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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강해 37 (엡4:1-3) / 로이드존스

새벽지기1 2016. 7. 11. 13:37


성경: 엡4:1-3절

 

1. 그러므로

본문의 말씀은 새 장의 시작일 뿐만 아니라 에베소서의 새로운 후반부의 시작입니다.

처음 세 장의 전반부는 기독교 신앙의 필수적인 구원의 방법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핵심적인 사항을 독특한 방법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4장부터는 우리의 실생활에 어떻게 적용 될 수 있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이 “그러므로”라는 단어로서 시작하는 이 말에서 신앙과 실천을 분명하게 서로 연관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라는 말은 어떤 부분에 대한 연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껏 공부해온 1~3장까지의 모든 말씀에 대한 연결고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공부해 온 말씀을 표준으로 하여 살아가야 할 생활을 안내해주는 접속사로서 기독교인은 어떤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하여 실천적인 삶을 영위할 것을 지적하는 권고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진리의 말씀을 순종하고 실천하며 행해야 합니다.

 

2. 부르심에 합당한 생활

우리는 앞서 기독교의 교리와 체험이 거룩한 생활을 하고자 하는 소원을 어떻게 일으켜 주는가에 대하여 공부하였습니다. 이제 우리가 살아가야 할 생활의 성격에 대하여 고찰해 볼 차례입니다.

 

사도는 먼저 “우리가 부르심을 받음에 합당하게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16절까지 하나씩 계속해서 말한 후에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한 것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고 보다 더 직접적이고 실제적인 지침을 지적해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언제나 일반적인 해설을 하고 난 후에 구체적인 설명을 합니다.

이 원리는 생활에 들어가서도 적용이 될 수 있는데 많은 사람들은 곧바로 구체적인 일로 뛰어들기 때문에 생활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대할 때에 먼저 일반적인 원리들을 찾아내고 그리고 난 뒤에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일로 나가야 합니다. 전체는 부분들보다 더 중요하며, 그 부분적인 사례들을 하나씩 이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생활 가운데서 일어나는 하나하나의 구체적 사건들은 결코 그것을 고립시켜서 따로 떼어놓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실제에 있어서 잘못을 저지르게 되고 잘못된 길로 빠질 우려가 많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언제나 보편적인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일반적인 원칙들을 분명히 하고 난 후에야 구체적인 것에 대한 설명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라.”는 말씀에 대하여 일반적인 사실에서부터 파악해 보며, 여기에 있는 모든 단어가 각각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 단어를 하나씩 살펴보아야 합니다.

 

먼저 “합당”이라는 단어에 대하여 생각해 보면 두 가지의 근본적이고 중요한 사실이 있는데 이 단어는 “조화의 사상”을 말하며, “어울리는”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실생활에서 교리나 실천의 어느 한 쪽에 전적으로 치우치지 말고 조화를 유지해야 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인에 합당한 즉 그리스도인답고, 그리스도인에게 어울리는 삶을 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기 때문에 그 부름에 합당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부름을 받은” 그것입니다. 참된 소명은 어떤 사람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불려짐을 당하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어두움에서 빛으로 부르심을 입었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부름을 받은자들은 모두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며, 그것은 모든 다른 사람들로부터 구별된 자요, 신분이 새롭게 된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미리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궁극적으로는 “영화롭게” 하십니다.

