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존 오웬

존 오웬의 성령론(7)

새벽지기1 2016. 5. 10. 08:54


Ⅵ. 하나님의 은혜와 신자의 의무와의 관계


성도는 하나님을 향해 사는 사람이고 의 앞에서 사는 사람이고 성화 앞에서 사는 사람이다. 성화는 은혜의 습관을 수반하는 능력(power)이 있고, 은혜의 습관을 행하려는 경향과 성질도 가지고 있다. 본질상 우리는 영적인 일을 수행할 ‘힘이 없으나’ 중생(regeneration)의 은혜와 성화(sanctification)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해 살아드릴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우리는 부여받는다.1)


‘성화는 하나님의 영(the Spirit of God)에 의하여 우리 속에 일어나는 일’이다. 성화에 대한 우리의 의무(duty)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명령을 하셨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는 약속을 주셨다. 명령이란 약속을 위한 어떤 여지가 없는 것이고, 약속이란 명령의 권위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거룩하게 되는 일이 우리의 의무라면 여기에 은혜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거룩하게 되는 일이 은혜의 결과라면 거기에는 의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논쟁은 ‘육체적 지혜’의 산물이다. ‘위로부터 온 지혜’는 우리에게 다른 것을 가르친다. 실로 성화에 있어서 은혜와 행함은 상반되는 것이다. 즉, 모순이란 말이다. “만일 성화가 행함으로 된 것이라면 은혜는 없는 것이고, 만일 성화가 은혜로 되었다면 행함이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의무와 하나님의 은혜는 성화의 문제에 있어서 상반되거나 모순되는 점이 없다. 성화를 위해서 우리의 의무와 하나님의 은혜는 상호 필요한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우리의 의무'를 행할 수 없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다 할지라도 우리가 우리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목적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서 의무를 이행하라고 명령하신 사실을 거부하는 자는 곧 하나님의 약속을 거부하는 자요, 결국 성경 전체를 거부하는 자이다.2)


어떤 이들은 성령의 약속된 사역을 이유로 해서 스스로 나태함과 소홀함에 빠지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성령의 약속에 무관심한 자들이다.3)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필수적인 의무는 일치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한 손을 가지고는 온전히 일을 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성령의 은혜로우신 역사에 우리의 의무(duty)가 종속되어야만 더 큰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단지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탁월한 은혜를 받은 사람이 드물고 우리들 자신도 그렇다. 하나님은 부지런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셨다. 순종이 그토록 중요한데 사람들은 태만하고 나태에 잠겨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들을 도와주려고 하시다가도 저들의 행동을 보고 오히려 미워하시게 된다.4)


만일 우리 안에 모든 은혜들, 즉 모든 은혜의 정도들과 결과들이 성령과 그의 뜻에 기인한다면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 자신의 노력과 성실한 것은 소용없다. 더 거룩해져야 함과 순종의 의무들을 수행하기 위해 수고할 필요가 없다. 그러면 우리 자신이 노력할 것을 명백히 의도한 성경의 모든 명령과 경고와 약속과 권고들은 어떤 목적으로 주어진 것인가? 오웬은 이렇게 스스로 예상하는 반론을 제기하고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 하나님의 영에 의해 주어지지 않은 영적인 선함이 우리들 안에 어느 정도라도 있다고 하는 것은 복음의 은혜를 무너뜨리는 행동이다.


성령께서는 사람이 일하는 곳에서 역사하시고 사람이 아무것도 하시지 않는 곳에서는 성령께서도 아무것도 하시지 않으신다. 은혜를 주시는 정도(degrees)는 모든 신자에게 각기 독특하게 나타난다. 여기서 신자들은 그들의 의무들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과 권능을 공급받는다. 은혜와 거룩함의 향상은 대부분 신자의 의무수행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의무를 나태하고 소홀하게 해도 된다는 것을 성령의 유효한 사역으로 입증하려는 것은 야만적인 무지(無知)이다.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한 방편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와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의무의 한 방편으로서 요구하시는 것이 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in) 역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령께서는 우리를 통하여(by)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의무는 하나님의 명령들을 열심히 순종하는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명령들을 순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또한 성령의 사역인 것이다.5) 


