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존 오웬

목사의 의무[2] / 존 오웬

새벽지기1 2016. 5. 15. 07:44


목사의 의무[2]

나는 본문 말씀가운데 영광과 아름다움을 언급한 목사들을 이야기 할 것이며, 그들을 일반적으로 교회 안에서의 가르치는 모든 것으로 이야기 할 것입니다. 이것은 단어의 일반적인 의미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들에 관하여 말하려하는 모든 것들은 나 자신은 물론이고 나의 형제들과 당신에게 목사의 의무가 무엇인지에 관해 상기시켜 줄 것입니다. 그에게 부여된 의무가 무엇인지, 그에게 기대되어 지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지금 나는 목사나 교사에게 필수적인 모든 의무들을 살펴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단지 몇 가지의 전형을 제시할 것입니다.     

첫 번째로 목사, 교사, 장로들과 같은 교회 지도자들의 의무는 본문에 언급된 대로“지식과 명철로 교회를 양육하는 것”입니다. [이 설교 가운데 일부 사항들이 Owen의 '복음 교회의 진정한 본질'이란 글의 5장에서 발견되어 진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알려주는 것이 적절하다] 이러한 양육은 복음의 설교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자신의 양 무리들을 먹이지 못하는 자는 목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그의 직분(임무)에 해당합니다. 세계적으로 형성되어진 목사의 죽은 형상의 이미지나 모습처럼, 가끔씩 상황이 허락할 때마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도행전의 말씀처럼,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는 것”(행 6:4)입니다.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하는 것”(딤전 5:17) 입니다.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치는 것”(골 1:28) 입니다.


여기서는 설교와 설교의 목적이 무엇인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해 어떻게 합니까? 29절에,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본래의 단어가 강조하는 한 단어가 우리의 번역에는 빠져있습니다. --Ei" o kai kopiw. Kopiw은 성실함과 집중력과 피곤함과 근면함으로 수고하는 것입니다. 수고하는 것(usque ad fatigationem)은 내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애쓰는 것(agwnizomeno)은 경주를 달리는 사람으로서, 승리를 위해 싸우는 사람으로서 그들의 영혼들을 위한 변증에 힘쓰는 것입니다. 어떻게 합니까? " 내 속에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여기에 사도 바울의 영적 체계가 있습니다. 그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경외심마저 느끼게 됩니다. "나는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과 위대하고 넘치는 능력으로 함께 하시는 역사를 따라서 근면함으로 수고하며, 경주에서 애쓰고, 승리를 위해 싸운다."

