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 에베소서강해

에베소서 강해 40 (엡4:7-10) / 로이드존스

새벽지기1 2016. 8. 3. 14:37


1. 그리스도의 선물

사도는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을 지키라”는 권유로 교회의 통일에 대한 주제를 계속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약간 다른 방법으로 권유합니다. 우리가 “통일”을 “일률적”으로 같은 의미에서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렇게 활기가 없는 일률적인 것은 참된 통일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여기서 통일은 그보다 훨씬 더 크고 장엄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4~6절을 공부하면서 우리는 사도가 “하나”라는 단어를 7회나 사용하였는데, 그것은 그 말씀들을 통하여 통일의 위대한 원리를 정립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7절에 와서 “우리 각 사람에게”라고 표현을 다르게 합니다.

사도가 갑자기 하고 있는 이 말이 통일을 와해시켜 버릴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있지만, 그것은 통일을 파괴하는 것이 아닙니다. 통일이 우리 자신의 위치를 상실해 보리는 것이나, 구별할 수 없는 단단한 덩어리의 일부로서 되는 것이 아니라, 통일을 통해서 하나 됨의 위치에 있는 우리지만 여전히 개인적인 자아가 존재하면서 동시에 전체의 한 단위가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며,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나 하나님의 자녀로서는 모두 하나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여러 지체들로서는 모두 하나이며, 모든 개개인의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구원을 받는데, 사도 바울이 받은 구원도 다른 어떤 그리스도인이 받은 구원과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모든 회심은 근본적으로 동일하며, 특별하고 독특한 환경이나 특수한 구원은 결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어떠한 차이도 없이 똑같이 동일하며, 하나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지금부터 이야기 하려는 것은 우리의 통일은 모든 사소한 점에서까지 우리가 동일하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혀 같을 수가 없는 우리 모두는 각각 개인적인 사람입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하나이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서로 다릅니다. 우리가 서로 다른 개인적인 특성이 통일을 깨트릴 수 없고, 또한 통일도 개인들의 특성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구속의 은혜의 특별한 영광이며, 구속의 기적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상에 나타내고 시사하는 특별한 현상이며 그 무엇도 흉내 낼 수 없는 그 무엇입니다. 우리가 하나 됨에 있어서 언제나 이 두 가지 원리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으니”(7절)라고 함으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전체의 교회와 각각의 지체들이 향유하는 여러 가지 다양한 은사의 제공자가 되신다는 것을 말하며, 또 이것은 다양성 속에서 통일을 보증하는 원리입니다. 그리고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라는 말씀은 오랫동안 인류를 대적하여 왔고, 인류를 속박하여 왔던 큰 원수들, 곧 마귀와 지옥과 죄악의 죽음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시고 그들을 포로로 잡아오는 광경으로 묘사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포로들을 통치하던 왕들이 이제는 자신들이 포로가 되어서 끌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원수들을 정복하려고 세상에 오셔서 원수들을 패배시키고 전쟁을 마치신 후, 이 모든 포로들을 이끌고 하늘로 돌아오셔서 그의 환호하는 백성들인 우리들에게 선물들을 부어 주시는 광경을 묘사한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그의 선물들을 나누어 주시는데, 이 모든 선물들은 언제나 그리고 영원토록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2. 구속의 드라마

