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동식목사 852

예배의 주권

예배의 주권 예배는 국가의 결정으로 드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국가는 예배에 관한 결정 권한이 없습니다. 예배는 철저하게 교회에 속하여 있습니다. 이것이 종교의 자유를 정하고 있는 헌법의 정신입니다. 국가의 한계선은 공정하게 사회를 다스리고 질서를 유지하고 국민을 보호하고 예배를 보호하는 일입니다. 국가가 이 한계선을 넘으면 전체국가나 왕정국가로 전락합니다. 예배는 교회의 영역입니다. 교회가 공동체 예배를 할 것인지, 가정 예배를 할 것인지 결정합니다. 국가가 예배의 영역에 참여한다든지, 교회의 소리를 재갈 먹이려고 할 때 국가는 한계선을 넘은 것입니다. 예배는 교회만이 그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배에 대한 강제와 압박을 통하여 관리하고자 할 때 국가는 자신의 권한에서 이탈하는 일이 ..

죄의 자리에서 도망칩시다.

죄의 자리에서 도망칩시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을 의인이라고 말합니다. 의인이란 단지 올바른 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의롭게 된 자입니다. 의롭다는 것은 법률적인 의미로 재판에서 무죄로 인정된 자를 의미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죄 없는 자로 여겨주심을 입은 사람을 의미합니다. 의롭게 되는 것은 사람의 행위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이 되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고, 그 은혜를 받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복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비교할 수 없는 복을 받은 것입니다. 이러한 자부심이 예수 믿는 우리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세상은 보이는 것으로 비교하고 판단하며 결정합니다..

의인의 복을 즐깁시다.(1)

의인의 복을 즐깁시다.(1) 시편이 아름다운 것은 첫 시작에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으로 시작되는 시편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시편의 문을 열 때마다 자부심이 생기고 힘이 납니다. 내 자신이 복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종종 우리는 삶을 비관할 때가 있습니다. 이러려고 살았나, 이러려고 교회 다녔나. 이러려고 애들 키웠나, 이러려고 회사에 충성했나 등 다양한 이유로 삶에 대하여 속상해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존감이 엄청나게 떨어질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면 우울함이 스멀스멀 식도를 타고 올라오기도 합니다. 그러면 만사가 귀찮아 지고, 자신을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시편기자는 그러한 나를 향하..

거룩한 교회였는가?

거룩한 교회였는가? 2017년은 특별한 한 해였습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한 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나라 적으로는 엄청난 변화의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권력이 얼마나 무상한 지를 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나라냐”는 촛불 민심은 불의한 권력자들이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오랜 시간동안 권력을 휘어잡았던 일단의 세력들이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정부가 예정이 없이 시작되었습니다. 새 정부의 적폐청산은 국민들의 호응가운데 신속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더구나 올해는 1987년 민주화 운동이 절정을 이뤘던 30년이 되는 해입니다. 박종철 고문 사건과 이한열 형제의 죽음은 군부 독재를 허무는 신호탄이 되었..

성육신의 날을 기념합시다

해마다 우리는 성탄절을 지킵니다. 성탄은 말 그대로 거룩한 탄생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해마다 12월 25일을 예수님의 생일로 지킵니다. 이것은 교회의 전통이지 정확한 날짜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 땅에 오신 주님, 베들레헴에 사람의 몸으로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신 날이 분명히 존재함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 날이 언제인지는 여전히 논란이 있지만 12월 25일은 교회의 전통으로 지켜왔습니다. 고대의 이 날은 태양신을 섬기는 날이었지만 믿음의 선배들은 이 날을 예수님의 오신 날로 선포함으로 더 이상 태양신을 섬기는 것을 없애 버렸습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선배들이 새벽마다 치성을 드렸던 선조들의 행위를 바꾸어 새벽예배를 드렸던 것과 같습니다. 하루 첫 날에 하나님을 예배함으로 시작하자는 순수한 신앙이 새벽예배를..

믿음은 실체화 될 때 사실이 됩니다.

믿음은 실체화 될 때 사실이 됩니다. “믿음으로 삽시다. 믿음이 중요합니다.” 이런 말을 자주 하고 듣습니다. 어디에 두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현실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에 대한 정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신뢰와 확신입니다. 이것이 하나가 되어서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갑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정의에서만 맴돌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정의에 대하여 선명하게 알고 있다면 삶에서 실체화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믿음이 현실이 될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 나타나지 않는 믿음의 정의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것은 권투 선수가 링에 올라서 허공을 치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런 영향력도 없고 가치도 없습..

변함없는 사랑을 하려면

변함없는 사랑을 하려면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뜨끔 뜨끔 합니다. 처음 사랑을 잃어 버린 것에 대한 결과가 무섭기 때문입니다. 처음 사랑을 회복하지 않으면 그 끝은 슬픔으로 가득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처음 사랑을 유지하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애쓰고 수고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처음 사랑을 누릴 수 없습니다. 가끔씩 결혼 주례를 부탁하러 오는 친구들을 봅니다. 그 얼굴들이 얼마나 환하지 모릅니다. 그리고 결혼을 하고 싶어서 결혼 공부에도 열심히 참석합니다. 그래서 결혼을 합니다. 결혼식장에서 만나는 얼굴은 얼마나 밝은지 모릅니다.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습니다. 화사한 드레스와 양복은 선남선녀의 미래를 밝게만 보여줍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이혼 통계를 보면 신혼여행 직..

관계를 허무는 일

관계를 허무는 일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 특권을 가진 자임을 말씀하였습니다.[벧후1:4]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자존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 자만이 하나님 나라를 상속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영광을 영원히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일입니까? 우리의 가진 것의 유무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선물입니다.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다는 것을 생각만 해도 흥분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지 흥분과 감사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요구합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해체가 진행된 시대를 살아가는 길

해체가 진행된 시대를 살아가는 길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절대적 기준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상대적 가치에 치우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가치를 비판합니다. 자신이 결정하지도 않은 기준을 강요한다고 저항합니다. 예를 들자면 성이라는 것이 남성과 여성으로 나눈 것에 대하여 의심하고 저항합니다. 그래서 남성과 여성과 젠더라는 사회적 성을 사용합니다. 젠더는 생물학적으로는 남성이라고 할지라도 여성으로 살고자 할 때 붙여주는 성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남성과 여성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을 버려야 한다고 합니다. 또한 가족의 가치도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가족이라는 의미를 부모와 자녀의 혈연관계라는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족개념을 해체하고 다시금 개념정리를 해야 한다..

작은 교회가 희망임을 보여야 합니다.

작은 교회가 희망임을 보여야 합니다. 종교 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에 한 대형교회의 목회자 세습으로 인하여 시끄럽습니다. 세습이 무슨 문제냐는 말에서부터 세습은 교회를 허무는 사악한 일이라는 소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목소리가 존재합니다. 그래서 JTBS뉴스의 앵커 브리핑에서 “이스라엘에서 시작된 교회가 로마로 와서는 문화가 되었고, 미국으로 가서는 기업이 되었고, 한국에 와서는 대기업이 되었다.” 고 하였습니다. 이는 쿼바디스라는 영화에 나왔던 한 대사를 인용한 것입니다. 한국 교회의 부끄러운 민낯을 제대로 보여주었던 대사입니다. 이제 대한민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속상하고 부끄러운 일이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단지 목사들의 문제로 치부할 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