말씀을 전파하는 이런 의무을 위해, 성도들을 지혜와 명철로 교육하고 양육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1. 먼저, 복음의 비밀-하나님의 뜻 (행 20:27),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골 2:1-4)), 사람들의 영혼에 이르기까지(엡 3:7-9)-을 아는 영적인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많은 교회들이 부흥하고 성장하였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것들과 복음의 비밀에 대해 대단한 통찰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엡 1:17-18) 사도 바울은 그들이 모든 것을 지니도록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목회자들이 이 모든 의무들을 가르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만약 목회자 자신이 먼저 어느 정도의 탁월함을 지니지 못한다면, 성도들을 성숙함과 온전함으로 이끌어 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같은 복음의 비밀들에 대한 철저한 지식을 얻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가진 교회의 위대한 직분은 아무 쓸모가 없게될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목사에게 요구되는 복음의 진리에 대한 영적인 지혜와 명철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2. 권위가 필요합니다. 설교하는 목사에게 무슨 권위냐구요? 그것은 직분이나 위치에서 오는 것이 아니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의 결과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교회에서 가르치라는 외적인 소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겐 기름부음이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외적인 부름심이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그에겐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은사와 은혜가운데서 성령의 충만한 감동을 지닌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그의 권위에 관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예수님께 말합니다.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누가 이런 일 할 이 권세를 주었느뇨" (막 11:28) 성령님께서 그 문제를 결정하십니다. "그 가르치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 함일러라"(마 7:29) 그들은 직분으로 인한 권위는 가졌으나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통한 권위는 갖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이것만을 지니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논쟁을 벌이고는 있지만, 성령을 보여 주려고 하는 설교는 기름부음을 받고, 주어진 은사와 은혜의 성령님과의 교통 가운데 증거되는 것만 못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권위를 가장하고 권위있는 체하는 것은 헛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은사와 은혜가운데 기름부음을 받은 것이 커다란 증거가 되듯, 설교를 할 때 그들은 대단한 권위를 갖게 됩니다. 물론 그 이상은 아닙니다. 따라서 모든 이들을 그의 권위의 영역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3. 이곳에서 요구되는 또 다른 것은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설교할 내용들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나는 정말로 설교할 내용들이 먼저 설교자 자신에게 선포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좋은 설교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을 위해 준비한 내용들을 통해 먼저 양육되어 지고, 그것들을 충분히 소화하고, 그리하여 신앙의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는 자는, 그가 알고있는 것으로 인해 독(毒)을 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심령가운데 설교의 능력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다른 이들의 가슴속에서 그것을 발견할 수 있는 아무런 근거를 가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심령이 아닌 머리로 설교를 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설교를 위해 우리의 머리를 동원하는 것은 우리의 것이든 다른 사람의 것이든 진리의 몇몇 개념으로 우리의 사고와 기억들을 채우는 것에 불과하며,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단순한 만족을 주기 위한 이야기와 다름 아닙니다. 이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설교를 위해 우리의 심령을 일으키는 것은, 우리들의 생각과 마음을 형성하기 전에 또한 그것들을 전하기 전에 우리를 이롭게 하는 진리의 능력 가운데 변화되는 것이며 그 능력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의 영혼을 향한 열정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망으로 동기부여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단 한번도 이와 같은 마음을 품지 않고 일주일 내내 설교를 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전 세계적으로 능력있는 설교를 잃게 만들고 있습니다. 대신에 재미있는 화술만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 같은 자들은 자기 자신의 마음가운데 영적 체험을 결코 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의 설교와 또 어떤 사람들의 설교가 아닌 것들이 모두 '설교'로 선포되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목사로 부르심을 받는 것의 능력을 잃어 가고 있습니다. 비록 2-3만 명에 이르는 목사가 있을지라도, 백성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부족으로 멸망해가며 죄악의 관습으로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겐 오늘날까지도 아무것도 선포되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4. 말씀을 올바르게 구분하는 기술이 필요합니다. 이 기술은 하나님의 말씀을 고찰하는데 아주 실제(실용)적인 방법으로 우리가 설교하는 사람들에게 적합한 양식이 무엇인지, 사람들의 영혼을 위한 실속있고 영양이 풍부한 양식이 무엇인지를 가려내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필요합니다.

먼저 회중들의 영적 상태에 대한 정확한 지식과 헤아림이 있어야 합니다. 설교자의 눈 속에, 생각 속에, 설교 가운데 끊임없이 회중들의 상태를 확인하지 못한다면 허공을 향해 손을 내두르는 사람처럼 불확실한 싸움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겪고 있는 시험과 그들의 빛과 그늘, 성장하고 있는 것과 썩어가고 있는 것, 번성하는 것과 시들어 가는 것,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들이 도달한 영적 수준 등에 관하여 헤아리지 못한다면 그들에게 결코 올바른 설교를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때문에 우리는 영혼을 향한 열정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망들로 가득차 행동해야만 합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간단하게 말해보겠습니다. "이런 일들을 하기에 족한 이가 누구인가" 복음의 비밀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영적인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회중들을 가르칠 수 있도록 하게 하며 온전함과 성숙함으로 이끌어줍니다. 성령 충만으로부터 온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성령님의 은혜와 은사로 기름부음 받은 증거가 됩니다. 그것만이 말씀을 선포할 때 권위를 가져다 줍니다. 우리가 설교하는 모든 말씀 가운데 우리의 모든 심령이 그것과 같아지는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성도들도 말씀의 능력가운데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말씀을 잘 구분하는 기술에 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해야만 하는 커다란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당신의 목회자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요. 이것이 복음사역자에게 요구되는 첫번째 의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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