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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강해 38 (엡4:4-6) (1) / 로이드존스

새벽지기1 2016. 7. 23. 07:32


성경: 엡4:4-6절(1)


1. 그리스도의 몸

본문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왜 우리가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만 하는가에 대하여 충분하고도 저항할 수 없는 근거를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제시하듯이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의 지체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개인적인데만 자기의 시간을 다 허비해 버립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교회의 놀라운 모습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으며 우리가 이 위대하고 신비로운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라는 것을 일깨워 줌으로서 우리들을 바로 잡아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의 독립된 개체라고만 생각하여 몇 사람씩 작은 파당을 조성하고 나누어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헤치는 행동들입니다. 만일 우리가 교회를 전반적으로 이해하고 교회가 하나의 연합된 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더라면, 이런 일은 상상조차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본문의 세 절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에 대한 교리를 설명하면서 “하나”라는 낱말을 7번이나 사용하고 있는데, 7이라는 숫자는 하나님의 수로서, 완전의 수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통일성은 하나님의 신성의 완전함이 나타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합니다.

 

 

그리고 세 개씩 짝지어져 있는 각각의 모임들은 거룩하신 삼위일체 안에 있는 각 위를 따라 배열되어 있는데, 처음 세 개는 성령께 대한 것이며, 그 다음 세 개는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것입니다. 이것의 의미를 아는 것은 우리가 이 통일의 교리를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며, 우리들의 매일의 실생활에서 그것의 중요성을 알 수 있는 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일곱 번째는 6절에 나와 있는데 마지막 말씀을 잘 관찰해 보면 그 말씀 속에는 통일의 모든 것이 종합적으로 요약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에 우리는 소심하고 병적인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인식하고 먼저 우리의 신분은 무엇이며, 우리가 어디에 위치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느 곳에 위치하도록 하셨는지를 먼저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우리가 이 해석의 문제에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순서입니다. 먼저 성령을 말하고 그 다음에 성자, 그리고 맨 나중에 성부 하나님을 말함으로서 끝을 맺고 있습니다. 교회는 성령의 단체요 공동체인데, 그는 우리가 어디에 위치해 있으며 전에는 우리가 어떤 위치였는가 하는 바로 거기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 좀더 차원 높은 단계, 즉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신 몸으로서의 교회를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부 하나님을 설명하는데, 이것은 성령이 우리 속에 내주하시며, 우리가 유일하신 중보자를 통하여 성부 하나님께 나간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성자께로 인도하시고, 우리의 중보자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성자는 우리를 성부 하나님께로 인도하십니다.

 

 

이제 4절의 주제가 되는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는 통일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는 여기서 교회를 “한 몸”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본질적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신비스러운 교회인, 그리스도의 신비스러운 몸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다수로 존재할 수 없으며, 사람은 많은 몸을 가질 수 없고, 오직 하나 밖에는 없습니다.

 

 

이같이 교회는 오직 하나의 완전하고 신비롭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교회가 있을 뿐입니다. 이 교회는 여러 대륙과 여러 지방 출신의 모든 종족과 여러 인종의 사람들로 구성 되어 있고, 이러한 다양성이 있을 지라도 보이지 않는 신비스러운 교회에는 아무런 변화도 주지 않습니다. 이 교회 안에는 하늘 아래 있는 모든 나라와 전 지상의 모든 종족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간이 흐른다고 해도 이 사실은 변함이 없이 전 세대를 통한 교회로 존재합니다. 신분이 어떻든지, 얼마나 탁월하고, 얼마나 뛰어나다고 할지라도, 그렇지 못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가난하든, 부자이든, 그런 것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런 모든 조건들은 하나님 백성들의 충만함으로 이 몸 하나에 다 들어있습니다.

 

 

몸의 각 부분들은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매우 다르게 보입니다. 외관상으로도 다르고 기능이 다르지만 그것들이 모두 함께 소속되어 있으며 모두 다 몸의 필수적인 부분들이라는 이 본질적인 면에 있어서는 모두 같은 것입니다. 한 몸 안에는 여러 다양성들이 있지만 서로 이질감이 없이 조화롭게 통일을 이루고 있어야 하는데, 만일 몸의 한 부분이라도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다면, 그 몸은 완전하지 않은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어딘가 병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서 떨어질 수 없고 나누어질 수 없는 지체의 각 부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을 힘써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2. 한 성령

우리는 이제 사도가 사용하고 있는 두 번째 단어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많은 문제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만일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만일 교회가 몸과 같다면 그 몸은 어디서 온 것이며, 어째서 그 몸이 형성되었으며 생기게 되었는가? 그 몸의 생명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그 몸을 살아있고 생명력 있는 유기적인 조직체가 되도록 하는 것은 무엇인가? 사도는 이 문제에 대하여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다.”라는 말로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성령 자신의 활동의 결과라고 할 수 있는데, 성령님께서는 교회를 만드시고, 유지하시고, 부흥케 하시고, 생명을 주시는 일로 교회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성령께서는 그 몸의 한 중심에 계셔서 전 유기체에 생명과 삶을 부여 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교회의 통일에 대한 이 교리가 참으로 필연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사력을 다해, 그리고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는 “성령은 하나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오직 한 분이시며 그는 나누어질 수 없습니다.

