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존 오웬

목사의 의무 [4]-존 오웬

새벽지기1 2016. 5. 17. 07:30


그렇다면 이 일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1. 우리가 그렇게도 지키고자 하는 교리와 진리에 관한 명확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진리는 죄악 뿐만아니라 우유부단함과 약점에 의해서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우리에게 만일 진리에 관한 적절한 근거와 원리들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없다면, 절대로 그것을 방어/변증할 수 없습니다. 반박하는 자의 입을 막는 것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통해 얻어질 수 있지만 무엇보다 끊임없는 기도와 성경연구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2. 진리에 대한 사랑이 필요합니다.

우리 영혼 가운데 역사하는 진리에 대한 체험과 깨달음으로부터 진리에 대한 사랑과 소중함이 우러나오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떠한 진리를 알고 있다해도 우리는 진리를 위해 성실하게 싸울 수 없을 것이며, 절대로 그것을 "살 수도 팔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 문제와 관해서는 좀더 자세한 설명을 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런 논의를 시작하기 전에 이미 복음의 진리를 지키기 위해 시작된 논쟁을 알고 있었고, 또한 그런 논의를 시작한 초기의 사람이였으며, 자신의 삶과 영혼을 위하여하듯 진리를 지켜가는 신실한 목사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을 향한 어떠한 압제와 저항도 절대로 그들을 낙담케 할 수 없었습니다. 이 같은 교리란 무엇입니까? 영원히 변치 않는 예정의 교리, 실제적인 하나님께로의 회심(개종)의 교리,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행악자들의 완고함에 대한 심판의 교리. 이러한 진리는 기술의 부족이 아닌 사랑의 부족 때문에 잃어버리게 됩니다. 우리는 그들 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속에서 그런 진리들을 언급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던져지는 회중들의 비방과 비웃음을 참아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로 진리를 부끄러워해서는 안됩니다. 예전에 우리는 신실한 목사가 아닌, 신실한 목사에 의해 인간 영혼의 타락과 파멸이라고 간주되었던 알미니안주의자들의 잘못을 보았었습니다. 당시에는 그것에 관한 어떠한 논쟁이나 글 역시 두려움의 대상이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의 교리는 진리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너무나 부패함에도, 그것을 주목하는 사람이 적다해도 여전히 능력과 깨달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런 교리들의 설교를 듣고도, 성실하게 교회에 나감에도 더욱 경건해지지 못하고 더욱 신실해지지 못한다는 사실에 아무도 핑계치 못할 것입니다.

3. 생명과 평안과 능력을 찾는데 의무를 태만이 한 우리의 선배들의 관점으로, 관점에 반하여, 특별한 경우 그것에 관한 새로운 견해의 경향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칭의의 교리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중요성과 일반적(general)적 구속에 대한 다툼과 논쟁과 그리고 성도들의 궁극적인 구원에 대하여 무관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의 삶과 영혼이 이런 문제에 관해 무관심했을 때 누가 그들 가운데 평안과 능력을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그들과 같이 하고도 동일한 평안함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런 진리를 지탱해 나갈 수 없을 것입니다. 나는 신실한 목사들 가운데 종교개혁의 삶으로서, 성경의 목적과 범위안에서 간구하는 기도가운데 예정된 자유의지의 교리와 같은 중요한 진리들을 소중히 여기고 그것에 관하여 열망을 갖는 커다란 변화가 있기는 바래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에 점점 더 무관심해져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고통받는 끔찍한 타락들은 칭의의 교리가운데서 받아들여져 종교의 모든 핵심 요소들을 약화시키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남겨진 자들을 위하여 "진리를 사고 그것을 팔지 맙시다." 우리 회중들 가운데 일어나는 어떤 일이든 관심을 갖고 열심을 냅시다.

두 마음을 품은 자 한 사람이 회중가운데 들어오면, 나머지 회중들이 가장 신실한 믿음가운데 서로서로 지어져 가는 것보다 더 커다란 분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불법을 말하는 악한 자들이 우리가운데 생기기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그것은 사악한 늑대가 양무리들을 가르고 찢고 분열시키는 방법입니다.

4. 사탄의 영악한 궤변을 발견하여 깨뜨리기 위해서는 기술과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능력있는 기도, 경계함, 그리고 성실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우리를 능력가운데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덜 훈련되어진 자는 좀더 능숙한 자에게 도움과 협조를 위해 조언을 구하십시오 

