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기독교강요

문병호 교수의 <기독교강요> 지상강좌 (12) / '두 본성으로 한 인격을 이루시다'

새벽지기1 2016. 5. 11. 07:31

두 본성으로 한 인격을 이루시다

위격적 연합 따른 ‘속성 교통’ 관점서 중보자 그리스도 읽어야


'제12강좌' 위격적 연합을 통한 양성의 교통: 선지자, 왕, 제사장(기독교강요 2.14.1-2.15.6)


  

1. 위격적 연합과 위격적 사역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verbum carnem esse factum). 이는 말씀이 육신으로 ‘변했다거나’(versum) ‘섞여서 혼합되었음’(confuse permixtum)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육신은 ‘가장 위대한 신비’였다. 성자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신성으로만 계셨다. 그러나 ‘때가 차매’(갈 4:4) 동일한 말씀의 위격 가운데서 그 신성이 마리아의 태로부터 성령으로 조성된 인성과 연합되었다. 신성과 인성은 위격 안에 있으나(en-hypostasis) 위격은 아니다(an-hypostasis). 성(性, natura)은 위격(hypostasis)과는 달리 실체(substantia)가 아니므로 그 자체로 개체적 존재성은 없다. 그러므로 양성은 각각 고유한 속성(proprietas)을 유지한 채로 오직 위격 안에만 있으며 오직 위격을 통하여서만 교통한다(2.14.1).


이렇듯 칼빈은 위격적 연합(unio hypostatica)을 통해서만 양성의 교통이 있음을 명백하게 주장함으로써 이후 그의 후예들에 의해서 전개된 개혁주의 속성교통론의 교리적 기초를 확고하게 수립하였다.

“영원 전에 아버지로부터 나신 말씀이 위격적 연합으로 인간의 본성을 취하셨다”(sermo ante saecula ex patre genitus, unione hypostatica naturam humanum susceperit).

위격적 연합은 ‘두 본성으로 한 인격을 이루는 것’(personam unam constituit ex naturis duabus)으로 정의된다(2.14.5).

칼빈은 위격과 성을 구별하여서 그리스도께서는 양성의 연합 가운데서 한 분이심(unitas in unione, unity in union)을 분명히 지적하였다. 초대 교회의 네스토리우스가 ‘이중의 그리스도’(Christus duplex)를 생각한 것은 위격과 성을 혼동하였기 때문이라고 비판하였다. 칼빈은 또한 양성의 연합 가운데서도 각각의 성은 고유한 속성을 유지함을 분명히 주장하였다. 초대 교회의 유티케스는 이러한 진리를 거슬러 양성이 섞여서 전혀 다른 ‘제 3의 무엇’(something third, quid tertium)이 된다는 궤변을 늘어놓았다고 비판하였다. 이렇듯 양성을 ‘분리하는 것’(distrahere)과 양성을 ‘혼합하는 것’(confundere)이 모두 거부되었다. 이로써 신성과 인성이 혼합되지 않고(inconfuse), 변화되지 않고(immutabiliter), 분할되지 않고(indivise), 분리되지 않고(inseparabiliter) 연합한다는 칼케돈 신경(451)의 교리가 충실히 계승되었다(2.14.4). 이러한 입장을 견지하면서 칼빈은 양성이 서로 간에 자체로 교통한다는 루터란들의 속성교통론을 단호히 거부하였다(2.14.1).


칼빈은 성육신한 중보자 그리스도에 관하여 다양하게 기술된 성경의 본문들을 위격적 연합에 따른 ‘속성교통’(communicatio idiomatum)이라는 관점에서 일관성 있게 읽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첫째로, 하나님의 아들의 ‘영원하신 본질’(essentia aeterna)로서 신성에 고유한 속성만을 표현하는 말씀들도 양성의 위격적 연합의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 성자께서 아브라함이 나기 전에 계셨으며(요 8:58), 영원히 아버지와 함께 영광을 받으시며(요 17:5), 언제나 아버지와 함께 일하시는 분이라는(요 5:17) 말씀들이 예시된다.

둘째로, 인성에 고유한 속성만이 표현된 말씀들도 양성의 위격적 연합의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 여기에서는 성자의 낮아지심과 육체 가운데 오심이 주로 거론된다. 성자께서는 ‘아버지의 종’이시다(사 42:1). 그 분은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시며(요 8:50), 자신의 뜻을 행하려고 하시지 않으시며(요 6:38), 지혜와 키가 자라 가시는 분으로서(눅 2:52), 사람들이 보고 만질 수 있는 분이시다(눅 24:39).

