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존 오웬

존 오웬의 성령론(8)

새벽지기1 2016. 5. 11. 13:11


(1) 기 도

  오웬은 『성령론』부록 제1편에서 기도할 때 성령의 역사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기도의 의무는 성령의 사역과 분리될 수 없다. 성령은 우리들 안에 있는 모든 은혜의 조성자이시고, 근원이시며 유일의 원인이시다. 하나님은 ‘간구의 영’(a Spiritual of Supplication)이신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신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우리들 안에 기도의 의무(duty)를 감당할 수 있는 은혜스러운 성향을 주셔서 영적으로 그리고 기쁨으로 기도하게 하시며, 기도의 능력도 주신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직접적인 교통(communication)을 하게 하시고, 특별히 기도의 방법(way)을 통해, 기도의 훈련(exercise)을 통해 모든 성령의 은혜를 주신다. 우리는 이 약속의 성취를 이미 받았다.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Abba Father)’라고 부를 수 있게 하셨느니라”(갈4:6; 참조, 요1:12; 딤후1:7; 롬8:15).1)


사도 바울은 “이와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르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 성령도 우리를 연약함을 아시고, 기도하신다. 성령께서 우리 연약함을 위해 기도하신다고 하는 것은 우리도 기도 할 수 있고, 또한 기도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말씀이다. 이렇게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기도가 무엇인지 알게 하시고 기도할 마음을 주신다. 기도가 필요 없다고 하는 사람이 없도록 기도하고 싶은 마음을 주셔서 기도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기도는 우리의 타락한 본성의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이다. 우리의 부패한 본성, 우리의 어두워진 총명, 심술궂은 우리의 의지, 영적인 것들을 싫어하는 싫증을 고칠 수 있는 것은 기도이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은 죄를 용서해 주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시고, 죄를 모두 옮겨 주시고, 날마다 우리 영혼을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새롭게 하여 주신다.


인간의 본성은 소경이기 때문에(nature is blind) 이러한 눈을 가지고서는 죄를 죄로 보지 못한다. 이러한 사람은 자만에 사로잡혀 있고, 어리석고, 죄에 대해 무감각하고, 죄를 죄인지 모르는 채 인사불성(insensible)으로 살아간다. 기도할 때 우리는 마음속에 내재하는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은혜와 성화와 영적인 특권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다.2) 

  기도할 때 우리는 일시적인 것에 대해, 현세에 대해 가지던 관심이 바꾸어진다.3) 성령께서 신자들의 마음속에 기도를 통하여 “비애와 경건한 슬픔”을 가지게 하시어 간절히 간구하게 하신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뜨거움과 기쁨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 마음이 커져서 때로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고 이웃에게는 좋은 영향을 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도우실 뿐 아니라 친히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롬8:23,27). 그러므로 성도는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여 항상 기도의 의무를 감당해야 한다.4) 마음속에서 부터 뜨거운 마음,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끓어오르고 커질 때 그 기도는 생명력이 있는 것이다. 전 심령이 기도의 문제로 인하여 기도의 틀(frame)이 짜여져 있어야 하고, 그 속에 들어가 기도에 전념해야 하며, 언제나 기도로 육을 쳐 복종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의 의무를 계속해서 잘 감당하겠다고 하는 뜨거운 마음의 결심을 해야 한다. 우리의 의무는 기도하는 것이다. 5)


오웬은 성도들이 기도할 것을 간절히 촉구 한다 :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그런데도 어리석게 기도에 게으른 사람은 누구인가? 회개하기를 더디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이렇게 하는 사람은 성령을 얼마나 슬프시게 하는 것인가! 그리고 우리의 심령은 얼마나 손상을 당하는 것인가! 우리가 날마다 기도해야 할 의무에 게으를 수 있단 말인가? 성령의 은혜로운 호의를 어떻게 무시할 수 있단 말인가? 기도하지 않고 습관적으로 육적으로만 살아갈 수 있을까? 아,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사람들은 기도할 수 있는 성령의 은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기도할 줄 모른다. 심령으로 속사람이 기쁨으로 은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기도할 줄 모른다. 이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 오늘날은 특별히 유혹이 많고 위험이 도처에 많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기도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세상적인 말은 적게 하고 기도를 더 많이 한다면 모든 일이 더욱 잘 되어질 것이다.6)


기도야말로 하나님이 성도의 성화를 위해 주신 방편이다. 마치 장인(匠人)이 그의 직업의 기술을 연마해야 하듯이, 우리는 믿는 자들을 단련시킬 목적으로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방도들을 사용해야 한다. 이 방도 중 첫째가는 것은 열심 있는 기도이다. 모세처럼 하나님 영광을 보여 달라고 기도하라(출33장 참조). 바울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엡1:17)라고 기도해야한다.7)

