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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강해 28 (엡3:1) / 로이드존스

새벽지기1 2016. 6. 2. 06:44


성경: 엡3:1절

 

3장의 처음에 나와 있는 “이러하므로”라는 단어는 이 장의 앞부분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시사해 줍니다. 그것은 앞에서 이야기 한 내용,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밝혀진 놀라운 진리는 복음을 믿는 이방인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인들과 한 몸이 되었다는 메시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하므로”라는 말로 시작을 하지만, 여기서 논술을 중단하면서 주제에서 벗어난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현대의 학자들이나 문장가들은 바울의 서신에 오점으로 지적하면서 아주 좋지 못한 문체라고 비평합니다. 그러나 바울로 하여금 주제를 떠난 이야기를 하게 했던 원인을 찾아보면 1~2절과 13절에서 해답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라고 말하며 1절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을 위하여 갇힌 자.”라고 자신의 처지를 묘사한 말과 연결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바울은 어떤 신학적 논문이나 문학적 걸작을 쓰기 위해 곁길로 빠져 나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는 자신에 대하여 건강과 장래에 대해 걱정하고 그가 죄수로서 환난을 당하는 것이 그들에게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목회자적 심정으로 그들에게 권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껏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영광스러운 면을 강조하며,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머리털 까지도 다 헤아리신 바 되었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을 해 왔기 때문에, 하나님을 참으로 잘 섬기는 사람은 언제나 잘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게 바울이 현재 처한 상황이 걸림돌이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이 그의 서신을 읽을 성도들을 돕고 있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면 그가 단순히 일반적인 말로 편지하거나 일반적은 위로의 말을 한 것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이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지만, 나는 계획을 가지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이 모든 일이 결국에 가서는 잘 해결 될 것”이라는 식의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여러 사건들에 대한 자기 자신의 태도와 반응을 그들에게 보여주고 나서 그들도 자기와 같은 방법으로 문제를 보아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우리가 까다롭고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게 될 때, 언제나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여야 할 영원한 원리를 여기에서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시련과 환난을 당하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메시지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왜 이런 일을 허락하시는가에 대하여 번민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혹은 그것은 우리에게 소중한 어떤 사람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경우에 해당하는 말씀일 수도 있고, 여러분의 믿음을 흔들리게 하는 교회 안의 어떤 일에 대한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박해를 당하고 있든지, 혹은 어떤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든지, 혹은 낙심하고 있든지, 그 어떤 일이든 간에 그것에 대처할 수 있는 위대한 말씀이 여기에 있습니다.

 

첫 번째 바울은 한 순간이라도 마음속에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에 속한 일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으며, 또한 자신의 공로를 내세워 불평이나 불만을 한마디도 토로하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바울은 불요불굴의 극기 정신으로 그 고통을 대처해 나가라고 하지 않으며, 지금 처해진 환경에 대하여 슬퍼하지 말고, 불평이나 불만을 품지 말라고 말하거나 침착하게 참고 견디라고 하거나, 장부처럼 견디라거나 용기를 내라는 식으로 가르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고 하며 자기가 “이기고도 남은 것”처럼 에베소 교인들도 이기고도 남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단순히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을 견뎌 내고만 있지 아니하며 그것을 초월하여 고난 중에서도 즐거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승리감에 도취하여 환희에 넘쳐 있습니다.

 

사도는 빌립보서 1:12에서도 똑같은 교훈을 말씀하고 있는데 거기에서도 그는 죄수로서 다음과 같은 편지를 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나나 나의 상태에 대하여 필요 없는 눈물을 흘리지 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나는 여러분들이 이 모든 사태에 대하여 내가 깨닫고 있는 바와 같이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즉 지금까지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은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디모데 후서 2:3에서는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라고 하며 12절에서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그리고 3:12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말합니다.

 

그는 모든 일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고 그 일속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도달할 장성한 분량입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었으며, 발에는 착고와 쇠사슬로 매여 있으면서 자신에 대해 동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스스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갇히게 되었으니” 로마의 법률 때문에 갇힌 일반 죄수들과 다르며, 그는 로마의 죄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그리스도의 죄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옛날에 바리새인으로서 그리스도를 훼방하는 자로, 유대인들의 율법교사로, 서기관들과 권위자들의 모든 해석을 가르치는 자라면 감옥에 있지 않고 자유의 몸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그로 인해 로마에 가게 되고 이 감옥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감옥에 있음으로 해서 그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뵙던 그의 생애의 놀라운 사건을 상기하고, 자신이 회심한 일과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모독하고 훼방하고 성도들을 박해하던 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사랑하사 그의 죄를 없애고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회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것이 생애 중 최고의 영예로 생각하므로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자로 인정을 받은 것에 대하여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신앙이 있음으로 해서 원형 경기장에서 사자에게 찢겨 죽을 때조차도 감사하고, 최고의 영예, 곧 최종적인 영광의 면류관으로서 주어지는 순교를 감사함으로 찬양하며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높은 차원의 단계가 남아있습니다.

바울이 당한 여러 환난은 그에게 있어서 그의 소명과 그리스도의 제자 된 신분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였습니다. 우리가 어떤 형태로든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고 있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예수님의 제자라는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딤후 3:12)

 

빌 3:10에서 그는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라고 표현하고 “이 고난들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채운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이 자신의 생애 가운데 지극히 큰 특권이라고 하면서 오히려 박해를 즐거워하고, 우리 자신에게나 교회에 일어나고 있는 힘겨운 일로 인하여 낙심은 커녕 그것을 즐거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고난이 극심할 때에, 그 영광의 기회와 특권들이 크다는 것을 생각하며 즐거움과 기쁨으로 이러한 일을 맞이하는 것이 근본적인 원리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