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 에베소서강해

에베소서 강해 34 (엡3:18-19) (1) / 로이드존스

새벽지기1 2016. 6. 22. 22:26


1. 모든 성도가 알아야 할 것


본문의 이 두 구절은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기도하는 데에 있어 사도의 참된 목적이 무엇이었는가를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전의 모든 기도는 이 간구를 위한 준비 단계로서 이 거대한 목표를 도달하기 위해 계획된 것입니다.

 

그는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라는 구절 속에서 하나님과 동료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다루어 왔습니다. 에베소 교인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미 그 복음을 믿었고 또한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위한 바울 사도의 기도는 모든 성도와 함께 이 사랑을 계속해서 알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다는 것은 확실히 단계의 문제로 보입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결코 알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깊고도 심오한 사랑을 발견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념적인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사랑으로서의 사랑을 말하는 것으로서, 결국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를 향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기를 갈망하며,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면 알수록 더욱더 우리를 향하신 그의 사랑을 알 수 있을 것인데, 이런 일들은 따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첫 번째 사실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것이 바로 우리들 모두가 그것을 위래 노력해야 할 목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또 알 수 있는 사실은 이 체험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성령을 받아들일 수 없고 성령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이 사랑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를 향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것을 받아 누릴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우리가 능히 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일부러 강조하는 단어를 선택해 사용하였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강건해 짐으로서 능히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 사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사랑을 알아보고, 사랑만이 사랑을 이해하며, 사랑만이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사랑을 알고 체험하고자 한다면 먼저 우리의 마음속에 사랑을 지녀야만 합니다. 성경은 읽지만 하나님을 미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속에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사랑만이 사랑을 음미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도는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라고” 말하는데 언뜻 보기에 여기에서 다소의 혼란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미 “사랑 가운데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 있다면 무엇을 더 필요로 하겠습니까? 위대한 성경의 원리가 바로 이 점에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한번은 주님께서 진리를 받아들이는 문제를 다루시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마13:12) 여기서 우리는 성경적인 역설의 전형적인 예를 볼 수 있습니다.

즉 “무릇 가진 자에게 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미 사랑을 가지지 않고서는 이 위대하고 궁극적인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갑자기 그분의 사랑을 아는 지식의 정상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 정상에 도달하여 “지식이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자”한다면 바로 지금 당장에 올라가기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당장에 평범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버리고 일반적인 수준에서 등을 돌리고 높은 곳을 향하여 나아가기 시작해야 합니다.

 

 

2. 넓이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


사도 바울은 여기서 헤아릴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함에 있어서 치수를 재는데 사용하는 네 가지 방법으로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와 장차 올 세상에서 모든 성도들이 주목해야 될 매우 영광스럽고 무한한 어떤 것에 대하여 고찰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주시하고 놀라워하며 그것에 관해 경이를 느끼면서 영원히 살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지금 이 현세에 이것을 시작하는 것은 우리의 일이며 그것은 가장 위대한 성도들의 특징 중 하나가 되어 왔습니다. 그것보다 더 큰 기쁨을 주는 것은 없으며 참으로 이것은 모든 사랑의 특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서 생각할 때뿐 아니라 그 사랑을 받는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도 기쁩니다. 그러므로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묵상하는 것보다 더 큰 즐거움은 없다고 할 것입니다.

 

 

1) 사랑의 넓이

여러분은 이 사랑의 넓이를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이 사랑을 묵상하고 그것을 숙고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는 그의 피로 인하여 하나님께 드려지는 성도들의 수입니다. 시대를 지나오며 성도라는 이름으로 살아왔던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성도들만큼 그분의 사랑의 넓이도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온 세계 각처에 분포되어 있는 성도들의 수와 이제까지 살다간 모든 성도들의 충만한 수가 그분의 사랑의 넓이이며 우리는 어느 날 영광 가운데 이 장면을 완전하게 보게 될 것입니다.

