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을 구원하는 효과적인 부르심과 회심
1. 효과적인 부르심
복음의 진리가 있으며,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그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 바로 성령님의 사역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살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일반적 소명-복음의 우주적인 제시-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그런 외적 혹은 일반적인 소명이 모든 이들에게 제공되지만 어떤 사람은 구원받은 자들로 남아있게 되고 또 다른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로 또한 남아 있다는 사실로 인해 어떤 새로운 구분이 분명하게 들어옵니다.
따라서 다음의 질문에 대하여 이제 우리가 살펴 볼 것입니다. 이런 두 집단 사이에 있는 차이점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는, 제가 보기에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복음의 소명(부르심)이
일부 사람들에게만 효과적이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로 언급되었던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은 두 집단으로 나뉘었습니다. 한 집단은 자신들이 주님을 다시는 듣지 않을 것이라고 결정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떠나 집으로 갔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아직 떠나지 않은 다른 이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베드로가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요6:67-68)
완전히 동일한 것을 들었으면서도 한 집단은 불신하며 집으로 돌아갔고, 다른 집단은 주님과 함께 남아서 더 듣기를 원했고 그것을 즐겼습니다. 이런 차이는 무엇이 만들었을까요?
이런 방법으로 신자들의 경우에서 말씀은 효과적이었고 그 말씀을 거절한 불신자들의 경우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효력있는 소명에 대한 성경의 진술 이것은 아주 분명한 것입니다. 외적 소명에 더하여 이런 효과적 소명이 있다는 것과 구원받아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효과적인 소명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확립하는 성경 말씀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첫째, 로마서 8:28-29은 바로 이것에 대한 위대한 진술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라고 바울은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선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만 그렇습니다.
그들은 누구입니까?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여기서 구원받은 자들을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 성경 진술이 바로 효과적인 소명입니다.
둘째, 고린도전서 1:2에서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 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그들은 단순히 성도들이라고 불려지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되기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던 자들입니다.
그리고 동일한 장에서 사도 바울은 이것을 반복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 그리고 주목하십시오 -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3-24)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어리석음인데, 바로 이들이 구원받지 못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들을 사도는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셋째, 사도 베드로에 의해서 주어진 위대한 진술을 봅시다. 그는 그리스도인 신자들을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벧전 2:9)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러 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을 효과적으로 부르셨던 것입니다.
넷째, 요한복음 6장 45절에서도 다음과 같은 진술을 봅니다.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에게 이런 정보를 주셨고 그들은 그것을 기록하였습니다.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단지 사람만이 아니라 그것과 더하여 하나님에 의해서 즉 성령님에 의해서 가르침을 받을 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내적인 역사는 이런 이들에게만 발생합니다.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45절)
여러분들은 그리스도께 왔던 자들은 하나님께 가르침을 받았던 자들, 성령님에 의해서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자들 뿐임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핵심적인 진술입니다. 63-65절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주님께서는 계속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이런 말씀에 더하여 요한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그들은 외적 소명에 대해서는 반응을 보였고 자신들을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증거가 여기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가르침 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껍질, 즉 외적인 말씀만 가지고 있었을 뿐 영은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외적 소명에 반응을 보였고 외적인 말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편집자)
요한은 계속 이렇게 증거 합니다.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아버지께서 이런 자들에게 내적 소명을 주시지 않았기에 그들은 주님께 올 수 없었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 내적 소명을 받은 다른 이들은 남아서 그것을 즐거워했습니다.
다섯째, 에베소서 1:17절.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을 위하여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달리 말하자면,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성령을 주시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그분의 지식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에베소서 2:8절.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또한 빌립보서 2:12-13절에서도 바울은 동일한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하나님께서 내적인 사역을 행하시며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행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1:5에서 바울은 이것과 관련해서 한 중요한 진술을 합니다.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의 아는 바와 같으니라”
만약 여러분들이 지금 이 서신서를 읽는다면, 특히 앞의 두장을 읽는다면, 사도는 이것을 다른 방법들로 반복하여 진술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사도는 그들이 자신들에게 온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살전 2:13) 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가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고 말한 것은 무엇을 의미했을까요?