이것은 구원이 우리의 영혼 속에 계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 있는 사역의 결과로 주어지며, 성령께서는 생명의 새로운 원리를 알게 해 주시고 믿을 수 있도록역사하시는데, 결국 이 말은 우리를 믿게 하시려고 부르셨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은 6:44에서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느니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도 그 부르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부르심이 없이는 우리가 그에게 나아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마음을 열어 주시지 않는다면 그 말씀이 역사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늘의 부르심으로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을 깨닫는 자로서 살아가야하므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 가운데 항상 우리의 행동과 처신을 주관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위대하고 경이롭고 고귀한 부르심을 입었으므로 우리의 생활은 그 부르심에 맞고 그 부르심에 어울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 부르심에 합당한 행실의 첫 번째 일은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도다.”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복이니 우리는 언제나 이 사실을 기억하고 그 말씀이 지시하는 방법에 따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계속해서 그 다음 구절의 말씀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라는 말씀인데, 단지 우리를 지옥에 가지 않게 하거나 우리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그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그런 생활을 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사도는 하나님께서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라는 말씀을 상기토록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가족과 우리 아버지의 명예와 영광을 나타내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께 연결된 몸의 지체로서, 참으로 지금 이 순간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거주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 하늘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끝으로 사도 바울은 사실상 “여러분은 내가 살아가려고 애쓰는 것처럼 살아가야 합니다. 나는 지금 실제로 갇혀 있는데, 그것은 내가 할 일을 내가 결정하지 않기 때문이고,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노예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갇혀 있는 것은 내가 주님께 충성을 다하고 주님의 복음을 전파하기 때문이지만, 내가 전혀 염려하지 않는 것은 내가 나 자신을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책임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대로 선택하여 살아갈 권리가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를 부르신 그 참 뜻을 완전히 깨달아 알기만 한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데 문제가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상 모든 성도들이 증거하는 것처럼,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을 최고의 기쁨으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3. 영적 연합의 길

사도는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씀하는데, 이것은 전반부의 세 장에서 다뤄온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신”이라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 가운데서 제일 되는 목적으로 주어진 말씀이 통일의 문제로 계속해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의 모든 행위와 처신보다 선행 되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이 되는 문제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우정이나, 형제애, 동지애의 정신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리, 그리스도의 진리라고 할 수 있는 신학적이며 교리적인 진리에 토대를 둔 진리로 통일 되어야 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에서 “영이란 말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이 말씀은 어떤 인간적 우정의 정신이나, 운동 경기에서 한 팀이 단합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우리가 결코 인위적으로 만들어 낼 수 없는 성령으로부터 창출된 연합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님께서 창출해 내셔서 이미 존재하고 있는 연합된 그 통일을 깨뜨리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은 성령님의 고유 사역으로서, 성령님께서 우리 속에서 하신 일인데, 우리는 그것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이 연합은 세상에서 말하는 연합이나 합동과 전혀 다른 참된 통일로서 살아있고 생명력이 있는 유기적인 연합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연합이나 합동은 어떤 주어진 목적을 위해서 이질적인 분자들이 함께 모이는 외적인 것이지만,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은 안에서 시작하여 밖으로 활동하는 내적인 연합입니다. 그것은 꽃이나 나무나 동물의 육체에서 볼 수 있는 통일성에 견주어 볼 수 있으며, 또 본질적으로 유기적이며 생명력 있는 것으로서 인위적으로 조작된 것이 아닙니다.

 

이 연합에 대해서는 이미 2장에서 다뤄 왔으므로 잘 알고 있을 것인데, 이 연합의 정신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모든 생명의 현상에는 내적인 원리가 먼저 있고, 그런 후에 외적인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완전한 육체로부터 나온 생명을 가진 두개의 매우 작은 세포가 성장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는데, 육체는 각 지체가 하나씩 모여서 우연히 맞추어진 것이 아니라 중심 되는 생명으로부터 자라는 것입니다.

 

영적 연합의 문제에 있어서도 똑같이 적용 할 수 있는데,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은 근본적으로 무형의 것이면서 참으로 무어라고 정의하기가 어렵지만 그것이 나타날 때에 우리는 그것을 인식할 수 있으며, 성령이 내주하시는 다른 사람과 만나게 될 때 우리는 그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 영혼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합니다. 여기에서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육체를 통하여 영혼과 정신이 나타나는 것은 연합의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에서 “힘쓰다”라는 단어의 원래의 뜻을 살펴보면 “근면하다”입니다. 이 말은 속력을 암시하는 말에서 유래된 단어로서 우리는 어떤 일을 하기를 서둘러야 하며 그 일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나타내야 하며, 열심을 표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르심을 입은 이 부름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일에 대하여 서둘러야 하고, 부지런해야 하며, 결코 그것을 잊지 말고, 이 일이 우리 생활의 가장 주된 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