에베소 4:9~10의 말씀은 시편 68:18의 말씀을 인용 한 것으로 그것은 거룩하신 우리 구주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 시편은 다윗에게 놀라운 승리를 안겨주신 여호와를 찬양하는 위대한 찬송입니다. 거기에서 다윗은 여호와께서 옛날 이스라엘 백성을 바로와 그의 군대로부터 건져 내셔서 홍해를 건너게 하셨던 그런 놀라운 승리를 안겨 주셨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여호와께서 “올라 가셨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씀하시고 영원토록 존재하시는 분이시며, 시작도 끝도 없으신 여호와께서 어떻게 올라 갈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한 길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올라갔다는 말은 그 전에 내려왔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나사렛 예수에 관한 말씀으로밖에는 풀이될 수 없는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려오셨던 것은 바로 나사렛 예수 안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해석상 가장 어려운 부분이라고 생각되는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다.”는 구절을 대할 때에 여러 가지 의문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땅 아래 어느 곳을 지적하는 말이 아니며, 지옥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말씀은 우리 주님께서 지상으로 오신 방법을 사실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3:13에서 이와 유사한 표현을 쓰고 있는데,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라는 이 말씀과 여기에서 올라간 자와 내려온 자에 대한 이 말씀은 지옥에 내려갔다는 말씀이 아니고 땅에서 살기 위해 내려오셨다는 뜻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땅 위에서 계셨으며, 바로 이 땅 위에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던 것이며 그의 가르침에는 독특한 권위가 있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8:23에 보면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하늘에서 났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땅 아래 구덩이 속에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은 땅 위에 있었습니다. 단지 주님은 “위에서” 났고, 그들은 “아래서” 났다는 것을 비교하여 말씀하신 것뿐입니다. 우리가 “아래”나 “아랫 곳”이라는 표현을 문자 그대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 말은 분명히 위에 있는 하늘과 아래 있는 땅을 비교하고 있는 표현입니다.


사도는 이 여호와에서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라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에 “모든 하늘 위에”라고 하는 사실적인 표현은 가장 높은 하늘이라는 뜻이며 지극히 높은 장소라는 의미입니다. 사도는 “지극히 높은 장소”라고 말하지 않고 “모든 하늘 위”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강조하기 위한 표현일 뿐으로서, 하늘이 높은 곳인 것과 같이 땅은 낮은 곳이라는 비교 개념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하늘 위”라는 곳은 없는데, 그것은 하늘은 하늘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가 어째서 우리 주님께서 교회에게 이 모든 선물들을 주는 자의 위에 계시며, 그가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모든 교회의 주가 되시며, 주께서 이 땅 위에 계실 때 행하신 그 사역을 행하실 수 있는 분인가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올라가셨고 선물들을 나누어 주는 위치에 계시는데, 그 이유는 그가 먼저 땅 위에서 거주하시기 위하여 내려오셨고, 이 땅 위에서 어떤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구원의 전체적 내용에 대한 서술로서 위대한 구원의 드라마에 대하여 좀더 강력한 표현을 사용해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가 시편 68편의 말씀을 인용한 참된 뜻은 주께서 어떻게 그 놀라운 승리를 쟁취하셔서 구원의 사역을 완성하셨으며, 지금은 교회 안에 있는 그의 백성들에게 어떻게 선물을 나누어 주고 계시는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수이면서 인간들에게 친구처럼 행세해 온 마귀는 사실상 인간의 가장 큰 원수입니다. 마귀는 사람을 정복해 버렸고, 그때 이후로 사람을 죄의 굴레 속에서 속박의 상태로 붙잡아 놓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죽음의 공포 아래로 떨어져, 그것을 피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은 노예의 상태에 있기 때문에 정죄를 받아야 할 위치에 있으며, 그곳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사단은 이러한 조건들을 이용하여 우리를 속박하는 우리를 정복한 원수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원수들을 정복하고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교회를 구속하시고, 그의 백성들을 이 속박에서, 이 사로잡힘에서, 이 포악에서 구속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는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내려오셔서 그 사명을 완수하셨습니다. 이제 우리 주님은 모든 원수들을 그의 발아래 꿇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서 영광 가운데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에 대한 말씀을 대면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 하늘에 계시지만 전에는 땅에 계셨으며, 그 땅에서 살았습니다. 주님은 하늘 보좌를 내버려 두고 오신 것은 자신을 철저하게 낮추신 기적적인 사건입니다. 주께서 먼저 세상에 내려오셔서 원수들을 정복하시기 전에는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을 수가 없기 때문에 주님이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그는 그의 아버지의 일을 잘 알고 있었지만, 육신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에게도 순종하셨으며, 그 순종은 전쟁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그는 죄가 없었고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었지만 세례도 받으셨습니다. 그는 마귀에게 시험도 받으셨으며, 40주야를 광야에서 혼자 원수의 우두머리와 치열한 싸움도 벌이셨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사두개인들 그리고 율법사들의 적대 행위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모든 것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투쟁이었고 구속의 드라마를 이루고 있는 모든 내용입니다. 그는 한 번도 실패하시지 않았으며 아버지의 뜻에 철저하게 복종하셨습니다. 그는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셨던 일입니다. 그는 완전한 승리를 이루기 위하여 십자가에까지 가셨던 것입니다.