성화의 방법은 학습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마음 가운데 기도를 통해서 된다고 할 수 있다. 성화는 은혜의 성령과 간구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다. 기도할 수 있는 신자는 기도를 함으로, 그리고 성화의 성령이 성도들 가운데 역사함으로 성도가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성령은 우리를 계속 지원해 주시며 온전하게 되시기를 원하신다. 만일 우리가 지혜롭게 기도를 통하여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우리들 마음속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은혜에 의한 사역에 대해서 대단히 많이 이해하는 것이다.8) 


(2) 묵 상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깊이 묵상해야 한다. 하나님은 항상 은혜의 보좌에 계신 분이시다. 우리는 중재자이시고 중보자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해야 한다.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유익을 주시는 은혜의 보좌에서 주 그리스도의 효과적인 도움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은혜를 받기 위해서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준비되어 있어야 하며 훈련되어야 한다.9) 오웬은 성도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함으로써 얻는 유익을 그의 최후의 저술인 『주님 영광에 대한 묵상이 신자에게 주는 유익/위로』(1684)에서 밝혀주고 있다. 그는 “만약 우리의 장래 행복이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곳에 있으면서 그분의 영광을 보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것에 대한 준비로서 그 영광에 대한 생각으로 우리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을 것이다”라고 서문에서 제안한다.10) 따라서 성경 각권을 보면서 그리스도의 영광에 관해 기쁨을 가지고 묵상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천상에서 그 영광을 보고자 하는 참된 소망을 갖지 못할 것이다.11)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끊임없이 묵상함으로 비롯되는 유익들로는

1)우리가 하늘나라에 적합한 자로 지어질 것이다.

    우리의 현재 영광에 대한 지식은 장래의 영광을 알기 위한 준비이다.

2)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한 참된 견해는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되기까지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후3:18)

3)그리스도의 영광에 관한 규칙적인 묵상은 우리 영혼에 안식과 만족을 줄 것이다.

    왜냐하면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기’ 때문이다(롬8:6).

4)그리스도의 영광을 아는 지식은 우리의 영원한 축복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12)

    우리는 있는 그대로 그분을 봄으로써, 그분처럼 될 것이다(살전4:17, 요17:24, 요일3:2 참조)

‘평강과 위로와 기쁨과 확신을 가지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즐기는 그런 축복을 어떻게 받을 수 있으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봄’으로써 이다.(벧전1:9,10 참조)13) 심지어 한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심도 있는 영적 생활의 체험을 갖느냐’하는 것도  그의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해 얼마나 생각하고 얼마나 기뻐하느냐에 비례하는 것이다(갈2:20 참조).14) 오웬은 묵상의 유익과 성화생활의 비결로서의 묵상을 소개하면서 묵상의 의무를 수행할 것을 권면한다 : 우리는 성경에서 얻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아는 지식에 관해 자주 묵상해야 한다.


(3)죄 죽임(mortification)과 은혜 살림(vivification)


오웬의 죄 죽임의 교리는 종교개혁자 칼빈의 죄 죽임과 은혜살림의 교리를 이어받아 더욱 견고히 했다. 칼빈에 따르면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 with Christ)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 이 은혜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轉嫁)받는 것 곧 법정적 칭의(稱義)와 둘째, 우리의 전인(全人)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거룩케 하시는 사역을 통하여 경험적으로 그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법정적인 의(義)의 전가에 대한 신자의 마땅한 반응은 회개(repentance)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이 회개는 실질적으로 성화와 동의어이다. 칼빈의 회개(悔改)에 대해 정의하기를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을 향하여 진실로 돌이키는 것, 그분께 대한 순전하고 열망 있는 두려움으로부터 비롯된 돌이키는 것이며, 그리고 이것은 우리 육신과 옛사람이 죽는 것과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이 사시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고 말한다. 이처럼 회개와 성화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죄 죽임(mortification) 과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바 '은혜를 살리는 것'(vivification)인데 이 둘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달려 있다.


죄 죽임(mortification)은 그 자체가 완전한 것이 아니고 그 짝이라고 할 수 있는 은혜살림(vivification)이 동반되어야 한다. 이 은혜살림은 거룩하고 헌신된 삶의 방식으로 살려고 하는 열망, 즉 거듭남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은혜 살림은 하나님께 대한 거룩과 경건을 향한 갱신된 열망이며 태도이다. 15)

죄를 죽이는 것은 곧 은혜를 살리는 것이다. 죄를 죽이는 일은 마음 안에 있는 죄를 제거함으로써, 우리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활기차게 자라게 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마음 안에 있는 죄는 항상 신자의 내면에 거하므로 우리는 항상 그것을 죽여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얻은 것도 아니요, 온전하여 진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죄 죽임의 필요성에 대해 오웬은 매우 강하게 말하고 있다. 성령께서 우리를 살피시고 온전하게 만들어 주시고 우리의 성장을 방해할 요소를 제거시켜 주셨다고 하더라고, 만일 우리가 어떠한 죄든지 허락하고 거기에 빠져버린다고 하면 우리가 아무리 잘 성장했고,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안다고 하더라고 우리는 결국에는 전면적으로 부패하게 될 것이다.16)

그러므로 성화의 본질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죄를 보는 견해에 개선이 있어야 한다.17) 그러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성도는 타고난 죄의 본질과 결과에 대해 알도록 힘써야 한다. 비록 우리가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이 일을 제대로 이행할 수 없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에게는 다음과 같은 의무들이 요구된다 :

1)우리들 스스로의 모습을 비추어주는 거울인 성경을 자세히 살피라.

