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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다는 것(막15:21-32) / 김영봉목사

새벽지기1 2024. 3. 29. 01:38

해설:

십자가에 처형될 죄수는 자신이 달릴 십자가 가로대를 지고 처형장까지 가야 했습니다. 세로대는 처형장에 이미 세워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너무도 혹독한 고문을 당하셔서 그 짐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도무지 안 될 것 같아 보이자 군인들은 구경꾼들 중에서 힘 있어 보이는 사람을 끌어다가 십자가를 대신 지게 합니다(21절). 그는 구레네(아프리카 북동쪽 도시)에서 살던 유대인으로서 유월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와 있던 시몬이었습니다.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라고 명기한 이유는 마가가 이 복음서를 쓸 당시에 두 사람이 믿는 이들에게 알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에 보면 바울 사도가 “주님 안에서 택하심을 받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여 주십시오.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롬 16:13)라고 썼습니다. 구레네 시몬이 우연히 예수님의 십자가를 졌다가 그분을 믿게 되었고, 나중에 그의 아내가 바울 사도에게 큰 도움을 주었던 것입니다.   

 

처형장은 ‘골고다'(‘해골이 많은 곳’)라고 불렸습니다(22절). 십자가에 처형된 정치범들의 시신은 매장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처형장에는 사형수들의 유골이 널려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기 전에 그들은 예수님께 몰약을 탄 포도주를 드립니다(23절).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한 마지막 배려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거절하십니다. 당신이 마셔야 할 고난의 잔을 있는 그대로 당해낼 마음이셨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지고 온 가로대에 못 박히셨고 세로대 위에 올려지십니다. 군인들은 예수님의 옷을 나누어 가집니다. 당시에는 겉옷이 중요한 자산이었기 때문입니다(24절). 때는 아침 아홉 시였고(25절) 십자가 위에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가 걸려 있었습니다(26절). 

 

예수님과 함께 두 강도가 십자가에 달렸습니다(27절). “강도”라고 표현했지만, 실제로는 유다의 해방을 위해 싸웠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십자가 처형장은 사람들이 오가는 대로 곁에 있었습니다. 반란죄가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를 보여 주려는 의도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은 “아하! 성전을 허물고 사흘만에 짓겠다던 사람아, 자기나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려무나!”(29-30절)라고 조롱합니다. 실제로 사흘 후에 그들이 말한 대로 그분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 나십니다. 또한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구나!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는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라.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보고 믿게 하여라!”(31절)고 조롱합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한 것은 그들이 요구한 것보다 더 큰 기적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어떤 이적을 보여 주어도 믿을 수 없을만큼 마음이 굳어져 있었습니다. 예수님 좌우에 달려 있던 사형수들도 그분을 욕했습니다(32절). 하지만 누가복음에서 보는 것처럼, 나중에 그들 중 하나는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분에게 도움을 청합니다(눅 23:39-43). 

 

묵상:

총독 관저에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에 이르는 거리는 그리 멀지 않지만 모진 고문으로 인해 인간적인 에너지가 모두 소진된 예수님은 있는 힘을 다하여 십자가 가로대를 메고 가셨을 것입니다. 그 길에서 몇 번이고 기진하여 쓰러졌을 것입니다. 교회는 고대로부터 “십자가의 길”(The Way of the Cross) 혹은 “십자가의 장소들”(The Stations of the Cross)이라는 전통을 만들어 예수님의 희생을 묵상하는 도구로 사용해 왔습니다. 빌라도 관저에서부터 부활에 이르는 열두 장면을 차례로 거치면서 기도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십자가의 장소들”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곳은 구레네 시몬이 예수님의 짐을 대신 지게 된 곳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순례 왔다가 “재수 없게” 걸려서 예수님의 짐을 대신 져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에게는 복된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는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 그리고 성령 강림의 사건을 거치면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그 믿음은 그의 아내와 두 아들에게도 전해졌습니다. 마가가 이 복음서를 쓸 당시에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은 구레네에서 로마로 이주하여 로마 교회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들을 “주님 안에서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구레네 시몬이 주님을 믿게 된 것은 하나님의 전권적인 택하심이었다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믿게 되는 것은 인간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구레네 시몬이나 바울처럼 전권적으로 선택되는 것처럼 그분을 만나고 믿게 되는 경우도 있고, 니고데모나 삭개오처럼 적극적으로 찾아 나섬으로써 만나서 믿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을 만나고서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산헤드린 의원들이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두 사람도 동일한 처지에서 한 사람은 끝내 예수님을 비난했고 다른 한 사람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에게는 믿는 것이 너무 어렵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너무 쉬워 보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원하시고,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죽으셨고, 성령께서는 모든 사람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다만 각 사람의 기질과 처지와 상황 때문에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는 시점이 다를 뿐입니다. 그것은 누구도 억지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포기하지 말고 기도할 일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할 뿐입니다. 그 사람이 구원 받기를 바라는 마음은 하나님이 더 간절하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