 

2) 사랑의 길이

길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끝없는 사랑의 인격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그의 사랑은 창세전부터 시작합니다.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갑자기 온 것이 아니라 창세전부터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름이 창세 이후로부터 “어린양의 생명책”(계13;18, 17:8)에 기록 되었다는 것을 읽어 볼 수 있습니다.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께서 나를 알고 계셨다는 이 사실은 지극히 놀라운 일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 특별한 존재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알고 계셨으며 우리의 이름은 그분의 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과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존재에 그것을 더하는 것과 그분이 그분의 마음을 우리를 위해 주시고 그분의 애정이 영원 전부터 우리에게 있었다는 것을 아는 일은 참으로 존귀한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향하신 그분의 사랑의 길이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변함이 없이 영원토록 계속될 것인데, 중도에 포기하거나 저버리는 사랑이 아닙니다. 이것이 그분의 사랑의 길이입니다.

 

3) 사랑의 깊이

우리 주님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본체”이셨으며, 그분은 영원 전부터 아버지의 품속에 계셨던 성자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그가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라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과 동등 됨을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얻어 내야 할 상급으로서 생각하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분은 오히려 “자신을 낮추시고” 그의 영혼은 영광의 형적을 포기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인간의 모습으로 죄와 수치로 가득 찬 이 세상으로 오셨습니다.

그는 스스로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고서, 오히려 자기 자신을 낮추사 동정녀의 몸에 들어가셔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처럼 살았습니다. 그분이 태어났던 가난하고 비천한 가정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이 이 세상에 계실 동안 그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회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비천한 일을 하셨습니까? 본래 그분은 하나님과 동등하셨고,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신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다음에 그분께서 인간의 손에 의해 고난을 당하시고, 오해를 받으시고, 증오와 적대와 악의를 받으신 일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피곤과 배고픔과 목마름으로 인하여 당하신 고난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을 체포하고, 그분을 시험하여, 조롱하고, 야유하고, 그분의 지극히 거룩한 얼굴에 침을 뱉었던 잔인한 인간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분을 채찍질하며, 그분을 비난했던 잔인한 사람들과 골고다로 가는 도중에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비틀거리는 그분을 생각해 보십시오. 또 나무에 못 박히신 그분을 보시고, 갈증을 참아 내면서 고통을 견디어 내면서 고민하며 부르짖는 그 음성을 들어 보십시오. 우리의 죄가 그분에게 담당되어질 때의 그 무서운 순간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또한 한 번 그의 아버지께서 얼굴을 외면하시기조차 하시는 일을 당하셨으며, 그리고 그의 영혼이 떠나 죽으시고, 매장 되었으며 무덤 속에 눕혀졌습니다.

 

생명의 창조자요, 만물의 창조자이신 그분이 무덤 속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분께서 왜 이 모든 일을 해야만 했습니까?

놀랍게도 그 대답은 여러분과 저를 위한 그분의 사랑 때문입니다. 즉 그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분의 사랑의 깊이입니다.

 

4) 사랑의 높이

사랑의 높이라는 말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목적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들어올리시기 위해서 목적하신 그 높이를 그가 서술한 방법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뿐 아니라 우리에게 선을 이루시기 위해서도 돌아가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죄를 없앨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기 위하여 죽으셨으며, 우리를 형벌에서 구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아들, 그리고 하나님의 후사,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가 되게 하시려고 죽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위한 그분의 목적이며 그가 하신 모든 것은 그러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에게 이 생명, 즉 생명의 새로운 원리를 주셨기 때문에 그분은 자신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우리에게 거하시게 하십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이 사랑과 이 사랑의 지식으로 충만하게 채워진다면 우리는 완전히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를 강건하게 만드는 것은 지식입니다. 그것이 바울 사도가 이 에베소 교인들이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닫도록” 끊임없이 기도한 이유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 그것 안에서 자라가며, 그것 안에서 기뻐해야 합니다.

 

3. 알 수 없는 것을 아는 일


우리가 사랑에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 강해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공부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이 지식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무엇인가를 공부하면서, 사랑을 마음과 지성으로만 이해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로 사랑은 사랑만으로 이해 할 수가 있기 때문이라고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도가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 이 같은 지식의 정신적인 면을 설명하는 한 단어를 일부러 선택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외견상으로 보이는 모순은 사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해하고, 정신적으로 깨닫는 것은 전적으로 지적인 과정만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해하는데 지적인 이해가 언제나 필수적이기는 하지만, 완전히 지식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사랑에 대한 개념을 순전히 감정적으로만 생각하고 감상적인 태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데 있습니다.