셋째로, 신성에 고유한 속성과 인성의 고유한 속성을 함께 표현하는 본문들을 통하여서 위격적 연합에 따른 속성교통이 설명된다. ‘하나님이(신성) 자기 피로(인성) 사신 교회’(행 20:28); ‘영광의 주를(신성) 십자가에 못 박지(인성)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8);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신성)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인성)’(요일 1:1); ‘그가’하나님이’(신성)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인성)’(요일 3:16).


하나님께서는 피가 없으시며, 수난을 받을 수도 없으시며, 손으로 만질 수 없는 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죽으실 수 없으시다. 고난당할 수 있음(passibility)은 인성의 속성에 속한 것이다. 그런데 인성은 실체가 아니므로 고난의 주체가 될 수 없다. 고난당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그 분의 위격 가운데 인성은 항상 신성과 함께 있다. 성육신 이후 중보자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든지 참 하나님이시자 참 사람으로서 계시며, 일하신다.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고 죽으셨다. 고난당하심은 인성에 따른 것이었다. 다만, 말씀들에 의해서, 고난당하심이 신성에 따른 것은 아니었지만 위격적 연합에 따른 양성의 교통에 의해서 신성에 ‘돌려진다’(transferuntur). 마리아가 ‘주의 어머니’로 불리는(눅 1:43) 소이(所以)도 여기에 있다(2.14.4). 결론적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인성에 따라서(ad humanitatem), 참 하나님과 참 사람으로서 나셨으며 고난을 당하셨다고 진술될 수 있다.

“동일하신 그 분 자신께서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셨으므로, 양성의 연합으로 말미암아 한 성에 속한 것을 다른 성에 주시고자 하셨다”(quia ipse idem erat Deus et homo, propter duplicis naturae unionem alteri dabat quod erat alterius)(2.14.2).


신인양성의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참 실체’(vera substantia)를 가장 잘 드러내는 말씀들이 요한복음에 반복해서 예시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로부터 권능을 받았으니 죄를 사하시는 분이시다(요 1:29). 그 분께서는 아버지의 임명을 받아서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자(요 5:21~23), 세상의 빛(요 9:5; 8:12), 선한 목자며 유일한 문(요 10:11, 9), 참 포도나무(요 15:1)가 되신다. 그리스도께서 낮아지시고(빌 2:6~8) 높아지셔서(빌 2:9~11)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시고(히 2:9) 자신의 나라를 하나님께 바치리라는 말씀(고전 15:24)은 그 분의 왕국이 유한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중보자로서의 위격적 연합 가운데서의 위격적 사역이 마지막에 어떠할 것인지를 드러낸다.

“진실로 처음이 없는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는 끝도 없을 것이다”(2.14.3).


중보자 그리스도의 인격에 있어서의 양성의 위격적 연합은 단지 동력적(動力的)으로나 가현적(假現的)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세르베투스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심은 그가 단지 성령으로 인하여 처녀의 태중에서 나셨기 때문에 그러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 분께서는 약간의 신적인 요소가 인간적 요소에 가미된 ‘혼합체’permixtum)”이지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세르베투스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한 ‘관념’(idea)에 지나지 않았다. 성육신은 이 관념의 ‘형상화’(figuratio)에 다르지 않았다고 보았다(2.14.5-8). 세르베투스는 그리스도께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는 가운데서 그 분의 양성적 중보를 다루는 것이 지극히 모순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2. 그리스도의 삼중직(munus triplex)

중보자 그리스도께서는 선지자, 왕, 제사장으로서 대속의 의를 다 이루셨으며 다 이루신 의를 여전히 전가해 주신다. 그 분의 계속적 중보는 다 이루신 자신의 의를 여전히 전가해 주심에 다르지 않다. 그 분께서는 지금도 삼중직을 계속 수행하신다.

첫째로, 그리스도께서는 선지자 직분을 감당하셨으며 지금도 감당하신다.

