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기독교강요

문병호 교수의 <기독교강요> 지상강좌 (14) / '그리스도 ‘무름’으로 연합체가 되다'

새벽지기1 2016. 5. 13. 08:27


그리스도 ‘무름’으로 연합체가 되다

제사장이자 동시에 제물로 화목에 이르는 대속의 원리 제시


'제14강좌' 그리스도의 대리적 무름:  사랑의 시작은 의(義) (기독교강요 2.16.19-2.17.6)


  

1. 성부의 사랑과 성자의 공로

그리스도의 위격적 연합과 사역을 다룬 후 구원론으로 넘어가기 전에 한 장이(2.17) 전적으로 속죄론에 할애된다. 속죄론은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신 의 자체나 보좌 우편에 재위하심으로써 행하시는 전가 자체가 아니라, 의의 전가-가치를 다룬다.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으로서 제물이 되셔서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심은 자신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심이다. 속죄론은 제물 자체나 제사 자체가 아니라 제사의 대상인 제물의 가치, 즉 제물의 제사-가치를 대상으로 삼는다.

속죄(atonement, at-one-ment)라는 단어는 문자적으로 죄의 값을 치르고 하나가 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칼빈과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속죄의 의의와 가치를 ‘satisfactio’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이 단어는 본래 ‘빚 갚기’ ‘보석금 내기’ 그리고 ‘사죄’ ‘사과’ ‘탄원’이라는 어의를 가진다. 이로부터 ‘만족’이라는 뜻이 파생되었다. 필자는 이러한 뜻을 포괄하는 성경적 개념으로서 ‘무름’(laG)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무름은 그리스도의 중보자로서의 사역의 공로라고 할 것이다. 그것은 다 이루심을 전제하고 전가를 지향한다. 그것은 대리적이며, 하나님의 사랑에 상응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기뻐하신 뜻에 따라서 우리를 위한 대속제물이 되셨다(사 53:10; 눅 2:14; 갈 1:4; 골 1:19~20). 속죄의 일차적 동기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적 사랑에 있다. 그리스도의 무름은 만세 전에 있었던 삼위 하나님의 협약(pactum salutis)에 기초한다. 그것은 아들의 공로에 따라서, 아버지의 죄사함(expiatio)과 용서(propitiatio)로 말미암아, 아버지와 우리가 화목(reconciliatio)에 이르는 대속(redemptio)의 원리를 제시한다.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과 참 사람으로서 친히 자신의 몸을 속죄의 제물로 드리심으로써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위한 무름의 값’(satisfactionis pretium iusto Dei iudicio)을 치르셨다(2.12.3).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이시자 제물로서 우리를 위한 ‘무름’이 되심으로 ‘영원한 화목의 법에 따라서’(aeterna reconciliationis lege) 우리가 그 분과 ‘연합체’(societas)가 되었다(2.15.6). 우리의 구원을 위한 삼위 하나님의 영원한 뜻은 성자의 대리적 무름에 있다. 하나님의 자비는 아들을 주셔서 죽기까지 복종하는 자리에 세우심으로써 그 공로를 조건 없이 우리의 것으로 삼아주심에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 가운데, 아들의 ‘공로’(meritum, promeritum)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필연적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주’로서(행 3:15) 우리의 ‘인도자’(dux)요 ‘통치자’(principium)되심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정하심대로’(ad Dei ordinationem) 그 분의 모든 뜻을 이루심에 있었다.


이렇듯 그리스도의 무름을 다루면서 칼빈은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공로를 동시에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공로의 ‘제1원인’(causa prima)이라고 하였다. 성도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그 시초부터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말미암는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공로의 시초는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기뻐하신 뜻에 따라서’(mero beneplacito) 중보자 그리스도의 공로로 우리가 구원에 이르게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그저 베푸시는 호의’(gratuitus Dei favor)와 ‘그리스도의 순종’(obedientia Christi)은 서로 대립되거나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역사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공로에는 관심이 없이 하나님의 사랑만을 강조하는 쏘씨누스를 위시한 궤변론자들의 주장은 지극히 허망되다. 칼빈은 어거스틴을 인용하면서 이러한 자신의 논지를 부각시킨다. 어거스틴은 성자 하나님께서 ‘인성으로’(natura humana) 구속사역을 성취한 것이 성부 하나님의 은총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여기면서, ‘하나님을 참으로 기쁘게 하시는 것 외에 어떤 다른 공로도 그리스도에게는 없다’ 라고 단언한다(2.17.1).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하나님의 사랑이 ‘지고한 원인, 혹은 기원’(summa causa vel origo)이 된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와 화목하시기를 원하셨다(골 1:19~20; 고후 5:19). 그리하여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엡 1:4~5) 그저 주시는 은혜 가운데(엡 1:6) 우리를 서로 화목하게 하려 하셨다(엡 2:15~16).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사 그 아들을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i`rasmoj)로 보내셨다(요일 4:10; 요일 2:2).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우리 구원의 질료’(salutis nostrae materia)로 삼으셨다. 구원의 공로는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께 있다. 믿음은 ‘형상인’(formalis causa)으로서 ‘이차적이며 부수적’(secunda et propior)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호의로’(favore suo) 자신의 아들을 주심으로써 우리와 화목하셨다. 하나님의 뜻은 성자께서 ‘자신으로부터 얻으신 것’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심에 있었다.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는 자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시사 우리의 의가 되게 하셨다(고후 5:21). 성부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성자의 의가 역사하게 되었다. 성부께서 성자의 의로써 사랑하셨다. 성부께서 친히 ‘의의 원천’(fons iustitiae)이 되셨다. 그러므로,

“사랑의 시작은 의(義)이다”(principium amoris est iustitia)(2.17.2).


