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기석목사

확신이 때론 덫이 된다 (요 7:45-52)

새벽지기1 2023. 10. 14. 06:18

(2023/10/08, 창조절 제6주)

[성전 경비병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돌아오니, 그들이 경비병들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그를 끌어오지 않았느냐?" 경비병들이 대답하였다.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도 미혹된 것이 아니냐? 지도자들이나 바리새파 사람들 가운데서 그를 믿은 사람이 어디에 있다는 말이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지렁이들은 저주받은 자들이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전에 예수를 찾아간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우리의 율법으로는, 먼저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거나,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거나, 하지 않고서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 것이 아니오?" 그들이 니고데모에게 말하였다. "당신도 갈릴리 사람이오? 성경을 살펴보시오. 그러면 갈릴리에서는 예언자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오."]

∎ 설왕설래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팔레스타인 하마스의 미사일 공격으로 이스라엘에 전운이 감돌고 있습니다. 해함도 상함도 없는 세상의 꿈은 여전히 위태롭습니다. 무고한 이들이 희생되지 않기를 빌 뿐입니다. 인간사는 이렇게 복잡하건만 계절은 어김이 없습니다. 이제 완연한 가을날입니다. 한로 절기로 접어들었습니다. ‘가을 곡식은 찬 이슬에 영근다’는 속담이 떠오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그렇게 무르익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초막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가셨던 주님을 둘러싸고 벌어진 사람들 사이의 다양한 갈등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초막절은 유대인의 삼대 순례 명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기본적으로는 한 해 동안의 농사를 돌보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함께 기쁨을 나누는 절기입니다. 여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의 역사적 경험을 덧붙였습니다. 초막절은 출애굽 공동체가 광야에서 초막을 짓고 지내던 때를 상기하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수확의 기쁨을 한껏 누리는 때 오히려 가장 힘겨웠던 시간을 돌아보며 삶의 자세를 가다듬는 것이 지혜라면 지혜이겠습니다.

초막절에는 제단에 물을 부어 바치는 의식도 거행했습니다. 물은 생명과 직결됩니다. 물을 길어 제단에 바친다는 것은 그 생명의 물을 새해에도 공급해달라는 청원일 겁니다. 초막절에 물을 길어 바치는 의식은 이사야서의 예언, 이사야가 예언했던 내용, 즉 “너희가 구원의 우물에서 기쁨으로 물을 길을 것이다”(사 12:3)라는 말씀을 현실 속에서 재현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의례에 참여한 이들은 자기들이 공동 운명체임을 자각하게 마련입니다. 또 초막절에는 성전의 바깥뜰에 있는 네 개의 등잔에 환하게 불을 밝혀놓았다고 합니다. 예루살렘 어디에서나 그 빛을 볼 수 있었을 겁니다. 요한복음 7장과 8장은 초막절에 벌어진 일을 기록하고 있는데, 명절의 마지막 날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이 말한 바와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요7:37b-38)“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 속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8:12)

‘생수의 강물’이나 ‘세상의 빛’이라는 이미지는 바로 초막절을 배경으로 하여 등장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존재 자체가 순례자로 예루살렘에 온 사람들 사이에 화젯거리였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이미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두고 설왕설래가 오갔습니다. 더러는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더러는 ‘무리를 미혹하는 사람’(요 7:12)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먼저 온다고 믿었던 ‘그 예언자’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이 사람은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요 7:40, 41). “갈릴리에서 그리스도가 날 수 있을까?”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성전 체제에서 누릴 것을 다 누리고 살던 이들은 이런 논의 자체를 불편하게 여겼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대제사장들은 성전 경비병들에게 예수를 잡아오라고 명령했습니다(요 7:32).

∎ 현실을 바라보는 두 시선


하지만 성전 경비병들은 빈 손으로 돌아갔습니다. 차마 예수님을 잡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어쩌면 누미노제(Numinose)를 경험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누미노제란 인간이 신비한 경험 앞에 섰을 때 느끼는 경외감을 이르는 말입니다. 신학자 루돌프 오토(Rudolf Otto)는 이런 경험을 ‘신비스럽고 두려우면서도 매혹적인 것’(mysterium tremendum et fascinanas)이라고 소개합니다. 불붙은 떨기나무 앞에 엎드렸을 때의 모세, 보좌에 앉으신 주님과 스랍들을 본 이사야(사 6:1-5)가 느꼈을 법한 경험입니다. 고기잡이 이적을 경험한 후 주님 앞에 엎드려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눅 5:8) 하고 말했던 베드로도 누미노제의 경험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무명의 성전 경비병들도 주님을 보며 경외감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를 끌어오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들은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주님의 어투나 수사학적 기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그들은 주님의 말씀에 가득 찬 에너지를 느꼈던 것입니다. 하지만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들을 꾸짖습니다.

“너희도 미혹된 것이 아니냐? 지도자들이나 바리새파 사람들 가운데서 그를 믿은 사람이 어디에 있다는 말이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지렁이들은 저주받은 자들이다.”(요 7:47b-49)

참 차가운 말입니다. 그들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자기들의 편견에 따라 세상을 바라봅니다. 율법을 ‘안다’ 하는 자부심이 그들을 오히려 보지 못하는 자로 만들었습니다. 나중에 주님은 바리새파 사람들의 시비에 대응하면서 “너희가 눈이 먼 사람들이라면, 도리어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지금 본다고 말하니, 너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요 9:41)고 탄식하셨습니다. ‘안다’ 혹은 ‘본다’ 하는 자부심이 오히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거나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마음이 굳어있기 때문입니다.

