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존 스토트

존 스토트 성령론(2) / 이은창

새벽지기1 2016. 3. 27. 22:12


2)성령 세례는 보편적 축복의 약속


존 스토트는 성령 세례가 새로운 시대의 독특한 축복이면서 구약과 달리 중생한 모든 신자에게 임하는 보편적 축복이라고 말한다. 베드로가 오순절에 인용했던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행2:17)라는 요엘서 말씀에서 요엘 선지자를 통해 주신 약속의 강조점 역시 성령이라는 선물의 보편성이다.


구약 시대에는 모든 신자가 중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은 특별한 때에 특별한 사역을 위해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임하였다. 하지만 이제, 모든 믿는 사람은 성령의 축복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늘 성령이 함께 하게 되었으며, 이 모든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가능하게 된 것이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행2:38-39) 오순절 베드로 설교의 결론은 주 우리 하나님이 부르시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성령 세례의 약속이 해당된다는 것을 말해 준다.


3)오순절의 단회성과 오늘날의 표준


  오순절파와 개혁교회가 성령 세례와 관련해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는 부분이 바로 오순절의 성령강림(행2장)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성경에 등장하는 성령 세례 중 유일하게(오순절파와 개혁교회 모두가 인정하는) 중생과 성령 세례 사이에 시간적인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존 스토트는 오순절 사건이 갖는 특수한 역사적 상황과 성령 세례에 대한 이후의 표준을 구별하지 못하는 데서 발생하는 문제로 생각한다.


즉, 오순절에 성령 세례를 받은 후 두 그룹의 사람들이 나오는데, 처음에 나오는 120명과 뒤에 나오는 3,000명이다. 이 두 그룹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존재한다. 120명은 이미 중생한 사람들로서 열흘 동안 하나님을 기다린 끝에 성령의 세례를 받은 반면 3,000명은 불신자들이었다가 죄사함과 성령의 선물을 동시에 받았다. 이 120명과 3,000명의 두 그룹을 구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데, 오늘날의 표준은 첫째 그룹이 아니라 둘째 그룹인 3,000명의 경험이 더 정확한 것이기 때문이다.


120명의 경험이 오늘날 나타나는 성령 세례의 표준과 달리 중생과 성령 세례가 분리되어 나타난 것은, 예수님의 죽음, 부활, 승천에 이어서 오래 전부터 약속되어 온 성령의 부어 주심이 예수님의 구속 사역의 마지막으로 나타난 역사적 특수성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 시대의 도래는 구세주의 죽음, 부활, 승천이 반복될 수 없는 것처럼 반복될 수 없는 사건이라고 존 스토트는 주장한다.


  따라서 120명의 경험 이후 3,000명의 회심은 죄사함과 성령 받음이 동시에 나타나며 이러한 현상들을 오늘날의 표준으로 보아야 한다. 물론 과거 교회사에서 ‘부흥’이나 ‘성령의 능력’이 이례적으로 역사에서 이어져 왔지만 그러한 현상을 표준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4)사마리아인 신자들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을 받지 않고도 신자가 된 것처럼 보이는 본문이 두 곳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사도행전 8:5-17이다. 전도자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하자 많은 사람들이 믿고 세례를 받았다. 이 본문 역시 많은 논란이 불러일으킨다. 오순절파는 이 본문을 중생과 성령 세례의 시간차를 보여주는 사건으로 인식하지만, 서철원 교수는 이 본문에서 마술사 시몬을 포함해 사마리아들까지 성령 세례를 받지 못했으므로 온전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말한다.1)


존 스토트는 이 사건을 중생과 성령세례가 분리되어 나타난 것으로 해석한다. 다만 그는 이 사건을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는 말씀에 비추어 사마리아가 갖는 독특한 상황의 문제로 인식한다. 즉 오순절파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빌립을 통해 회심한 사마리아인들의 믿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다만 사마리아가 갖는 역사적 특수성에 비추어 베드로와 요한 두 사도가 그들을 방문해 회심의 진정성을 인정하고 확증할 때까지,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성령의 선물을 보류했다는 것이다. 즉, 이 경우도 오순절의 성령강림처럼 역사적 정황에서 생겨난 특별한 사건이기 때문에 일회적이며 다시 반복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오늘날 이 사건 역시 우리의 표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5)에베소의 제자들


