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존 스토트

존 스토트의 성령론(3) / 이은창

새벽지기1 2016. 3. 29. 20:13


5.성령의 충만


1)‘세례’와 ‘충만’의 차이점


성령의 ‘선물’ 또는 ‘세례’라는 것이 과거적인 사건으로 현재와 미래에는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성령의 ‘세례’는 성령의 ‘충만’이라는 지속적으로 축복으로 이어진다. 성령 세례의 결과로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행2:4) 따라서 성령의 충만은 성령 세례의 결과였다. 세례는 예수님이 행하신 일이고(하늘로부터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써), 충만은 그들이 받은 것이었다. 세례는 독특한 입문적인 경험이었고, 충만은 계속되는 영구적인 결과로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표준이 되도록 의도된 것이었다. 입문의 경험으로써의 세례는 반복될 수도, 잃어버릴 수도 없는 것이지만, 충만은 반복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어떤 경우에든 유지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성령은 우리의 죄로 인해 ‘근심하기도’ 하시고(엡4:30), 죄인을 충만하게 채우시는 일을 그치기도 하신다.


신약성경에서 사람들이 성령으로 “채우심을 받았다”거나 성령으로 “충만했다”고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첫째, “충만하다”거나 “채우심을 받았다”는 것은 모든 헌신된 그리스도인의 정상적인 특징이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이 표현은 어떤 특정한 사역이나 직책을 위해 하나님이 내려주신 것을 가리킨다. 셋째, 때때로 성령의 충만은 일생 동안 지속되는 직분(예를 들면 사도나 선지자처럼)을 위해서가 아니라 즉각적으로 감당해야 할 일이나 또는 어떤 위기 상황에 준비시키기 위해서 주어졌다. 이것은 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님의 공적 사역의 시작에서 성령과 깊이 관련되어 나타나는데, 주님의 성령 충만함의 경험은 이 세 가지 범부를 전부 포함한다.


성령 충만의 지속적인 충만과 채움의 중요성은 에베소서 5:18의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명령을 통해 알 수 있다. 반대로 성령세례와 관련된 신약 성경의 일곱 구절은 명령형으로 된 권면이 하나도 없다. 이러한 구절들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잃어버리는 것이 가능하며 자주 있는 것임을 보여 주고 있다.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바울의 서신은 그들이 모두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것(고전12:3)과 모든 신령한 은사들을 넘치게 받았다(고전1:4-7)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바울은 그들이 신령하지 않은 자들이라고 책망하는 것을 통해서 성령의 은사 발휘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 맺는 것을 지적한다. 이것은 그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고, 성령의 은사를 넘치게 받았지만,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많은 사람들은 ‘방언을 하는 것’이 성령을 받은 것에 대한 필요 불가결한 표지라는 가르침을 접할 때 자신은 성령을 받지 못했거나 성령의 충만을 받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도행전에는 성령을 받은 모든 그룹 중 오직 세 그룹만이 ‘방언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을 뿐(2:1-4; 10:44-46; 19:1-6), 성령을 받은 다른 사람들과 그룹들이 그렇게 했다는 기록이 없다. 따라서 그런 주장은 독단적이라고 말한다. 또한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방언’의 은사는 여러 은사들 중 하나일 뿐이며,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명확히 가르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최근에 몇몇 은사주의 운동과 오순절 교회에서 방언이 성령의 선물에 대한 불가결한 표지가 아님을 인정하고 있다.    


2)성령충만의 지속과 결과


그렇다면 어떻게 성령충만을 받을 수 있는가? 존 스토트는 요한복음 7:37-39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성령충만을 지속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존 스토트는 계속해서 예수님께 와서 마시는 것 외에는 이러한 계속되는 들이킴과 흘러나감을 보장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성령의 충만은 계속해서 믿음으로 충당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윌리엄 템플의 말을 인용하면서 우리의 받은 성령 충만은 전도의 열망과 활동으로 이어져야 함을 강조한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성령을 소유하면서(또는 성령이 내주하시는 자는 그 누구도), 그 성령을 자신에게만 제한할 수 없다. 성령은 그 계신 곳에서 흘러나가신다. 만일 흘러나가지 않는다면, 그분이 거기에 계시지 않은 것이다.”(윌리엄 템플)


존 스토트는 성령 충만의 주된 증거가 기적적인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것이며, 성령의 은사에 있지 않고 성령의 열매에 있다고 주장한다. 성령 충만에 대한 결과를 묘사한 유일한 본문으로 에베소서 5:18-21를 제시한다. 이 본문은 먼저 성령 충만을 우리에게 명령으로 요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령 충만이 모든 시대에 모든 그리스도인이 선택이 아니라 의무로 받아들어야 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성령 충만의 결과로는 서로 화답하며(교제), 찬송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피차 복종하는 일로 나타남을 강조한다.


5)성령 충만의 잘못된 이해


오순절 운동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성령의 세례가 반드시 이러해야 한다는 성경이 아닌 선험적 입장에서 접근하는 오류를 범한다고 비판한다. 사람들은 항상 마음 한구석에 오순절의 극적인 사건을 간직하고 있으며, 그들은 바람과 불 그리고 방언 등을 추구한다. 그들은,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의 회심과 함께 나타났던 초자연적인 표지들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회심에서 전형적인 모델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오순절의 성령 강림과 함께 나타났던 초자연적인 표지들이 모든 성령 세례의 전형적인 모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잊고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성령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통해서 누릴 수 있는 것보다 수준 낮은 신앙생활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이 더 문제임을 지적한다. 따라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실패와 보잘것없는 성과는 그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증거가 아니라 성령의 충만을 회복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오순절적인’ 경험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특정한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존 스토트는 단호하게 말한다. 첫째, 그런 경험의 일부는 의심할 여지없이 마귀적이며, 진정한 영적 경험인 양 위장한 사단의 끔찍한 계략이다. 둘째, 그러한 경험 중 좀 더 많은 부분은 심리적인 것들이다. 셋째, 어떤 또 다른 현대의 경험들은 실제로는 회심의 경험인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귀적이지 않고 순전히 심리적이지도 않은 경험들이 있다면 그것은 회심의 경험이며 하나님에 대한 참되고 깊은 경험들이다. 그럼에도 이런 경험에 대해서 존 스토트는 세 가지를 강조한다. 첫째, 그 경험들은 개인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남으로 특정한 것으로 정형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둘째, 그러한 경험은 매우 감동적이고 흥미로울 수 있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우리를 그분과 화목케 하신 그 첫 번째 은혜의 사역이 지니는 중요성과 비교될 수 없다. 그래서 이런 경험이 중생을 훼손하거나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오점을 남겨서는 안 된다. 셋째, 이러한 경험은 우리의 구원의 여정에서 본다면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직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했기에 걸어가야 할 더 많은 고난의 길이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