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존 스토트

존 스토의 성령론(4) / 이은창

새벽지기1 2016. 3. 31. 21:49


6. 성령의 은사들


존 스토트는 성령의 충만이 삶에서 성령의 열매로 나타난다면, 성령의 은사는 교회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 사용되도록 그리스도 개개인에게 주어진다고 말한다.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교회에 대해서 쓸 때, 종종 교회의 통일성과 다양성을 대조시킨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성령 사역의 결과다. 교회는 하나인데 그 이유는 한 성령이 모든 신자 안에 거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는 다양한데 그 이유는 한 성령이 모든 신자에게 각각 다른 은사들을 나누어 주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의 선물(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령의 선물)은 교회의 통일성을 이루고, 성령의 은사들(성령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은 교회의 사역을 다양하게 만든다. 교회는 통일성의 근거를 ‘카리스’(charis, 은혜)에, 그 다양성의 근거를 ‘카리스마타(charismata, 은혜의 은사들)에 두고 있다.”


1)영적 은사들의 특성과 종류


바울은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4-6)는 말씀을 통해서 비록 은사가 다양하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심을 강조한다. 또한 성령의 은사들은 사람들이 특정하게 각자에게 맞는 봉사의 일을 하는 데 적합하도록 하나님이 그분의 은혜와 능력으로 부여하신 일정한 재능들이다.


존 스토트는 은사와 관련해 많은 사람들이 방언과 예언과 병 고치는 은사 같은 호기심을 자극하는 은사만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고린도전서 12장, 로마서 12장 등을 통해 다양한 은사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적어도 신약 성경에 명기된 스무 가지의 은사가 있으며, 다양성을 사랑하시고, 후히 주시는 분인 살아 계신 하나님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은사들을 주실 수 있다. 그것은 바울이 여러 번 반복해서 강조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성령은 한 분이시지만 은사는 여러 가지고, 직임도 여러 가지며, 역사도 여러 가지라고 그는 쓰고 있다.(고전12:4-6)


3)영적 은사와 타고난 재능과의 관계


영적 은사와 타고난 재능의 상호 연관 관계를 부인하기 어렵다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첫째, 창조의 하나님과 새 창조의 하나님은 같은 분으로서, 그분은 그 둘 모두를 통해 그분의 온전한 뜻을 이루어 가신다. 이 하나님의 뜻은 영원하다. 둘째, 몇 가지 ‘카리스마타’는 기적적인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오히려 지극히 평범한 것들이다. 성경의 모든 증거들은 타고난 재능과 영적인 경계선을 그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경고한다고 말한다.


4)모든 영적 은사는 기적적인 은사인가?


현대에는 ‘카리스마적’이라는 말이 ‘기적적인’이라는 말과 거의 동의어처럼 사용된다. 그러나 어떤 은사들은 기적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며, 무척 평범하고 심지어는 단조롭게 보인다. 가르치는 은사나 권위하는 은사, 구제하는 은사나 긍휼을 베푸는 은사는 기적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지혜의 말씀’이나 ‘지식의 말씀’ 또는 ‘믿음’(고전 12:8-9)등도 그 용어만 보아서는 그것들이 기적적이거나 기적을 포함한다고 보아야 할 명백한 이유가 없다.


하나님의 행하시는 기적에 대해 우리 인간이 함부로 가능과 불가능을 독단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자유로우시며 우주를 주관하시는 절대 주권을 가지신 창조주이시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거나 그분의 행하심을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활동을 오로지 기적적인 사건들에서만 찾는다. 그들은 하나님을 마술사 같은 존재로 둔갑시킨다. 우리 모두는 초자연이 아니라 자연 안에서 그리고 기적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우선적으로 일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성경적인 계시를 바로 인식해야 한다. 성경을 단순히 기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사람들 역시 문제다. 성경에 여러 기적 이야기들이 나오는 것은 사실이지만, 성경의 하나님이 단지 기적의 하나님만은 아니듯이, 성경 역시 단지 기적에 대한 책이 아니다. 오히려 성경 역사의 많은 부분에는 기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예수님이 구약 시대에 속한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 칭찬하셨던 세례 요한은 전혀 기적을 행한 적이 없다고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요 10:41).


그러면서 존 스토트는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밝힌다. “나는 오늘날 기적이 일상적으로 일어난다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적에 의해 그 진정성이 증명되어야 할 특별 계시는 이미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권적인 분이시며 또한 자유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기적을 행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특수한 상황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5)성경에 나오는 모든 영적 은사들이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주어지는가?


존 스토트는 사도와 선지자가 오늘날 교회에 존재하는지의 문제에 대한 접근을 통해서 사실상 구약의 은사가 오늘날 다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사도들의 경우 역사적 예수님, 특별히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한 자들(행1:21-22; 고전9:1; 15:8-9)이라는 점과, 그리스도에 의해 개인적으로 임명되고 권위가 주어졌다는 점(막 3:14) 그리고 가르치는 사역을 위해서 특별한 영감을 받았다는 점(요14:25-26; 16:12-15)에서 독특하다. 그런 점에서 일차적인 의미로는 사도라는 은사는 성격상 그들의 계승자로 존재하지 않는다.


선지자는 신성한 계시가 주어지는 통로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던 자들이며 따라서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말했던 자들이었다(출4:12; 7:1-2; 렘1:4-9; 23:16,18,22,28). 이 용어에 대한 이러한 핵심적인 성경적 의미에서 보면, 더 이상 선지자는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사도들의 증거 안에서 완성되었으며, 성경의 정경은 완성된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직접적이고 새로운 계시의 통로로서의 ‘선지자들’이라는 일차적인 의미에서는 이 ‘카리스마’는 더 이상 주어지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 오늘날 교회에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가르침의 방법은 새로운 계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성경 안에서 이미 완성된 그분의 계시에 대한 강해이다.


6)‘은사적’이라는 말


존 스토트는 ‘은사적’(charismatic)이라는 말이 잘못 사용되는 것은 비판한다. 먼저 어떤 신학자들이 그리스도인의 사역을 언급할 때 ‘은사적’이라는 말과 ‘제도적’(instituional)이라는 말을 대치시키는 문제를 지적한다. 그들은 목사나 교사는 ‘제도적인’ 반면, 선지자는 ‘은사적’이라고 부르면서, 전자는 교회가 임명하지만 후자는 하나님이 직접 임명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교회는 하나님이 부르시지 않은 사람은 교회에서도 그 직분을 임명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와 관련해 존 오웬은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은사를 주셔서 미리 준비시키시기 전에는 그 누구도 사역의 직분에 임명할 권한이 없다.”고 했다. 결국 ‘카리스마’는 직분과 은사가 합쳐서 이루어진 것이다.(고전12:28; 롬12:7; 엡4:11)


둘째로 대중적으로 이 말이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라는 말처럼 매력과 천재성이 합쳐진 모습을 묘사하는 말로 쓰이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신약 성경의 ‘카리스마타’는 마치 눈에 확 들어오는 은사들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긍휼을 베푸는 일, 관대함, 행정 등과 같이 눈에 띄지 않는 일들도 성경적인 의미에서 똑같이 ‘카리스마적’인 것이다.


셋째로 오순절 운동과 관련한 특정한 운동을 ‘은사주의적’ 운동이라고 지적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이 표현은 대단히 왜곡된 표현임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이 표현은 전체 교회에 사용될 칭호이지 일부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될 표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체 교회는 은사적인 공동체로서, 모든 지체들이 자신의 은사(‘카리스마타’)에 따라 그리스도의 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