그러면 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의무수행을 위해 힘쓰는 모습을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이 변화되지 아니하는가? 그리고 그들의 거룩함이 향상되지 아니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오웬의 대답은 분명하다. 그는 예수님의 중보기도 가운데 “나의 영광을 보게 하시기를”(요17:24) 주석하면서   :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졌다고 말하는 자들 중에도 그분의 영광을 이해하고 그분의 형상(likeness)으로 변화하는 자는 소수뿐이다. 단지 그리스도의 행동을 본받음으로써는 아무도 그분과 같이 되지 못할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을 체험하는 것만이 믿는 자를 그리스도와 같이 만들 힘을 가지고 있다.6)

한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깊이 있는 영적 생활의 체험을 경험하는가?’는 그의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 그분을 얼마나 생각하고, 얼마나 기뻐하느냐에 비례한다(갈2:20). 우리가 참신자라 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영적으로 다시 세워진 우리의 머리와 가슴 속에서 역사하사 우리가 그 명령을 이행하도록 도우실 것이다.7) 그리고 그들은 변화산상에서 제자들처럼 압도되고 만다.


이처럼 성화의 과정이 우리 인간의 노력 여하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을 통한 은혜의 체험에 결정적으로 관련됨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성경의 단순한 지식으로는 삶이 변화되거나 거룩함의 향상이 따르지 않는다 :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해 성경에서 얻는 단편적인 지식과 같은 단순한 개념으로 만족한다면 그런 개념에는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8)


이제 성화에 있어서 은혜의 체험과 우리의 의무를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1.은혜의 체험

성도의 성화에 있어서 체험이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다. 오웬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령한 욕구를 갖고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가?’라고 질문한다.9)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너무나 실제적인 것이어서, 하나님 보시기에는 교회를 구속(救贖)하시려고 행하시고 고난 받으셨던 일이 마치 우리가 직접 행하고 고난 받았던 것처럼 여겨진다.10) 사도바울은 교회를 자신에게 주신 것과 양자(兩者) 사이에 연합이 이루어진 것을 큰 비밀로 묘사한다(엡5:23). 그러나 그것이 비밀이라고 해도 우리는 각 신자가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아2:16)라고 말 할 수 있는 이 관계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다.11)


오웬은 은혜 체험에 관하여 이렇게 설명한다 : 성령께서는 신자들에게 믿음의 진리와 실제, 그리고 탁월함을 경험하게 하여 그들을 거룩하게 하신다. 경험(experience)이란 것은 은혜로운 양식(food)이다. 그러므로 경험은 성도를 성장시키고 강화시킨다. 믿음으로 얻어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믿음의 맛(taste)이고, 이러한 믿음의 맛은 성도를 무게 있게 하고 키를 크게 한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약한 교회를 기르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교회가 그의 능력과 신실하심을 경험하도록 하신다. 믿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도 그가 믿는 것들의 실제적이고 능력 있는 특별한 경험들에 의해서 그의 믿음이 성장하고 강화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성령께서는 성도들에게 영적이며 지각할 수 있는 실제적이며 능력 있는 경험을 주신다.12)


이 체험은 분명하게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보내주시는 사역과 더불어 교회에 주신 성령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성령은 메마르고 열매를 맺지 못하고 타서 갈라진 땅과 같은 인간의 심령에 부어지심으로 사람의 심령이 샘이 되게 하시며 거룩하고 의로운 열매들을 맺게 하신다는 것이다(히6:7). 이와 같이 성령에 의해서 그리스도께서도 “벤 풀에 내리는 비같이 땅을 적시는 소낙비같이 임하신다”(시72:6). 선하신 주님은 우리들에게 이러한 물들과 새롭게 하시는 소낙비를 항상 주신다.13)

물론 초대교회의 기초를 놓는 데 필요했던 성령의 특별한 권능의 발휘가 그쳤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분의 전체적인 은혜의 역사는 오늘도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 가운데서 오순절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수행되고 있으며, 교회를 가르치는데 필요한 성령의 은사 역시 계속해서 부여되고 있는 것이다(엡4:10이하).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의 모든 신자들이 해야 할 중요한 일 중 하나인 것이다.14)

 