성경을 통해서도 스스로의 일그러진 모습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타락한 채로 살다가 저주받은 채로 죽을 수밖에 없다.

2)자신의 타락된 상황과 관련된 성경의 증거를 이미 받은 사람은 그 증거를 통해 자신을 살핌으로써 자신의 더러운 모습을 한층 더 확실하게 깨닫게 된다. 실로 그들은 거울 속에 비친 불결한 사람을 향하여 “부정하다! 부정하다! 부정하다!”고 외쳐댈 것이다.

3)하나님의 빛과 인도함을 받기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의무이다.18)

이렇게 볼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즉, 우리는 성령으로부터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결케 하는 힘과, 우리를 죽은 행실로부터 깨끗하게 해 주는 그의 피 뿌림을 계속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는 매일 우리 스스로를 더럽힌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매일 그리스도의 정결케 하는 샘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곧 완전히 불결하게 되어 버린다.19)


여기에 죄를 죽임의 당위가 있다(롬8:13; 골3:5 참조). 죄를 죽인다는 것은 부패한 본성의 모든 힘과 정력을 끊어버리고,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것으로 기울어지는 성향을 근절시킨다는 것이다. 죄의 행동을 유발시키는 세력을 죽이고, 행동을 못하게 하여 그 목적이 달성될 때까지 그것을 없애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계속해서 항상 행하여야만 한다.20) 그래서 죄에 대한 우리의 가장 큰 의무는 죄를 억제하고 죽이고 처형시키는 것이다. 아픔 없이는 죄를 죽이지 못한다. 오른 손을 자르고 오른 눈을 뽑는 아픔이 있어야 한다. 감정적 격렬함이 없이는 죄를 죽이지 못한다.21) 

우리가 죄를 죽이는 일을 하지 않으면 죄가 마음을 어둡게 하고 육신의 정욕이 잡초처럼 자라게 된다.22) 신자는 날마다 자기 안에 있는 죄의 세력을 죽이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삼아야 한다. 죄를 죽이지 않으면 죄가 신자를 죽인다.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과 능력으로만 죄를 죽일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를 죽이는 일의 주체는 참 신자이다. 성령께서 우리의 자유의지를 보존하시므로 죄를 죽이는 일은 성령에 대한 우리 신자의 순종의 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23) 그러므로 죄를 죽이는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원수를 대적하기 위해 주시는 도움을 거부하는 것이다.24) 죄를 죽이기를 원하는 자가 기도하고 탄식하고 근심하며 구원을 갈망하지만 경건한 독서, 기도 생활, 하나님과의 묵상을 게을리 하면서 자기 생활 속에서 죄가 세력을 보유하고 있는 이유를 알고자 한다면 이는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것이 사람들의 일반적인 상태이다.25)


(4) 성화의 대적 : 게으름


성도의 의무들을 행하는데 가장 큰 대적은 ‘게으름’과 ‘나태함’이다. 오웬은 대단히 많은 곳에서 이 성화의 대적을 지적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영적인 일에 게으르거나, 의무를 이행하지 않거나, 은혜받기 위한 훈련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의심할 것 없이 우리는 우리 자신이 부패한 것이고 ‘다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26)

 

만일 어떤 사람에게 성화에 진전이 없다면 그 이유로는 세 단계의 ‘게으른 측면’이 있다.

첫째는 이미 완전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은 교만하며 미련한 속임수로 자신을 속인다. 그리고 모든 본성과 복음적인 거룩한 임무를 파괴한다.

둘째로는 그들은 우리는 이미 거룩하게 되었으니 성화에 대한 열망함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셋째로는 성화를 반대하는 심령 속에는 피곤과 낙담이 일어난다.

사람들에게서 너무나 많이 이러한 어려운 상황을 발견한다. 성화를 반대하는 곳에는 부패와 유혹이 있고 세상의 일들만 있다. 이 사람들은 결국에는 세상에 항복하고 만다.27) 사실 우리들 대부분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체험하는 것]에 관하여 심각하게 생각하느라 시간을 허비하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생각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높고 너무나 어려운 것이다.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즐거워하다가도 오래지 않아 싫증을 내고 곧 그런 생각으로부터 돌아서 버린다.28) 그래서 영적 삶에 게으르고 나태한 영혼은 결코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던 것과 같은(출애굽기 33장 참조)] 이런 영광의 체험을 얻지 못한다.29) 우리의 이러한 지독한 게으름으로 인해 하늘의 것들에 관해 묵상하는 것을 소홀히 하는 경우가 너무도 잦은 것이다.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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