마지막으로, 교회의 목사와 교사에게 요구되어지는 또 하나의 의무를 언급하겠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영혼들의 개종(구원, 회심)을 위해 성실하게 수고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목사에게 위임된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몇 가지의 편견들을 수정할 것입니다. 교회의 궁극적 목적은 모든 그리스도의 교회를 부르고 훈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단지 구경만하라고 목사를 세우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모든 시대에 걸쳐 택함받은 자들을 모으고 부르는 도구입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목사가 해야하는 임무입니다. 나는 사람들이 개종하거나 회심을 하는 또 다른 외적인 수단과 방법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오랜 관찰 끝에, 나는 얽매인 고통가운데 처해있는 일반적으로 정신적 사고능력이 높은 사람들이 회심을 시작하게 되며, 종교적인 의식에 의해서도 하나님을 믿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때론 말씀가운데 하나님의 섭리를 위해 실제적인 영적 은사를 받은 자들을 통해 회심하는 자들도 많이 있고, 가끔은 그것에 관해 부르심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영혼의 개종(회심,구원)은 교회의 목사에게 부여된 임무입니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목하십시요. 말씀의 첫 번째 대상은 온 세계입니다. 우리의 임무는 사도들의 그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방법은 정반대입니다. 사도들은 그들에게 부여된 임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도들에게 부여된 첫 번째 임무는 유대인과 이방인들 가운데 있는 죄인들에게 그리스도를 확신시키고 그리스도의 품으로 그들을 인도하는 것이였습니다. 또한 이를 위해 믿지 않는 자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그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것이 그들의 방법이였습니다. 그러나 이것과는 대조적으로 사도 바울은 세례를 주는 것이 그들의 주된 임무가 아님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하려 하심이니"(고전1:17) 내가 말한 것과는 반대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들의 주요 임무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의 두 번째 임무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명령하신 모든 것을 다 지켜 행하며 행동하는 제자들을 가르치는 것과 그들을 교회의 질서체계로 데려오는 것이였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방법이였습니다. 오늘날 똑같은 임무가 교회의 목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반대의 방법으로, 즉 목사의 첫 번째 대상을 교회입니다. 교회를 세우고 성도를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엔 무엇입니까? 그들의 또 다른 의무 즉 영혼 구원을 위해 복음 전파하는 것은 하지 않아도 됩니까? 하나님은 절대 용납하지 아니하십니다.

교회의 목사된 자들이 영혼 구원을 위해 어떻게 설교해야 하는지에 대한 몇 가지의 방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회심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이 목사가 설교하는 회중 가운데로 온다면 그들은 목사로서의 의무 이행을 통해 하나님께로 회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단지 영적 은사들을 통해 목사의 직분으로서 교회에 설교하는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양심가운데 이 같은 구분을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 장소에 500명의 사람들이 있고 그 가운데 100명의 성도가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당신은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두 배의 능력을 가지고 어떤 사람에게는 목사로서 말씀을 전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목사가 아닌 자로서 말씀을 전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런 목적을 다른 어떤 것으로 표현하는 것은 체계도 질서도 없고 논리적이지도 자연스럽지도 않은 사고방식입니다. 우리는 목사로서 설교를 듣는 자들의 영혼의 회심을 위해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2. 목사는 때때로 믿지 않는 영혼의 회심을 위해 다른 곳에서 복음을 전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어떤 내용을 전파한다하여도 목사의 직분으로서 전하는 것입니다. 나는 로마 교회의 "영구 직분"의 교리를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 구역내에서 성직자로 임명된 사람은 그의 성직자로서의 직분을 잃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만약 그가 이전에 교회에서 감독이나 목사 혹 집사의 직분을 맡았다면 비록 그가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 직분을 잃지는 않습니다. 이 교리의 기원은 중세의 스콜라 신학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Nice의회는 Miletus가 임명했던 감독이나 장로 혹 해임된 주교들은 그들의 직분을 수행하기 전에 재임명되어야만 한다는 법령을 공포하게 되었습니다. Dr. Campbell은 그의 "교회사 강의"에서 "영구 직분"에 대하여 논평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11장)에서 로마교회의 영구 직분에 관해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습니다. "그들이 동의한 전부는 이것이다"- 그들은 무엇이, 어떻게, 어느 곳에서 성도들에게 감동을 주었는지 모르는 어떤 것, 그 어떤 것은 절대로 삭제될 수 없다- 이것은 허구입니다. 그러나 목사의 직분은 사람들이 해외로 나갈 때 집을 떠나듯 그렇게 떠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법에 의해 면직되거나 파면되기 전에는 목사로서 설교하는 것을 가로막는 것은 목사 자신의 능력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께 회심한 영혼들을 위해 다른 장소에서 설교하는 것을 명령하실 때, 잠시 동안 그들의 직분을 내려놓는 것은 모든 교회의 임무입니다. 지난 시대를 돌이켜 보면 수많은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사용되어진 훌륭한 목사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목사로서가 아니라 은사를 받은 자로서 사람들을 개종시키는 것을 금하셨습니다. 나는 말합니다. 그 모든 것은 직분의 부름심을 받은 자 만이 아니고 은사를 받은 자들에 의해서도 가능하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목사로서의 재능과 은사의 끊임없는 훈련을 위해 자신을 포기하고,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라고 주님께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내게 시간과 힘이 더 있었다면, 나는 택함 받은 자들을 인도함에 있어,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과 목사의 의무 중 가장 큰 부분인 모든 종류의 신자들의 심령을 위로해주고 방향을 제시해주는 의무-이를 위해서는 신중함과 세심함, 순결함(거룩함), 겸손함, 인내가 요구된다.-에 대해서 말했을 것입니다.

나는 또한 교회의 질서와 체계 가운데 목회자의 의무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만 주신 교회의 법칙(체계/질서)은 복음 전하는 위대하고 중대한 의무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고 때와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였습니다.

마지막으로는, 교회 공동체를 경영하기 위해서, 모범적인 담론과 체계가 다른 교회들과의 연합속에서 목회자의 의무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모든 것을 하기에 능한 이가 누가 있겠습니까?" 기도하십시요,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시요.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힘과 능력을 주실 것이며, 우리 형제님들은 바로 오늘 이 모든 일을 위해 부르심을 입은 자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을 마음에 새기고 형제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결코 헛된 것이 아님을 명심하십시오

번역 : 홍상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