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이 에베소를 떠나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준비를 합니다. 그러면서 후에는 로마도 가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디모데와 에라스도를 보냅니다.
바울이 계획을 잘 준비하고 있는 시점에 에베소에서 소동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에베소에 있는 아데미 신전을 통하여 장사하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아데미 신전과 제우스 신전에 필요한 우상도구를 팔아서 사는 데메드리오라는 사람이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 인하여 재정적 손해를 보았다고 고발합니다.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라는 바울의 증거에 사람들이 인정하자 장사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데메드리오와 함께 우상을 만드는 이들은 사람들을 선동하여 에베소 극장에 모이게 합니다. 에베소 극장은 매우 큽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바울과 동지인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잡고 극장으로 데리고 갑니다. 바울은 이러한 상황에 함께 들어가고자 하였지만 다른 동료들이 막아서 들어가지 않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은 모인 사람 태반이 왜 모였는지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의 선동에 아무 생각없이 몰려온 것입니다. 이 장면이 많은 생각을 합니다. 교회를 비판하는 태반이 예수님을 모릅니다. 단지 보이는 것에 부화뇌동 할 뿐입니다. 사람들은 모여서 두 시간이 소리를 치고 시위를 합니다.
이때 에베소의 서기장이 나와서 문제를 해결합니다. 바울과 동료들이 불법을 행하지 않았음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문제가 있다면 데메드리오와 함께 한 사람들이 정식적으로 민회를 통하여 제소할 것을 요구 합니다.
불법집회에 대한 책망이 있을 것임을 말하자 사람들이 흩어집니다. 그렇게 외치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불법을 알고 흩어졌습니다.
복음을 전하면 이러한 현실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진리로 받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논리로 받아들입니다. 요즘 기독교 학교나 교회들이 우상숭배하는 이들에게 팔아 넘겨주는 것을 볼 때 참으로 씁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제 논리가 모든 신앙논리를 집어 삼킵니다.
복음의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쉽지않습니다. 하지만 이 길만이 영광에 이릅니다. 신앙은 경제 논리로 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논리로 다가오는 이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때 단호함이 필요합니다.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닙니다. 오직 삼위 하나님 한 분만이 참 신입니다. 이 사실이 고백되어질 때 믿음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물론 복음과 함께 고난은 받게 됩니다. 오늘도 이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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