2. 그리스도의 대리적 무름(satisfactio vicaria)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빚진 형벌을’(poenam nobis debitam) ‘무르셨다’(satisfecit). 그리스도의 ‘의’(iustitia)가 우리의 공로로 여겨졌다. 아들의 순종하심으로 우리를 의인 삼으심에 아버지의 ‘호의’(favor)가 나타났다(롬 5:19). ‘그리스도의 순종으로’(obedientia) 우리가 의인으로 인정되었다(2.17.3).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우리의 죄를 사하시려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셨다(마 26:28; 눅 22:20). 오직 그 분의 피로 우리가 깨끗하게 된다(요일 1:7).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자신을 제물로 드려 많은 사람들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다(히 9:22, 28). 그 분께서 ‘새 언약의 중보자’(mediator novi testamenti)로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영원한 기업을 얻게 하셨다(히 9:15). 그 분께서 자신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다(히 9:12). 그 분께서 징계를 당하시고 땅에서 끊어지셨으니(사 53:5, 8) 우리가 아버지와 화목을 누리게 되었다. 그 분께서 저주의 죽음을 당하셨으므로(갈 3:13; 벧전 2:24) 우리가 참 자녀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로 말미암은 죄를 사하고, 용서하며, 무르는 힘을(vim expiandi, placandi et satisfaciendi) 우리가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분의 은총은 너무나 희미해질 것이다”(2.17.4)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변개치 아니하신다. 하나님 앞에서의 의는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는 불순종의 값(pretium)에 대한 무름(satisfactio)을 요구한다(고전 6:20). 그 무름의 ‘속전’(avntilutron)을 주님께서 자신을 ‘화목제물’(i`rasthrion)로 드림으로써 치르셨다(롬 3:24~25; 딤전 2:6).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율법 가운데 우리의 행위들에 대해서 약속하신 것을(레 18:5) 얻게 된다”(nos consequi per Christi gratiam quod Deus operibus nostris in lege promisit).


우리의 죄 값에 대한 그리스도의 ‘지불’(solutio), 즉 ‘보상’(compensatio)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사함’(remissio peccatorum)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gratia)를 입고 계속해서 살게 되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산 자마다 그 분을 양식으로 먹고 산다(요 6:55, 57). 그 분께서 ‘생명의 실체’(vitae substantia)가 되시기 때문이다(2.17.5).

성부께서는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세상을 위하여 내주셨다(롬 8:32; 요 3:16). 그리고 자신의 뜻을 이룬 아들을 높여서 지극히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빌 2:9). 아들의 영광은 아버지의 뜻을 이룸에 있었다. 아버지의 뜻은 아들이 우리를 위한 속죄제물로서 자신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드림에 있었다(요 17:19).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눅 24:26).


칼빈은 사도신경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보여주는 ‘일람표와 같이’(vice tabulae) 성경의 순수한 가르침을 그 속에 다 포함한다고 보았다(2.16.18). 주님께서 행하신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한 대리적 속죄를 이루기 위함이셨다. 오직 우리의 의는 그 분의 ‘예’를 ‘아멘’으로 받음에 있다(고후 1:20). 우리의 순종은 아멘의 순종 외에는 없다.

“우리는 전체 구원과 그것의 모든 부분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행 4:12). 그러므로 우리는 가장 작은 한 부분이라도 다른 곳으로부터 끌어오려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구원을 구한다면, 우리는 바로 예수의 이름으로 인해서 그것이 ‘그 분 안에’ 있음을 배우게 될 것이다(고전 1:30). 만약 우리가 성령의 다른 은사들을 구한다면, 그것들은 그 분의 기름부음 가운데 발견될 것이다. 만약 우리가 능력을 구한다면, 그것은 그 분의 주권에; 순결함을 구한다면, 그 분의 잉태에; 온유함을 구한다면, 그 분의 나심에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심으로 그 분께서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이 되셔서(히 2:17) 우리의 고난을 느끼셨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구원을 구한다면, 그것은 그 분의 수난에 있다; 형벌로부터의 방면(放免)을 구한다면, 그 분의 징계에; 저주로부터 사함을 구한다면, 그 분의 십자가에(갈 3:13); 무름을 구한다면, 그 분의 희생 제물에; 정결함을 구한다면, 그 분의 피에; 화목을 구한다면, 그 분의 지옥 강하에; 육신의 죽음을 구한다면, 그 분의 무덤에; 삶의 새로움을 구한다면, 그 분의 부활에; 영생을 구한다면, 또한 그곳에; 하늘 왕국의 유업을 구한다면, 그 분의 하늘로 들어가심에; 만약 보호, 안전, 모든 축복의 부요함을 구한다면, 그 분의 왕국에; 떨림 없는 심판을 구한다면, 그것은 그 분께 주어진 능력에. 요약하면, 모든 종류의 선함으로 충만한 곳간이 그 분께 있으니, 다른 곳이 아니라, 이 샘으로부터 우리를 가득 채우도록 하자”(2.1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