갈보리에서는 사단의 최후의 수단이 총동원 되었습니다. 마귀는 그를 죽임으로서 제거해 버린다고 생각했으나 그를 패배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이 파멸하는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마귀와 그의 모든 군대를 결정적으로 패배시키신 것은 바로 그가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신 그 사건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동시에 주님은 율법도 처리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을 하시느라고 주께서 죽으시고 무덤에 매장되셨으며, 마침내 부활로서 승리하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 마지막 원수를 정복하셨습니다. 주께서 우리의 인간적 본질을 그와 함께 영광 가운데 이끄십니다. 보좌에 앉으신 그 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신 분입니다. 그는 그의 인간적 본성, 그리고 우리의 인간적 본성을 그와 함께 영광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지금 그곳에 주님과 함께 있으며, 그와 함께 하늘 보좌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몸이며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 되는 교회”안에 있는 백성들에게 은혜와 선물들을 나누어 주고 계십니다.

 

 

3. 여러 가지 은사

사도는 7절에서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다.”라고 기록하고 나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슨 선물을 나누어 주셨는가를 설명하기 전에, 먼저 그가 어떻게 해서 이렇게 선물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위치에 있는가를 설명하였습니다. 사도는 이 두 구절에서 우리가 교회의 생활과 활동 속에서 우리가 그 원리를 알 수 있도록 자세하게 풀이해서 설명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주제는 두 가지의 원리로 나누어서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①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므로 그 외에 어떤 것도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머리이시며, 우리는 그 몸의 지체들입니다.

② 교회는 머리 아래에서 각각 다른 기능을 가진 지체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7절에서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다”라고 한 내용입니다. 사도가 “주어진 은혜”라고 말하는 것은 구원의 은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앞에서 다루었습니다. 사도가 지금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의 기능에 관한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 모두는 이미 구원의 은혜를 받아서 교회에 소속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혹은 사도로”라고 표현한 것은 개개의 모든 회원에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그들이 어떤 특별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하고자 하는 그 주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어떤 특별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시는데 몸의 모든 지체는 각각 수행해야 할 어떤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서 그 비유가 아주 적절하게 설명됩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여러 지체들인 우리 모두에게 교회 안에서 은혜를 주심으로 우리는 각각의 특별한 기능을 발휘하여 온 지체가 각각 충족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우리의 기능이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깨닫게 될 때, 교회의 지체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가를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형성해 가고 있는 이 몸 안에서 우리가 차지하고 있는 한 부분 한 부분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지위입니다.

우리들 각자는 교회 안에서 점유하고 일하도록 부름 받은 어떤 특별한 위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서 그리고 교회에 속한 자로서, 이 가공할 현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메시지의 관리자요 수호자라는 것을 믿는 우리가 해야 할 의무는 그 기능을 발견해 내는 일입니다.