물론 복음은 사도가 전했던 그 말들로 왔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에 있는 이방인들로 교회로 돌아오게 한 것은 그 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럼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내적인 역사로 바로 죄인들을 성도로 변하게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능력과 성령의 나타남으로 된 설교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없다면 당신은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니며 구원받지 못했읍니다.-편집자)
진실로 사도는 디모데후서 2:25에서 매우 비슷한 진술을 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그는 젊은 디모데에게
거역하는 자들을 어떻게 훈련할 것인지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바울은 디모데가 이런 거역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지도하는지를 알기 원했고 그래서 이렇게 하라고 그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했습니다. “너는 너 자신의 주장이나 논리로 그들을 확신시킬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제안한다. 그들 속에서 하나님이 이런 역사를 하시지 않으신다면, 그들은 결코 진리의 지식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면, 그들은 그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진실로 복음서에서 한번 이상 이런 진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인용했던 한 구절에서 다음과 같은 진술이 있습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22:14)
이것을 결혼 잔치라는 상황에서 특별하게 보십시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다.”-이것은 외적인 부르심입니다.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이것은 효과적인 부르심입니다.
다른 진술 이것을 완전하게 진술하는 다른 주장이 있습니다. ‘교회’라는 용어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리스도 교회의 회원들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 용어는 무엇과 연결되어 있습니까? 교회라는 단어는 헬라어 에클레시아를 번역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에클레시아는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란 의미입니다. 교회는 부르심을 받아 그 결과로 분리된 자들의 모임입니다.
베드로가 말한 것과 같습니다.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바로 교회라는 용어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 자체가 효과적인 부르심으로 인한 어떤 것이 있다는 진술을 성립하기에 충분합니다. 왜냐하면 그 동일한 메시지가 다른 이들에게 갔으며, 그 결과 그들이 세상으로부터 교회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외적 소명과 내적 소명이 차이 외적인 부르심과 이런 효과적인 부르심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그 대답은 이런 부르심은 내적, 영적 부르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외부로부터 어떤 사람을 부르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물론 이런 모든 사람을 부르는 외적인 소명이 있어야 하지만,
그것에 더하여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며 효과적인 소명이 되게 하는 내적인 소명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외적인 소명과 내적이며 영적인 소명 사이에는 이런 대조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살필 다음 단계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자들이 효과적으로 부르심을 받고 있으며, 그렇게 효과적으로 부르심을 받는 이유는 바로 그들 내부에 있는 역사 때문이라고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다음과 같이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들이 왜 있습니까?" 이에 대한 대답은 절대적으로 본질적입니다. 이런 내적인 역사가 없이는 누구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이것에 대하여 증거를 제시하고 싶습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롬 8:5)
자연적인 사람들-"육을 따라 난 자들"-은 성령의 것들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그런 일들을 미련하고 따분하며 재미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은 그런 성령의 일들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여
그런 일들을 미워합니다. 그러나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들에 관심을 갖습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이것이 마지막 주장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롬 8:6-7) 이것은 매우 강력한 진술이지만 그것은 사실입니다.
사람은 타락의 결과로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께 적대적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 8:7-8)
제가 볼 때 이것이 바로 최후의 진술입니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미워하며 그분에 대하여 관심이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2:14절에 있는 유명한 진술을 봅시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이것은 한 범주적인 진술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돌연히 철학자가 되어 이렇게 말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좋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제가 이것 혹은 저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의 진술들을 살펴봅시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는 것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기술할 수 없는 목적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만약 이런 범주적 진술에 반대하여 우리의 이해와 철학을 앞세우는 어리석은 일을 한다면, 그 때는 어두움 가운데 남아 있기에 합당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는 그런 생각으로 성경을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딤전3:16)
그리고 특히 이런 면에서 그렇습니다. 여기에 자연인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데, 더 정확하게는 그들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런 것들은 바로 영적으로 이해되고 판단되며 분별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4:3-4의 진술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바울은 어떤 사람들에게 복음이 가리워졌다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말합니다. 즉 그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안에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것은 모독합니다. 그들은 그것을 비웃습니다. “만일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누가 그들입니까? 그들은 바로 “이 세상 신(마귀)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혼미케 하였는데”그런 미혹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들이 믿을 수가 없는 이유는 사단이 그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4:4)
고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1절에서 다음과 같은 진술을 발견합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죽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것보다 더 강력한 어떤 것도 가질 수 없습니다. 이런 모든 진술들은 소명-외적이며 일반적인 복음의 소명-이 효과적이 되기 이전에 성령의 내적 사역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입증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말하고 있는 효과적이며 내적인 소명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것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그리고 이것은 성경 구절들의 빛으로 볼 때 참으로 필수적임이 틀림없습니다.