오웬은 ‘때때로 참된 신자들은 이생에서도 그리스도를 아는 데서 발견되는 기쁨을 조금은 경험한다.’고 말한다. 일단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면, 믿는 자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되기까지는 항상 들떠 있을 것이다. 이생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믿음으로 볼 수 있다.15) 성경과 성령이 그리스도 안에서 빛나는, 창조되지 아니한 하나님의 영광을 느끼게 하여 그것은 그들의 영혼을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평안으로 가득 채울 정도이다. 이런 경험은 흔치 않은데 그것은 우리의 나태와 신령한 빛의 결핍 때문이다. 우리가 만일 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하는 일에 열심을 내면 영광의 서광은 우리 영혼에 보다 자주 비춰올 것이다.16)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신령한 참 축복에 관심도 없이 지극히 분별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주 그리스도께서 보혜사 성령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가져다주게 하신 거룩한 영적 상쾌함을 알지 못한다. 그런 축복에는 영적 평화, 신선한 위로,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과 복된 확신이 포함된다. 이런 체험이 없다면 우리 기독교는 무정하고 생명이 없고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다. 지금 이 땅에서 이 영적 축복을 누린다는 약속을 믿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늘의 영원한 영광에 관한 약속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런 영적 신선함을 주는 수단들이 있음으로 해서 그분과 함께 즐기게 된다(계3:20 참조). ‘그런 축복을 어떻게 받을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봄으로써’ 이다.(벧전1:9,10 참조)17)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 안에서 복음의 능력과 은혜를 체험하려는 노력을 포기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알 수도 있었을 그리스도의 영광을 결코 발견하지 못한다.18)

성도의 영적 체험에는 늘 은혜로우신 성령께서 찾아오시는 체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때에는 성도들이 하나님이 떠나가시는 체험을 하게 된다. 오웬은 이 체험도 놓치지 않고 설명한다 : 우리의 마음이 영적 본분을 다함에 있어 점점 냉냉해지고 생기가 없게 되면, 주 그리스도께서 잠시 우리를 떠나신 것이 틀림없다.19)


구약성경에 나타난 성령의 사역을 살펴보면, 성령은 어떤 사람들로부터 떠나신다(삼상16;14). 성령의 떠나심은 전체적(total)이거나 부분적(partial)이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의 은사를 많이 받았고, 그 은사들이 계발되어졌으며 또한 확신 가운데 복음을 소유해왔고, 많은 직무들을 행해왔다. 그러나 그가 시험에 빠져들게 되고 자신의 정욕에 정복당하게 되고 자신이 시작했던 선한 일들을 포기하고 어리석음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그와 같은 사람들로부터 성령은 완전히 떠나신다. 성령은 그들을 포기하시며 그들 자신의 마음의 정욕대로 내버려두신다. 그래서 그들의 모든 은사들은 고갈되며 시들게 된다. 그들의 빛은 사라지며 그들은 미래에 대한 꿈(vision)대신에 어두움을 가지게 된다. 이와 같은 경우는 참으로 비참할 때 일어난다. 만일 그들이 은혜의 성령에게 분노를 더하여 성령의 전체적인 일에 경멸을 더한다면 그들의 경우는 일반적으로 회복할 수 없는 것이다(히6:4,6; 10:26).20)


성도로부터도 성령께서는 떠나실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부분적이며, 일시적이다. 왜냐하면 은혜의 언약 안에서 성령이 성도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성령께서 성도들로부터 완전히 그리고 전적으로 결코 떠나시지 않으실 것이라는 그 약속들이 성경에 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사59:21; 렘31:33; 32:39,40; 겔11:19).

성령께서 하나님의 은혜와 조명, 위로의 크기와 이와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는 효과면에 있어서 얼마동안은 이러한 사역을 중지하실 수도 있다. 성령은 얼마 동안은 그의 백성을 돌보지 않으시며 내버려 두실 수도 있다. 성도는 영적 고갈과 심한 연약함에 내버려질 수 있다. 이때부터 성도들은 자신들이 철저히 내버려지고 기억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사40:27; 54:7). 그러나 이와 같이 성도로부터 성령은 절대적으로나 완전히 결단코 떠나지 않으신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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