악령들은 수도 없이 많지만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제 삼위이시며 거룩한 인격으로 교회의 통일을 이루시는 분은 성령으로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성령의 능력이 나누어질 수 없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교회의 통일 또한 나누어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님을 3인칭의 “그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성부 하나님과 동등한 인격이시며, 성자 하나님과도 동등한 인격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 데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본질은 같습니다. 그런데도 기계적이지 않은 것은 생명의 사역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에베소서 2:21~22에서 성전 건물의 건축에 쓰일 돌들이 모아져서 건물로 지어지기 전에 미리 준비 되어졌다는 것을 읽어서 알고 있는데, 우리가 채석장에 있는 돌들과 같아서 그것을 실제 건물을 지을 때에 사용하기 위해서는 자연석 그대로의 돌은 사용할 수가 없어서, 사용처에 적당하게 다듬어진 후에 건물의 한 부분이 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의 한 부분들이 될 수 있기 전에 준비하는 일이 필수 불가결한 것처럼, 인간은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가 될 수 있기 전에, 혹은 하나님의 성전의 이 영광스러운 건물의 한 부분이 될 수 있기 전에, 자연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일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성령의 사역을 생각해 보면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될 수 있기 전에 우리 속에서 역사하신 필수적인 이 예비적 사역을 확인해 보기 위해 우리 자신을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성령님은 우리 자신의 죄에 대한 책망과 동시에 자신을 반성하도록 합니다.

 

 

살리심과 중생을 통해 우리에게 삶의 새로운 원리를 제공해 줍니다.

그로 인해 주님의 생명을 갖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될 수 있습니다.

 

 

성령의 특별한 사역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 같이 빈천한 자리에 있다가 이 동일한 새 생명을 얻은 것이니 서로를 비교하거나 대조해 보아서는 안 되며 우리는 주 안에서 연합되어 한 소원을 가진 자로서 우리 주님을 바라보고 온전히 하나가 되어 그를 영화롭게 해야 합니다.

 

 

우리를 준비시키시고 이제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연합시키는 일을 하시니 우리는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모시게 되었습니다.(고전12:13)

 

 

성령께서는 친히 온 몸에 생기를 불어 넣으십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며(고전 3:16~17), 또 “성령의 전”(고전6장)입니다. 성령께서는 몸의 유기적인 통일을 유지하는 수단이 되시는 동시에 그 통일을 유지하시는 행위자이십니다. 그렇게 볼 때 성령은 우리 육체의 생명이나, 육체의 혈액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는 모든 지체를 함께 연결시키며 하나로 만드는 연합하는 영이십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우리 모두에게서 같은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우리를 지배하심으로서 성령은 우리 속에서 그 자신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 성령의 열매들을 살펴보면 사랑은 언제나 연합을 하고, 희락 역시 즐거움으로 연합합니다. 또 화평은 싸움과 분열의 반대로 작용하여, 그것으로부터 오래참게 합니다. 그리고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는 그 하나하나가 통일을 증진시킵니다. 성령께서 이 열매를 맺게 하실 때에 분열과 불화가 일어날 여지는 전혀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이렇게 연합하게 하여 통일을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3. 신앙의 부흥

지금까지 우리는 성령의 일반적인 사역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이제 모든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일반사역 위에 특별한 은사를 더하시는 성령의 특별 사역에 대하여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고린도 전서 12장에서 가르치는 능력의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믿음을, 그리고 다른 이에게는 또 다른 은사를 성령께서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은사들이 다 성령으로부터 온 선물이라는 것을 우리가 깨달을 때만 진정한 통일을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순절 날에 임했던 성령의 강림 사건은 이 교리의 축제일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성령의 특별한 사역은 교회 안에서 끊임없이 계속되는 성령의 일반 사역 안에서 나타납니다.

 

 

성령은 사람을 회개시키고, 자기의 부족함과 무가치함을 깨닫게 하고, 기도하게 하시며, 또한 교회 안에서 끊임없이 성화의 사역을 계속하십니다. 그러나 때때로 성령의 특별 사역이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역사를 통하여서나, 체험을 통해서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특별사역을 보편적인 것과 특수한 것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성령의 보편적인 특별 사역은 일반적인 교회생활 가운데서 볼 수 있으며, 특수한 예는 교회 안에 있는 개인들에게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의 보편적인 특별 사역은 신앙의 부흥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데, 오늘날 그리스도의 교회를 생각해 볼 때 이 신앙부흥의 주제보다도 더 중요하고 긴급한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시대의 조류를 파악하고 있고 교회의 본질과 성령의 사역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있다면, 오늘날의 교회를 위하여 유일한 소망은 신앙부흥에 달려 있다고 단언할 수 있을 것인데, 그것은 인간이 계획하고 어떤 운동이나 기구나 노력에는 전혀 소망이 없고, 그것은 오직 그리고 절대적으로 성령님께 달려 있습니다.