구약의 백성들은 선지자들을 통하여서 ‘유익한 가르침과 구원에 충분한 것들’을 들었지만 메시아가 오셔서 그 분으로부터 ‘지식에 충만한 빛을’(plenam intelligentiae lucem) 받을 것을 소망하였다. 사마리아 여인과 같이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오시면 ‘모든 것’을 알게 되리라 믿었다(요 4:25). 그 분께서 오시면 ‘증인’으로서(사 55:4), ‘모사’로서(사 9:6; 28:29) ‘영원한 의’를 드러내실 것이라고(단 9:24) 예언되었다(1.15.1).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1~2).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진리의 성령의 역사로 가르치는 중보의 사역을 계속하고 계신다. 오직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자마다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마 17:5).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 2:3). ‘예수님께서 기름 부음 받으신 것은(사 61:1~2; 눅 4:18) 가르치는 역할을 하실 뿐 아니라 자신의 모든 몸으로 복음이 계속 전파되는 일에 성령의 능력이 작용하게 하려 하심이셨다.’ 여기에서 칼빈은 ‘교리의 완전함’(perfectio doctrinae)이 그 분 안에 있으므로 ‘그리스도 자신 외에서’(extra ipsum) 지식을 구하는 것은 ‘복음의 단순성을 넘어서는’(ultra evangelii simpliciatem) 것이라고 경고한다(2.15.2).

둘째로, 그리스도의 왕직과 관련해서 그리스도의 ‘힘’(vis)과 ‘영원성’(aeternitas)에 대해서 주목한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왕직의 이러한 특성을 그 분의 ‘인격’persona)에서 찾는다. 그리스도의 왕권은 구원과 관련해서 교회와 교인들 전체에게 미친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가 영원하듯이 그리스도의 영적인 왕국도 영원하다(단 2:44; 눅 1:33).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영원성은 성도들을 ‘복된 불멸에 대한 소망으로’ 인도한다(2.15.3).

그리스도의 왕권은 세상적 개념과는 달리 단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께서 ‘성령의 선물들로써’(donis spiritus) ‘내적이며 외적으로’(intus et extra) 채워주심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다스리심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모든 것이 우리와 교통되게 하심에 있다. 지금 그 분께서는 우리를 자신의 권능으로 무장시키시고, 자신의 장엄한 아름다움으로 장식하시고, 자신의 부요하심으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신다.”

이러한 일이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말미암는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음’이 곧 그 분의 통치(gubernatio)이다(2.15.4).


그리스도의 왕직과 관련해서 칼빈은 특히 성령의 임재로 말미암아 ‘하늘의 생명’(vita coelestis)이 우리에게 내려졌음을 강조한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거처로 택하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하늘 보화를 그를 통하여 풍부하게 흐르게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대사’(legatus)가 되셔서 교회와 성도의 ‘머리’(caput)로서 다스리심은 영원하다(엡 1:20~23). 그리스도의 통치로 다스림을 받음은 그 분의 은혜대로 선물을 받음에 다르지 않다(엡 4:7). 구속사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중보자로서 다 이루신 것을 다 전가해 주시면 구속의 중보직은 끝이 난다. 그 때 그 분께서는 자신의 나라를 하나님께 바치며(고전 15:24) 하나님께서 만유의 주가 되게 하신다(고전 15:28). 이로써 아들은 창조와 타락 전의 영광을 누리며 제2위 하나님의 고유한 속성대로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종국적으로 그리스도의 나라와 중보는 영원하다(2.15.5).

셋째로, 그리스도께서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으로서(시 110:4; 히 5:6; 7:15) ‘자신의 거룩하심으로’(sanctitate sua)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다’(conciliet).

주님께서 자신을 거룩하게 하심은(요 17:19) 오직 대속의 역사를 이루기 위함이셨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속죄물’(piaculum)이 되셨다. 그 분께서 ‘제사장’(sacerdos)으로서 자신을 ‘제물’(sacrificium)로 드리셨다. 그러므로 그 분께서만 우리를 위한 ‘사함’이 되신다(히 9:22).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화목의 법에 따라서’(aeterna reconciliationis lege) 우리를 위한 ‘희생제물’(hostia)이 되시고 ‘영원한 중재자’(aeternus deprecator)로서 하늘 성소에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심으로써 우리를 자신과 ‘연합체’(societas)가 되게 하신다(히 7~9).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영원하신 제사장으로서 친히 자신을 제물로 드리신 중보자 그리스도께서 여전히 하늘 성소에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심으로써 우리의 구원을 다 이루신다(2.14.15). 그곳에 계신 그 분께서 우리 안에 계시도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