- 영혼 안에서의 성령의 능력의 역사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안에서의 성령님의 직접적인 작용입니다. 그것은 직접적이며, 영적이며, 초자연적이며, 그리고 기적적입니다.
사람들에 있는 성령의 작용은 깊은 곳에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자연적인 능력들과 힘들을 단순히 밝혀주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 이상입니다. 내부의 영혼에서 우리 안에서 영적 행동의 새로운 원리를 창출하시는 것은 바로 성령님의 역사하심입니다.
어떤 이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당신이 알다시피, 나는 이것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모든 철학자들과 과학자들 그리고 이런 모든 정치가들 그리고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그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으로 우리가 그것을 완전하게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장 위대한 자연적인 지식인이라도 이것을 받을 수 없는 것은 그가 바로 '자연인'이기 때문입니다. 한 위격 안에 있는 두 본성, 삼위일체에 관한 현저한 교리, 성육신과 대속의 모든 교리 등에 관한 이 놀라운 진리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에게 영적인 능력이 필요합니다.
이 진리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에게 영적인 능력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영적 진리이기 때문에,
바울이 말한 것처럼 자연인에게 그것은 완전히 어리석은 짓입니다.
사도행전 6:14절에서 한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다른 많은 사람들이 들었던 것처럼 그녀도 들었습니다. 사도는 앉아서 말씀을 설교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외적인 소명이었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복음, 즉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들과 그 사실들의 의미를 전했습니다. 그는 이 말씀의 모든 것을 전했고 들었던 사람들 중에 루디아란 여성이 있었는데 그녀 역시 이것을 들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교회에서 혹은 공적 예배시간에 많은 이들이 선포되는 복음을 듣습니다. 그러나 그 중 많은 이들이 불신의 상태로 집으로 돌아가고 불신자로서 죽어갑니다. 그런데 루디아에게는 어떤 일이 발생했습니까? 주목하십시오!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말씀은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말씀이 선포되는 동안 그들은 다른 사람을 바라보거나, 혹은 자신의 책에 무엇이나 쓰거나 시를 암송하거나 혹은 서로 바라보며 웃음을 보내고 있는지 모릅니다만 그러나 그들은 복음에 주목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복음에 주목할 때까지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루디아는 무엇에 주목했습니까? 그 대답은 이것입니다. "주께서 그 마음을 여셨다." 주님께서 그녀의 마음에 무엇인가를 두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적인 역사인데, 그 결과로 그녀는 주목했고, 복음을 보았으며 그것을 영접했습니다.
외적인 소명이 내적인 소명이 되었습니다. 일반적인 것이 효과적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믿었고 세례를 받았으며 그녀의 집 역시 그리했습니다. 이것은 명백합니다. 그녀의 마음을 여셨던 분은 바로 주님이셨고 그것이 바로 차이를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없었다면 그녀는 결코 믿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성령님의 역사란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도록 우리 안에 성령님께서 한 원리를 심으신 것을 의미합니다.
즉 내 생애 처음으로 이런 영광스럽고 놀라운 진리를 분별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나의 의지에 역사하십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3)
그분께서는 우리를 때리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는 구타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그렇지 않으심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 분께서는 내 의지에 역사하셔서 나로 하여금 그런 것들을 원하고 즐거워하고 나아가 사랑하게 하십니다.
그분은 인도하시며, 설득하시며, 내 의지에 그런 방법으로 역사하셔서 복음의 소명이 효과적이 되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은 확실하며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결코 실패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 안에서 역사하실 때 그 역사는 효과적입니다.