③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 각 사람에게 이 특별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7,11절에서 강조하듯이 은혜는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가 친히”라고 함으로서 이 모든 여러 가지 선물들을 주신 자는 바로 주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기억하게 합니다. 사람이 스스로 자기 자신을 부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행해지고 있는 것처럼, 교회 안에서 이것을 해야겠다, 혹은 저것을 해야겠다고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를 부르신 분은 바로 그리스도시며, 우리가 교회 안에서 어떤 재능을 발휘하고 있든지, 우리가 스스로 결정하면 안 되는 것은, 주께서 친히 전 영역을 총찰하고 계시며, 그가 친히 온 몸의 머리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주께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이 부분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단순히 어떤 곳에 어떤 필요를 보았다고 해서 그것은 내가 완수해야 할 책임이라고 즉석에서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그렇게 하기를 원한다고 해도 주님의 뜻이 아닐 수 있으며 주님께서는 나에게 다른 책임을 맡겨 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책임을 떠맡으려고 어리석게 달려들던 그 일을 어떤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도 있습니다.


④ 주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은혜는 다양합니다. 주님께서는 교회 안에 특별한 직책들을 두셨는데, 이것은 인간이 고안해 낸 것이 아니며, 모두 주님께서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도들을 통하여 내려주신 것입니다. 주께서는 여러 직책과 기능들을 지시하셨을 뿐 아니라 그것들의 성격과 다양성까지도 확정하셨습니다.(고린도전서 12장) 어떤 직책들은 다른 직책들에 비하여 더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직책들도 각각 필요한 곳에 있어야 합니다. 육체적인 몸에서처럼 어떤 부분들은 다른 부분들만큼 아름답지 못한 부분이 있을 수 있으나, 이 아름답지 못한 부분들이 필요하며, 우리는 그것들을 더욱 귀중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기능들이 각기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차별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들은 모두 전체로서 조화를 이루며 작용하는데 필수적인 것들입니다. 더욱이 우리 주님께서는 사람들을 이 직책들 위에 임명하셨습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주셨습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과 그 밖의 다른 직책에 종사할 자들을 선택하신 분은 주님 자신입니다. 주께서 이 여러 가지 다른 직책들을 세우시고 그 직책을 위하여 사람들을 부르시고 여러 가지 기능들을 행사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셔서 그들이 그 특별한 직책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여기에 분명한 불평들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여러 가지 직책들은 분명히 등급이 정해져 있어 구분이 됩니다. 그러나 그 직책들은 모두 필수적이며, 주님께서 친히 임명하셨다는 이 두 가지 사실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세상의 계급제도와는 다른 것은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는 말씀에 따라 그들과 같은 지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낮은 자가 높은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을 존경해야 하지만, 그들을 주인이나 임금처럼 군주적인 권위를 가진 자처럼 대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높은 위치에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거나 뽐낼 것이 없고 낮은 위치에 있다고 해서 시기하거나 질투할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주께서 주신 것으로 자랑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4. 사도, 선지자, 전도자, 목사와 교사

사도가 말하고 있는 교회 안에 존재하는 이 직책들에는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직책에 속하는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 전하는 자가 있고, 영구히 존속하는 집단에 속하는 직책으로 목사와 교사가 있습니다.

이렇게 분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우리는 지금 이 상이한 직책들에 대하여 검토해 보아야합니다.

  1) 사도

사람에게 부름을 받거나 임명 받은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명 하신 일입니다.(갈 1:1, 고전 9:1)

교회나 교회의 대표자에게서가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직접 부름을 받고 사도직에 임명받은 자라야 합니다.

진리에 대한 초자연적 계시를 받은 자였습니다.

사도는 권위뿐만 아니라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 받은 자로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대사들이며, 그들에게는 특별한 권위가 부여 되었습니다.

