의 관계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이지 그것을 지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대한 우리의 지식과 우리의 사랑이 깊게 될 때에 우리의 영적 생활도 당연히 깊어집니다. 사도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것은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 거하신다면 그 결과로 “우리는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진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보다 오히려 하나님께 향한 우리의 사랑에 관하여 매우 특별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그 주제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믿음 안에서의 형제에 대한 우리의 사랑, 그리고 그리스도 안의 일과 활동에 대한 우리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주된 특징이 사랑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진다.”는 두 가지 표현을 한 것입니다.

 

 

1) 사랑 안에서 뿌리가 박힘

첫 번째 표현은 우리로 하여금 한 그루의 나무를 생각하게 하고, 두 번째 표현은 한 건물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 두 표현의 유사점은 커다란 나무와 커다란 건물 모두 깊고도 확고한 관념, 즉 변함이 없는 영구성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지만, 차이가 있는 것은 나무에는 생명과 생기와 힘과 앞으로 계속 성장한다는 비전까지 포함 되지만 건물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건물은 압박과 충격과 그것에 가해지는 다른 모든 영향들을 견딜 수 있는 강함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살펴 볼 것은 사랑 가운데 “뿌리가 박혀져 있는” 것입니다. 뿌리가 깊은 나무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 있는 사랑에 대한 사도 바울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사랑이란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심겨지고, 또한 성장하는 흙이라고 하는 관념을 가져다주고 있습니다. 우리를 세우려고 도우며, 우리를 강한 그리스도인으로 되게 하려는 모든 영양분은 바로 사랑이라고 하는 흙으로부터 나옵니다. 우리는 그 속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그 나무는 그런 방법으로 아주 많은 영양분을 흡수합니다. 그 나무는 흙과 그 수분, 그리고 여러 가지 것들로부터 갖가지 영양분을 얻습니다. 그 필요한 것들은 그물과 같은 이 뿌리를 통하여 공급되어 그 줄기와 가지와 잎사귀에 전달됩니다. 이런 방법으로 나무의 생명은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참된 힘은 사랑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흔히 어떤 약하고 무기력하며 감상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러나 사랑은 강하며 사랑은 죽음같이 강합니다. 그리고 주님 자신이 사랑이시며 하나님도 사랑이십니다. 고린도 전서 13장의 교훈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사랑은 언제나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랑 가운데 뿌리박힌 자”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주님과 같이 그의 모든 동기가 사랑으로부터 일어나고 있으며 사랑으로 힘을 얻고 사랑으로 강권합니다. 그는 억제할 수 없으며 그 사랑을 실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믿음으로 그 마음에 거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그의 믿음은 사랑이라는 토양에 뿌리가 박힌 것이며, 그 뿌리는 그 근원으로부터 극히 귀중한 생명의 영양분을 공급받습니다. 이렇게 하여 사랑은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다시 나타낼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2) 사랑 안에서 터가 굳어짐

이제 두 번째 표현인 “터가 굳어져서”라는 표현을 살펴보기 전에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의 전 생활이 사랑 가운데 확고한 기초를 두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기독교의 근본 원리인 이 사랑의 원리로부터 우리의 전 생활을 끌어내야 하며, 또한 그 생활의 힘과 능력과 활력소, 그리고 모든 것을 끌어내야만 하며, 그리고 우리는 사랑의 뿌리가 박혀 있어야 함은 물론이고, 사랑의 “터가 굳어져” 있어야만 합니다. 그것은 마치 커다란 빌딩이 깊고 단단한 토대를 필요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가르치고 있는 원리도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행동은 언제나 사랑 위에 건축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혜로운 건축자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기초가 훌륭하고 충실하게 놓여졌는가를 확인한다는 것입니다. 일생동안 거주 할 수 있고 다음 세대까지도 기거할 수 있는 튼튼한 건물을 지으려고 한다면, 기초에 매우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것이고 또 충분한 시간을 들일 것이며 기초를 세우는 데 공력을 들일 것입니다. 건물이 크고 높을수록 기초는 더욱더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초는 사랑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구별 되는 것도 사랑인데, 그들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을 사랑하고 자기의 원수들은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원수들이 증오하는 만큼 같이 그들을 미워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원수를 미워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들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주초 위에 서 있기도 전에 보다 차원 높은 체험을 추구하는데 시간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주초 위에 서게 될 때까지 단지 지식만으로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깊이와 높이를 전혀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간구한 기도의 요지입니다.


주님은 영광의 자리를 내버리시고 죄인의 모습으로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의 형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은 스스로 종이 되시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그 모든 것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 보시기에 선하고 사랑스러웠기 때문이 아니며, 또 우리가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도 아니었으며, 오히려 정 반대로 그를 반역하고 증오로 가득 차서 서로 미워하고 주님을 미워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셨습니다. 자신을 십자가에서 죽이기까지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이 가지셨던 이 마음이 바로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할 그 “마음”입니다. 분명히 우리는 이러한 자세를 성장시켜야 하며 우리가 그것을 소유했는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나는 나를 저주하며 내게 거짓으로 모든 것을 말하는 원수들을 사랑하며 축복하고 있는지를 주의 깊게 생각해야만 합니다. 더군다나 우리가 진실로 이 거대한 건물을 세우려고 한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의 요구와 명령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사랑의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사랑이 변덕스러워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사랑은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는 튼튼한 기초위에 세워지고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