2. 돌이킴(회심)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에 모든 남녀는 죄악으로부터 나와야 하며 또한 다른 조건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우리는 모두 죄악 중에 출생하였고, 죄 중에 잉태되었습니다.(시51:5)
우리는 모두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했던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습니다.(엡 2:3) 우리 모두는 원죄와 죄책을 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돌이킴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것에 대하여 아주 분명합니다.
따라서 그 다음의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돌이킴(회심)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돌이킴의 집행자는 누구입니까? 가장 먼저 주요한 것은 성령님의 사역인데, 성령님께서 그것을 효과적인 부르심을 통하여 행하십니다.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행20:21) 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돌이킴입니다. 이것들이 바로 돌이킴에 있어서 유일한 본질적인 요소들입니다.
회개이며 믿음입니다. 순간적이든 점진적이든 그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회개가 그곳에 있어야 하고 또한 믿음이 그곳에 있어야 합니다. 만약 하나가 없다면 그것은 돌이킴이 아닙니다.
둘은 본질적입니다. 이 시점에서 제가 질문을 하나 할까 합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어떤 순서로 왔습니까?
회개입니까? 믿음입니까? 지금 이것은 매혹적인 질문입니다. 회개 이전에 믿음이 온다는 그런 감이 있지만, 저는 그것을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제가 믿음에 대하여 말씀드릴 때, 저는 그것을 사도 바울이 사용한 그런 의미 -일반적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로 사용합니다.
여러분이 회개할 수 있기 전에 일반적인 믿음이 있었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이 하나님에 관한 어떤 것들을 믿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은 그것에 어떤 반응도 보일 수 없고 회개는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특별한 의미에서 믿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 회개는 믿음 이전에 오고 따라서 바울은 이런 순서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
왜 회개가 먼저 와야만 합니까? 여러분들은 이것이 항상 처음에 온다는 것을 성경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약에서 최초의 선포자는 누구입니까?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까? 그는 무엇을 선포했습니까?
바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막 1:4)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선구자의 그 메시지였으며, 선구자에게는 항상 처음에 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선포자는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복음서를 살펴보신다면, 주님께서 백성들에게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고 한 말씀하신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세례요한과 완전히 동일하게 주님께서는 회개를 가장 먼저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면, 베드로는 무엇을 가르쳤습니까?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오순절 날의 위대한 설교를 봅시다. 베드로는 설교했고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다음과 같은 것이 베드로의 응답이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2:38) 제가 이미 인용한 것처럼, 회개는 사도 바울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는 회개로부터 그렇게 했습니다,
그는 아덴에서도 그렇게 했습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행17:30) 회개는 필수적으로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확실하게 그렇게 되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성경적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들에게 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제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기를 원합니다. 왜 사람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만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물을 것입니다. “왜 나는 그 분을 믿어야만 합니까?” 그것은 완전히 공정한 질문입니다. 만약에 사람들이 회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면,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의 필요성을 보지 못합니다.
물론 여러분들은 그리스도를 그들의 한 동역자, 혹은 한 친구, 혹은 몸의 한 치료자로 초청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돌이킴은 아닙니다. 그런 것은 결단코 돌이킴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만 합니다. 율법은 우리의 몽학 선생으로(갈 3:24)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곳에 이르게 하고, 회개토록 역사합니다.
달리 말하면, 돌이킴의 중요한 점, 즉 기독교 구원 전체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우리를 하나님과 바른 관계로 이끄는 것입니다. 왜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까? 왜 그분은 죽으셨습니까? 그 대답은 우리를 하나님께 이끄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당신은 성령의 효과적인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회심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까?
마틴 로이드존스의 ‘성경교리 강해’ 중에서
'좋은 말씀 > 로이드 존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로이드 존스 - 티와 들보 (0) | 2016.01.09 |
---|---|
[스크랩] 로이드존스 목사와의 첫 만남(박영선목사님) (0) | 2016.01.08 |
[스크랩] 변하는 사상 불변하는 진리 / 마틴 로이드 존스 (0) | 2016.01.05 |
[스크랩] 차별이 없는 교회 / 마틴 로이드 존스 (0) | 2016.01.04 |
[스크랩] 영들을 시험하는 방법 : 궁극적인 시금석 / 마틴 로이드 존스 (0) | 2016.0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