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존 스토트

존 스토트의 성령론 [완결] / 이은창

새벽지기1 2016. 4. 7. 15:41


7) 은사의 범위: 은사는 누구에게 주어지는가?


은사의 종류가 다양하다면 그 분배도 다양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신약 성경은 ‘카리스마타’는 선택된 소수의 특권이 아니라, 비록 은사를 묻어 두고 사용하지 않는다 해도 적어도 한 가지씩은 은사나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확증하는 근거를 제시해 준다(롬12:3-6; 고전12:11; 엡4:7; 벧전4:10; 고전12:12,14,27) 이러한 관점에서 전체 교회는 ‘은사적 공동체’이다.


8) 영적 은사들의 원천: 은사는 어디에서 오는가?


첫째, 영적 은사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값없이 주시는 구원과 마찬가지로 봉사를 위해 주어지는 ‘카리스마타’ 역시 영생의 ‘카리스마’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거저 베푸시는 것이다.


둘째, 영적 은사들은 하나님의 영의 선물이다. 고린도전서 12장은 성령이 우리에게 영적 은사들을 주실 뿐 아니라,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셔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게 하시고(3절), 우리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성령을 마실 때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과 연합하게 하신다(13절).


셋째, 영적 은사들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나누어 주시는 선물이다. 성경은 믿음의 성장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사들을 나누어 주시는 것은 우리의 뜻이 아니라 주권적인 성령의 뜻에 달려 있다.


9) 영적 은사의 목적: 은사는 무엇을 위해 주어지는가?


- 영적은사의 목적

성경은 은사의 주된 목적이 교회에 ‘덕을 끼치는 것’, 즉 교회를 세우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들은 ‘봉사의 선물’이라고 말한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는 말씀과 “각각 은사(카리스마)를 받은대로...서로 봉사하라”(벧전 4:10)는 말씀에 잘 나타나 있다.


영적 은사들은 우리 자신들(수혜자)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돕고, 위로하고, 강건하게 하라고 주어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세우는 것’의 의미다.(엡4:12, 16) 모든 ‘카리스마타’가 그리스도인 개개인과 전체 교회를 세우기 위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세우는 역할을 더 많이 하면 할수록 그 가치는 더 커진다.


- 방언에 대하여


방언이라고 알려진 현대의 현상이 신약 성경에 나오는 은사와 동일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을 받았던 신자들이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 즉 외국어로 말한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들이 말했던 언어들은 모두 군중 속의 여러 그룹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행 2:4-11).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현상도 이와 동일할 것이라는 강력한 신학적·언어학적 추정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방언’과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방언’을 예리하게 구분하기도 한다. 그러나 양쪽에 나오는 현상이 동일하다고 보는 논증, 즉 알아들을 수 없는 황홀경의 말들이 아니라 적어도 현장에 있는 일부 사람들(오순절 때처럼)에게는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들이었다는 논증의 강점을 생각할 때 그러한 문제점들은 비교적 적은 편이다.


바울은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라고 말한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사는 좋은 것이며 사모할 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언은 그 자체로서는 (다시 말해서 그 안에 담긴 내용을 떠나서는) 덕을 세울 수 있는 특정한 능력을 지니지 못했다. 방언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님을 존 스토트는 두 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한다. 첫째, 신양 성경에서 ‘덕을 세우는 것’은 언제나 다른 사람을 세우는 사역을 말한다. 자기를 세우는 것은 결코 신약에서 덕을 세우는 것이 될 수 없다. 둘째, 모든 영적 은사들은 봉사의 은사이며 ‘공동의 유익을 위해서’ 주어진 것으로서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한 것이라는 가르침에 비추어서 방언에 대해 접근해야 한다.


모든 ‘카리스마타’는 ‘공동의 유익을 위해’ 주어진다. 바울은 에베소서 4:11-12을 통해 다양한 은사를 설명하며,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말한다.


7. 결론


지금까지 20세기 가장 대표적인 복음주의자인 존 스토트의 성령론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개혁주의 성령론에 기반을 둔 존 스토트의 성령론은 영국 내에서는 그와 쌍벽을 이루었던 로이드 존스의 성령론과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히 두 사람의 사역을 비교해 보면 그 차이의 원인이 성령론의 차이에서 시작되었을 가능성까지 보인다. 그렇지만 존 스토트는 위대한 복음주의자답게 오순절 운동에 대해서도 유연성을 보여주며, 성경을 기반으로 한 적극적인 대화를 제안한다.

다른 이야기지만 존 스토트의 설교방법을 Bridge Building라고 부른다. 그것은 성경과 현실을 연결하는 그의 독특한 설교방식을 일컫는 말이다. 전통적 개혁주의 성령론을 받아들이는 교회들조차 성령님의 이해와 적용에 대해서는 오히려 오순절 운동을 따르는 모순된 경우를 보게 된다.

가장 대표적으로 'Again in 1907' 같은 기독교 내 운동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과연 성령의 역사가 100년 전과 동일한 방식으로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가? 오히려 평양 대부흥 운동은 초기 20세기 초 한국적 상황에서만 일어날 수 있었던 독특한 성령의 사역은 아니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21세기에 성령의 역사는 어떤 방식으로 진행될 것인가에 대한 새로운 고민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왜 바울이 초대교회에서 노예해방을 운동을 하지 않았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소수의 기독교인이 존재하던 시대적 상황과 다수의 기독교인 존재하던 시대적 상황은 다를 수밖에 없다고 존 스토트는 대답했다. 지금 한국교회 역시 소수가 아닌 다수 기독인들을 기반으로 서 있다. 이 상황에서 성령의 역사 역시 Bridge Building 과정을 통해서 이해하고 적용해 간다면 성령의 역사가 더 다양한 방면에서 포괄적으로 일어날 것이다.

아무튼 한국교회처럼 성령운동이 무분별하게 진행되어 온 상황에서 존 스토트의 성령론은 대중적으로 쉽게 다가갈 수 있으며 균형 잡힌 신학적 틀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한국교회를 건강하게 세우는 데 유익함을 줄 것으로 믿으며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