앨버트 놀런이 쓴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라는 책에 나오는 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저자는 예수님과 바리새파 사람들을 비교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권위로 삼았지만 바리새파 사람들은 권위를 진리로 삼았다.” 적확한 말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마음에 잇댄 채 사람들을 대하셨습니다. 그것은 늘 애긍의 마음으로 나타났습니다. 주님은 어떤 기준을 가지고 사람들을 재고, 판단하고, 정죄하고, 배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에 비해 바리새파 사람들은 자기들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사람들을 판단했습니다. 자기들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혐오하고, 배제하고, 억압했습니다. 그것이 거룩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거대한 착각입니다. 자기들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성전 경비병들을 일러 ‘율법을 알지 못하는 무지렁이들’이라고 말하며 그들을 저주받은 자라고 말하는 것을 보십시오. 무지렁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오클로스(ochlos)는 주로 ‘무리’라고 번역되는 말이지만, 스스로 거룩하다 여기는 이들이 다른 이들을 속되게 여길 때 사용하던 차별적인 단어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척도에 맞지 않는 이들은 비진리라고 확신합니다.

∎ 낙인찍기의 위험


니고데모는 좀 달랐습니다. 그는 판단을 유보하는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입니다. 그는 요한복음 3장에 이미 등장한 인물입니다. 바리새파 사람이면서 유대 사람의 지도자였던 그는 한 밤중에 주님을 찾아와서 신학적 대화를 나눈 바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고심하던 인물입니다. 그는 자기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세계와 접속할 마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다른 바리새파 사람들의 행태를 불편하게 여긴 그는 이런 질문을 합니다.

“우리의 율법으로는, 먼저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거나,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거나, 하지 않고서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 것이 아니오?”(요7:51)

나름대로 용기를 낸 것입니다. 모두가 한 목소리를 낼 때 이의를 제기한다는 것은 큰 용기를 필요로 하니 말입니다. 니고데모는 재판을 할 때 어느 한쪽 말만을 들으면 안 된다는 신명기 1장 17절을 근거로 이의를 제기한 것입니다. 율법은 말할 기회는 세력이 있는 사람에게나 없는 사람에게나 똑같이 주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반박하기 어려운 전거 제시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있는 이들은 논점을 회피하는데 일에 익숙합니다. 교묘한 비틀기가 일어납니다. 그들은 낙인을 찍어 니고네모를 침묵시키려 합니다. “당신도 갈릴리 사람이오? 성경을 살펴보시오. 그러면 갈릴리에서는 예언자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오”(요 7:52). 그들은 율법 해석의 문제를 장소의 문제로 바꿔놓고 있습니다. 전형적인 논점 회피 전략입니다. 변방 갈릴리가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변방에 대한 중심의 노골적인 무시일 뿐입니다.

낙인찍기가 성행하는 세상은 위험한 곳입니다. 불신이 팽배하고, 생각이 다른 이들의 평화로운 공존은 불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낙인찍기를 즐기는 이들은 품이 작습니다. 예수님은 남을 심판하거나 정죄하지 말라(눅 6:37) 하셨습니다. 주님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스스로 거룩하다 자부하는 이들은 가르고 나누는 일에 익숙합니다. 하지만 참 지혜자는 품이 넓어 함부로 남을 재단하지 않습니다. 노자도 도덕경 58장에서 비슷한 말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성인은 방정하되 가르지 않고(是以聖人方而不割) 예리하되 찌르지 않으며(염이불귀廉而不劌), 솔직하되 멋대로 하지 않고(직이불사直而不肆), 빛나되 눈부시지 않는다(광이불요光而不燿).”

바리새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이 가르고 나누는 일에 몰두하였다면, 예수님은 품고 연결하는 일에 집중하셨습니다. 에베소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분리의 담을 허물어 서로 소통하도록 하셨다고 고백합니다. 지금 성도들과 이 땅의 많은 교회가 예수의 길을 버리고 바리새파의 길을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바다가 모든 계곡과 강물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가장 낮은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사람을 당신 품에 안으셨습니다.

∎ 품이 된 사람


요한복음 8장은 별개의 사건처럼 보이지만 요한은 이 에피소드를 의도적으로 여기에 배치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른 아침에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시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주님은 자리에 앉아서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때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간음하다가 잡힌 한 여인을 끌고 와서 주님께 물었습니다.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런 여자들을 돌로 쳐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뭐라고 하시겠습니까?”(요 8:4-5)

전형적인 함정질문입니다. 율법대로 하라고 하면 그 동안 사랑을 가르쳐온 예수님이 자가당착에 빠지게 되고, 놓아주라고 하면 율법을 어기는 격이니 말입니다. 이후에 일어난 일을 우리는 잘 압니다. 예수님은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뭔가를 쓰셨습니다. 함정 질문이 제대로 작동되었다고 판단한 그들은 빨리 대답을 하라고 다그쳤습니다. 이윽고 몸을 일으키신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그들은 나이가 많은 이로부터 시작하여, 하나하나 떠나갔습니다. 주님은 그 여인에게 “너를 정죄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느냐?” 물으시고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이르셨습니다. 주님은 이 여인까지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하셨습니다.

바울은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고전 8:1a)라고 말합니다. 전문가들은 율법의 조문은 잘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율법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읽지는 못했습니다. 칼은 누구의 손에 들리느냐에 따라 쓰임이 달라집니다. 강도의 손에 들린 칼은 사람을 해칩니다. 외과의사의 손에 들린 칼은 사람을 살려냅니다.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옳다는 확신이 오히려 사람들을 작게 만듭니다. 물론 어떤 일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신념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신념이 다른 사람을 배제하고 심판하도록 한다면 스스로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찬 이슬을 맞고 영그는 곡식처럼 우리도 성숙한 믿음의 사람으로 무르익어 가기를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