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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강해 30 (엡3:7-8) / 로이드존스

새벽지기1 2016. 6. 7. 22:11


성경: 엡3:7-8절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계시하시고 전하라고 위임하여 주신 말씀의 본질에 대하여 설명하고 난 후 사도 바울은 한층 더 심오하고 감동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계속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본문에서 자기가 복음의 일꾼이 되었다고 합니다.

일꾼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봉사하는 자를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하고 있는 내용은 그가 이방인들을 가르치고 이 큰 은혜를 그들에게 전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그 “비밀”을 계시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며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이 큰 축복을 전달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계시를 받게 되었고, 나아가 그들에게 전파한 것입니다. 그는 그 일을 하도록 부름을 받았고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능력을 받았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에 의해서 전파 된 복음으로 말미암아 이제 유대인들과 함께 후사가 되어 누리게 된 모든 축복과 자기가 그 일의 일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이며, 그리고 거기에서 그는 하나님의 소명으로서의 기독교 사역자에 대한 놀라운 설명을 하고 있는데, 아마도 이것은 현대의 교회가 인식해야 할 필요가 있는 첫 번째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현 시대에는 성직의 권위가 상실되고 무시당하고 있으며, 성직에 대한 참된 개념이 격하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인간과의 유일한 화해의 방법과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하여 하나님의 위대한 계시를 가르치기 위하여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스스로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이라고 한 것은 이런 사실에 대하여 비꼬는 말도 아니고, 겸손을 가장한 것도, 위선도 아닙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주장했던 자신의 주장에 대한 부정도 아닙니다.

그에 대한 대답은 그가 바리새인으로 있을 때에 그리스도를 모독하고 훼방하였던 다소의 사울이었는데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도가 되었으니 이 사실에 대하여 항상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사실 자신이 처해있었던 위치를 뒤돌아보고, 그것을 기억하여 자기가 구원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았음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의 이러한 고백은 그가 주님과 항상 가까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결점과 부족을 잘 알고 있었고, 꾸준히 일하여 왔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한 일은 거의 없으며 얼마나 더 많이 일을 해야 할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영예와 존엄성을 알고 있지만, 그리고 복음을 전파할 특권을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는 언제나 자신의 부족함과 부적당함에 대하여 깨닫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선하심과 친절하심에 대하여,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파할 때 직면하게 되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을 증오하던 사람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것”에 대한 의문입니다.

 

하나님의 일들을 어리석은 것으로 생각하던 사람들이 그것들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그것들을 위하여 살고, 그리고 그의 가장 큰 소원이 그 하나님의 일들을 더욱더 아는 것이 되게끔 변화시킬 수 있는 것에 대한 의문입니다.

그 대답은 오직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의 “효과적인 역사”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체험적으로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 중에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효과적인 역사”가 아니었다면 사도 바울은 결코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된 후라 할지라도 바로 이 능력을 떠나서는 무력한 존재에 불과할 것인데, 그의 전 인생관을 변화시키고 그를 일꾼으로 부르시고 그 임무에 필요한 은사를 주셔서 진리를 깨닫고, 설교하고, 글을 쓰고, 가르칠 수 있는 은사를 주신 것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입니다.

목사님들을 교회에 주셨으며,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은사와 봉사의 직책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우리 자신만으로는 무기력한 존재이며, 실로 아무도 자기 자신의 힘과 능력만으로 복음을 증거할 수 없습니다. 유창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을는지는 모르지만 이야기하는 것이 전파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런 결과도 가져오지 못할 것입니다.

효과적인 목회사역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이 “활력적인 사역”이 있습니다.

인간의 어떠한 재능이나 방법이나 재간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것을 연마시키고 적응시켜 다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모두 하나님의 “능력의 활동적인 사역”의 결과로서 주어진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가 알아보아야 할 것은 바울은 도대체 무엇을 전파하고 있었던 것이며, 또한 우리는 무엇을 전파해야 하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물론 우리에게 가장 우선적인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요”로서,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복음의 정수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측량할 수 없는 풍요를 주시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친히 측량할 수 없는 풍요가 되신다는 뜻입니다. “풍요”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비밀” 이었지만 이제 “계시”됨으로서 우리가 알게 되었는데,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것이 계시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그것에 대하여 아무것도 알 수 없었을 것이며, 또한 그 누구도 혼자 힘으로는 그 풍요를 발견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발견하기 위하여 노력하였고, 기독교를 철학적으로 접근하려고 하였으며, 밖에서부터 기독교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였지만, 그런 식으로는 도저히 그 풍요를 찾아낼 수 없으며 측량할 수도 없습니다.

인간의 힘만으로는 그 풍요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계속해 가면서 이 풍요에 대해서 더욱 놀라고 있으며, 그는 때때로 이 보물 창고 안에 있는 모든 방을 둘러보았다고 생각했는데도 그때마다 또 다른 방을 발견하게 되곤 하였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요의 새로운 면을 발견해 나가게 될 것이며 측량할 수도 없고 끝을 찾아낼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그리스도의 풍요란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비록 그것들이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일 지라도 단 몇 가지라도 설명해 보려고 노력은 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 모두를 위하시는 그리스도 안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우리는 가난뱅이며 빈털터리로서 존재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큰 세계 속에서 세계의 여러 가지 문제와 가능성들 속에서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데, 해결해야 할 첫 번째 문제는 언제나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가 되십니다.

우리가 어떠한 죄 가운데 있었을 지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바로 그 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써 옷을 입고 하나님의 면전에 설 수 있게 됩니다.

의는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의 한 부분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의만 되실 뿐 아니라 우리의 거룩함도 되시며, 우리의 모든 것이 되셔서 우리를 흠과 티가 없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하십니다. 또한 우리를 빈곤 가운데서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 가운데 있게 하시며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되십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큰 필요는 생명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존재하고 있을 뿐, 생명을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생명은 그리스도에게서만 찾을 수 있으며, 그 생명은 하나님과의 관계 되어 있어서, 하나님과 교제를 이루며 기뻐하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충만함 속에 그 생명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그 안에 있는 우리는 영원히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고 배고프지도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가 되어 버린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이 생명은 우리 속에서 영원토록 솟아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소유하게 될 때 그의 풍요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다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큰 보화이며, 이 세상에서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아주 귀중한 재산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주께서 그의 평안을 주실 것이니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어떠한 일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아뢰면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하십니다.(빌4:6~7)

이 모든 것이 그 풍요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아는 사람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그것으로 말미암아 미소를 지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보물 창고에 있는 것들의 일부일 뿐입니다.

우리가 이 풍요, 즉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즐길 때에 행복할 수 있습니다.

값없이 주시는 이 모든 보화로 인하여 우리는 조금도 궁핍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러한 궁핍 가운데 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모욕 하는 것이며 그리스도 자신을 향유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문 밖에 서서 두드리고 있다는 말씀은 회심하지 않은 자를 위한 말씀이 아니라 라오디게아 교회의 회심한 자들을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분이 들어오셔서 우리에게 평화와 기쁨과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채워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으로 하여금 들어오게 하시고 그 풍요를 기대해야하며, 그 풍요에 의하여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중 그 누구도 가난뱅이로 살아가는 것을 금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중 그 누구도 가난과 궁핍과 고통과 걱정과 불안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금하십니다.

 

오늘날 세상은 우리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적인 파산상태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과연 그리스도 안에 해답이 있는가 하고 의심하고 있을 때, 우리에게서 보이는 것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알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기 전에 폭풍 속에서도 고요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여 줌으로서 하나님의 은혜 아래 그들의 눈이 열려 회개하게 되고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측량할 수 없는 풍성”에로 나아오게 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