 

 

신앙의 부흥에는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바와 같이 오순절 날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을 조금이라도 재현시키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을 동시에 많은 사람들에게 부어주시는 것으로서 때로는 한 교회에, 때로는 한 지역이나 그 인근지역까지, 때로는 온 나라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이 보편적인 성령의 특별사역의 효과는 교회에 나오지 않는 많은 사람들과 교회에 이름만 등록되어 있는 사람들이 회개하고 회심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지식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 하는데, 오늘날 이 신앙 부흥의 문제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성령이 교회에 임하시고 충만하심이 오순절 날에만 있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성령의 충만하심은 오순절 날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4:31의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는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그것은 분명히 오순절 날에 일어난 사건의 재현이라는 것입니다. 이곳에는 사도들과 다른 제자들과 세례를 받고 믿는 자들과 오순절 날에 성령을 받은자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사도행전 8장에 보면 이와 비슷한 일이 사마리아에서 일어난 것을 알 수 있으며, 그리고 가이사랴에 있는 고넬료의 집에서도 일어났습니다. 그 밖에 신약성경에 기록된 외에도 교회사를 보면 놀라운 사실들이 있으며, 오늘날에도 그러한 일들은 비일비재합니다. 우리는 신앙부흥만큼 교회의 초자연적이고 신적인 성격을 그토록 분명하게 입증하고, 성령의 사역을 그토록 명확하게 나타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성령의 능력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강력한 영적 부흥과 각성만큼 교회 내의 통일을 증진시키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신앙부흥의 형태와 특성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대체로 사도행전 2장의 서두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사건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신앙부흥은 갑자기, 예기치 않은 때에 나타납니다.

 

 

우리는 그 후 계속되는 교회사에서도 “홀연히” 또는 “예기치 않은 때에”라는 말을 덧붙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언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그의 일을 부흥시키실지 알 수 없습니다. 신앙부흥은 인간이 이룩한 어떤 일의 결과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 가운데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께서 어떤 부흥의 시기에 다른 여러 사람들보다도 어떤 특정한 인물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택하여 쓰시는 사람은 인간이 선택하는 기준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위대하고 은사가 있고 특별한 어떤 사람만을 쓰시는 것은 아닙니다.

때때로 매우 겸손하고 별로 눈에도 띄지 않는 사람을 쓰시기도 하는데, 그들의 재능에 의해서나 어떤 개인들이 하는 일이라고 볼 수 없는 조건에서 사용하셔서, 누가 보아도 그것이 성령의 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하심으로 명예와 영광을 받으십니다. 신앙의 부흥은 예기치 않은 때에 갑자기 일어납니다. 거기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 그리스도인들이 홀연히 성령의 임재와 능력과 영광을 깨닫게 되고 기이한 기분에 휩싸이게 됩니다.

여러 해 동안 복음을 믿어온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엄위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갑자기 새롭게 직통으로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곳에 계셔서 그 온 집에 충만하시다는 것을 느끼고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 할 것도 없이 상상을 초월한 일이며, 설명이 불가능한 일이며, 필설로 형언하기조차 어려운 일입니다. 교회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세상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신앙부흥의 큰 특징을 구분지어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사람들이 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방법으로 교리와 진리를 깨닫습니다.

그 뿐 아니라 그들이 전에 체험해 보지 못한 기쁨을 누리기 시작하고 하나님과 그들과의 관계에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너무나 기쁨이 충만한 나머지 다른 사람들은 그들을 보고 새 술에 취하였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성령의 기쁨”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게 되어서, 그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모두 성령이 자기들을 감동시키고 다스린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완전히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성령의 충만함은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칩니다.

다른 사람들이 몰려와서 “이것이 어찌된 일이냐?”고 묻게 되었으며, 그 때 베드로가 설교를 하자 그들은 울며 통회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던 자들이었습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결코 회개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이 성령이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하며 갑자기 회개하고 회심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이 열흘 동안 열심히 기도하였던 것처럼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하여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사를 보면 모든 시대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도하여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들의 무력함과 무능함을 깨닫고서 우리의 구주이시며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했으며 성령 충만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한마음으로 기도하고, 오순절의 사건이 재현될 것을 기도하며, 성령의 부흥과 하나님께서 또다시 권위와 능력과 권세로서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임재하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지금도 모든 능력으로 우리 가까이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성령을 보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오시면 우리도 놀라고, 교회 밖에서 비웃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이 깜짝 놀란 일을 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