두 번째의 예외적인 사건은 사도행전 19:1-7에 묘사되어 있다. 바울은 그의 3차 여행 중 에베소에 이르렀고, 어떤 제자들을 만난다. 그리고 바울은 그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2절)고 묻는다. 그러자 그들은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다”(2절)고 말한다. 그러자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고 그들이 방언도 한다(6절).


오순절파는 이 말씀을 중생 이후의 성령 세례에 대한 후속적인 경험에 대한 근거로 사용한다. 그러나 존 스토트는 이 말씀이 그런 견해를 지지하는데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바울이 세례를 주고 안수했을 때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문제는 그들이 그 전에 그리스도인이었는가 하는 것이 문제다.


바울이 처음 그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었던 질문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들의 믿음의 진실성을 의심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믿는 자들은 성령을 받는다고 일관되게 가르친 바울은 이런 질문을 처음부터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성령 세례를 받지 않고 오히려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은 것으로 보아 그들에게 붙여진 제자라는 표현 역시 아볼로와 세례 요한의 제자들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들은 분명 회심한 그리스도인들이 아니었다. 그들의 회심은 오히려 바울이 안수하고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는 순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존 스토트는 말한다.


6)세례라는 용어(고넬료의 회심)


사도행전 8장과 19장의 특별한 경우에 의해서도 부정되지 않았던 것은, 성령의 선물은 그리스도의 시초적인 경험이기 때문에 또한 보편적인 경험이라는 점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할 때 성령을 받는다. 그리고 ‘성령의 세례’는 ‘성령의 선물(중생)’과 동의어로 사용되며 ‘세례’라는 개념 자체에는 입문을 뜻하는 의미가 있다.


이것은 고넬료 사건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고넬료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것은 그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것, 곧 그의 회심이었음이 분명하다. 베드로는 그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는 죄사함의 약속으로 끝을 맺었다.(10:43) 고넬료와 그의 온 집이 믿고(15:7) 성령과 물로 세례를 받은 후에,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고 묘사되어 있다(11:1). 하나님은 “그들에게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고”(11:18),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셨다”(15:9)고 성경은 말한다.


성령의 선물의 시초적인 성격은 ‘세례’라는 용어가 시사한다. 또 고넬료의 회심이 예증하듯이 ‘성령 안에’ 있는 것, 성령을 ‘가진 것’, ‘성령으로 사는 것’, 그리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 등은 믿음의 성숙도와 관계없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새롭게 출생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똑같이 적용되는 표현들이다.(롬8:9; 갈5:25; 롬8:14) 그리고 존 스토트는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시는 것을 당여하게 여기며,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권면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7)고린도전서 12:13


성경에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 시초적인 경험이라는 것을 확증해 주는 표현과 관련해서 일곱 개의 구절이 등장한다.(마3:11; 막1:8; 눅3:16; 요1:33; 행1:5; 행11:16) 그리고 일곱 번째 표현은 복음서와 사도행전 이외의 유일한 본문인 고린도전서 12:13이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앞에 언급한 여섯 구절과 관련해서는 전부 성령 세례의 주체를 예수 그리스도로 간주하고, 그 결과를 성령 세례로 인식하지만, 고전 12:13의 경우 성령 자신을 세례자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성령 자신이 세례자로 나타난다면, 그 분이 사용하셔서 세례를 베푸시는 ‘요소’는 무엇이란 말인가? 세례의 은유에서는 절대적으로 ‘요소’가 필요하기 때문에 요소가 없는 세례는 존재할 수가 없다. 따라서 이 구절 역시 다른 구절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세례자료 여겨야 하며, 세례의 요소를 ‘성령’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