사랑이 이성과 전혀 무관한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랑 속에는 우리가 무시해서는 안 될 지적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를 깊이 생각 할 때에 우리의 지성으로 이런 치수 들을 논해야 하고 자신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하며 묵상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사랑이 더욱 풍성해짐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사용한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야 한다고 하는 말에서 “알다”라는 말은 “깨닫다”라는 말보다 어느 면에서 보더라도 의미가 더 강한 말입니다. 그 말은 지식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개인적 경험에서 얻어진 지식과 경험 안에서 터가 굳어진 지식을 뜻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개념상의 지식을 넘어서 실험과 경험을 통해서 얻은 명백한 지식을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 속에서 발생하는 어떤 것들에 대한 자각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은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뜻합니다.

“안다”라는 말은 적극적인 면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하고, 사랑 속에 잠겨 보고, 싸여 보며, 사랑에 매혹되고, 충만하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고, 측량할 수 없는 자신의 사랑을 확증 적으로 알게 해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 “지식에 넘치다.”라는 말의 의미를 살펴보면, 그 말은 실제로 “탁월한 지식”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관한 탁월한 지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된다 할지라도 일부분만을 알게 될 것이며 그것은 결코 마르지 않는 바다이이며, 다함이 없는, 찾아내려야 찾아낼 수 없는 무한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점점 더 많이 알게 될 것이지만 여전히 처음 시작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그 사랑에 대하여 다 알지는 못하지만, 아는 만큼 그 사랑을 누릴 수 있기에 좀더 많이 알고 좀더 많은 사랑을 누리며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4. 최심원(最深圓)


우리가 넓이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를 이해하고,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있다면, 그리스도를 우리들 공통적인 중심으로 하여 여러 가지 동심원 안에 배열되어 있다고 가정해 볼 때, 어떤 사람들은 구세주의 임재를 너무도 중요시함으로 인해 그분에게서 결코 떨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일 할 때조차도 주님의 도움으로서 그 일을 수행할 것이며, 일을 하면서도 혹시 주님의 영광의 빛을 단 한 줄기라도 놓쳐 버리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여 계속해서 그분을 응시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주님께 몰두하지 못하고 약간 멀리 떨어져서 이런 저런 여러 가지 일들에 바쁜 나머지 자기 자신의 일에만 눈을 돌리고 이따금씩만 자신이 사랑하는 빛을 응시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세속적인 계획에 너무나 몰두한 나머지 그리스도의 옆에 서서 대개 다른 길을 바라보고 있으며 이따금씩만 그 빛을 응시하고, 자신에게 희미하게 비추이는 빛이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인지 의심을 하면서 자신의 바쁜 일과와 다른 동류의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며, 자신의 여러 가지 일들로 마음을 졸이고 고심하는 데에만 시간을 보내고 구주를 위해서는 시간을 할애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와 교제를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체험이나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인 사랑에 대하여 알 수도 있고 이야기도 할 수 있는 상태에 까지 도달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속해 있는 이 땅을 떠나서는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지만, 이 땅에서도 우리는 그것을 누리며 살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으니 그것을 신비주의로 몰아붙여 성령을 소멸하는 자가 되지 말고,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서 그리스도와 교제를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 없이는 우리가 행복해 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최상의 축복을 누리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인하여 먹고, 마시며, 그의 사랑으로 인하여 일하고, 그의 사랑으로 인하여 삽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항상 활동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것을 금하십니다. 동기가 먼저 와야 하며 그 동기가 항상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이어야만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어떤 일을 하거나,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랑으로 인하여 어떤 일들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님에 대한 지식을 찾고 계속해서 그것에 대해 알게 될 때에 우리는 가장 내부에 있는 원 안에 속하여 주님의 거룩하신 얼굴을 바라보면서 만족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