또한 기적을 행할 수 있는 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의 계승자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증거로 가룟 유다를 계승할 자로 맛디아를 임명하였지만, 그러나 그 후 사도 바울이 어떻게 사도의 직을 얻게 되었는가를 살펴보면, 그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또한 요한의 형제 야고보가 헤롯 왕에게 죽임을 당하는 기사가 나오는데, 그의 계승자를 임명하지 않았다는 것에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2) 선지자

선지자 직에 대해서 분명한 가르침이 없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이야기 할 수는 없지만 성령께서 진리를 알려준 사람이었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실로 그는 진리의 계시를 받은 사람이었고, 또한 이 진리를 얼마간 무아의 경지에서 말할 수 있는 능력을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복음전하는 자

복음 전하는 자라는 그 당시의 용어는 현대적인 의미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 되었습니다. 신약성경에는 복음 전하는 자에 대한 기록이 그리 많지 않지만 사도행전 8장과 21장에 나오는 빌립이 복음 전하는 자였으며, 디모데와 디도도 복음 전하는 자였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복음 전하는 자의 일을 하라고 일깨워 줍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복음 전하는 자는 분명히 사도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매우 특별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복음 전하는 자는 복음의 여러 가지 사실들을 깨닫고 설명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과 힘을 받았던 자들로서 일반적으로 사도들이 직접 임명한 자이고 일종의 사도들의 대역을 했으며, 어떤 임무를 주어서 파송한 자였습니다. 어떤 때는 빌립이 사마리아로 보냄을 받은 것처럼, 사도들 앞에 보냄을 받기도 했지만 보통은 사도들을 따라 다녔습니다.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 전하는 자는 순회하며, 두루 여행하면서 교회들을 설립하였고 교회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그 설립된 기초 위에 교회를 세우고, 진리를 보다 더 충분하게 설명하고 해석하게 하려고 사도가 전도자를 남겨 놓았던 경우를 자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설립되고 자리를 잡게 되면 이 직책도 사라지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18세기 복음적 각성의 시대에는 이들을 “권위 하는 자”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4) 목사와 교사

우리는 지금까지 특별하면서도 일시적인 세 가지 직책에 대하여 고찰하였습니다.

이제 영구적인 직책으로 분류할 수 있는 “목사와 교사”의 직책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이 두 가지 직책은 같은 사람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직책들은 교회가 보다 더 안정된 상태가 되었을 때 시작하여 그 후 지금까지 계속되어지고 있습니다. 목사직은 일반적으로 다스리며 가르치고 지도하는 직책입니다. 그것은 양치는 목자에서 연유된 직책입니다. 목자는 그의 양떼를 치며 보살펴 주고, 어디로 갈 것인가 어디에서 꼴을 먹을 것인가를 지시하며, 다시 양 우리로 인도해 오며, 그들의 안전을 보살피며 이리들의 공격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해 주는 일을 합니다. 그것은 참으로 큰 직책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는 불행하게도 그 품격이 저하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목사는 영혼들을 책임 맡은 자입니다. 그는 단순히 사람들을 방문하여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 주는 친절하고 상냥한 사람만이 아니라, 그는 양떼의 보호자, 관리자, 조직하는 자, 지도자, 다스리는 일을 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교사는 실제로 교리를 가르치는 자입니다. 일반적으로 이 두 직책은 병행되는 것이며 또한 기나긴 교회사를 통해서 볼 때 실제로 그렇게 되어 왔지만, 때로는 어떤 사람에게는 가르치는 은사보다는 목양의 은사가 더 많이 있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목양의 은사보다는 가르치는 은사가 더 많은 경우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은 성령의 은사를 따라 개인마다 다양합니다. 교회 안에는 교인들의 영혼을 돌보며 동시에 가르치는 일을 하는 직책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머리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가 있으며 그가 기초를 세우기 위하여 사도와 선지자를 세우셨습니다.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것입니다.(엡2:20) 그들은 이 일을 수행하기 위하여 주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부르신 자들입니다. 주님은 배움이 없는 어부들을 사도로 부르셨으며, 자신을 핍박하던 자를 부르셔서 교회의 기초를 세웠습니다.

교회의 머리 되신 우리 주님의 지혜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교회는 그것을 망각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