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묵상

로마서 묵상[10]

새벽지기1 2021. 7. 23. 06:15

로마서 2 : 17 - 24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어제 주해의 마지막에서 언급했던 것은, 바울이 앞에서 이미 유대인들에 대해 비난했던 것처럼, "그들이 같은 일을 행한다"(1절)는 것을 실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유대인들에게 행한 이러한 비난들이 어떤 의미를 띠l고 있는지 다소의 의문은 이것을 문자적 감각으로 접근해야 할지, 아니면 산상설교(마5:21ff)에서와 같이 그리스도의 급진적인 해석방식으로 접근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 때문에 이방인들 중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참람되이 여김을 받고 있다는 바울의 고소장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말3:8ff)이나 '영적인 간음(호2장)과 같다'라는 은유적인 죄의 표현들이 이방인중에서 거의 어떠한 반응도 일으키지 못하고, 혹은 문자적인 도둑, 간음, 신성모독 등의 말로 명백히 할 수 있었을 방법으로도 그들의 주의조차 끌지 못했기에, 문자적인 해석을 지지하는데 결정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그가 실증할 수 없는 비난을 함으로 그의 처지를 약화시키는 모험을 했으리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마23:14, 25, 마27:18, 막3:6, 행5:17, 40, 행7, 행13:45, 행14:2, 5, 19, 행17:5, 행18:10, 행19:37등과 같은 참조구절들은 유대인의 종교적 완고함과 종종 사악한 방법들로 행했던 범주들의 상황에서 자신들의 추악함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도드(C.H. Dodds)는 "성전 파괴에 앞선 시기에 유대인들의 도덕생활에 가공할 만한 퇴폐함이 있었다는 충분한 증거가 있다. 우리는 바울보다 젊은 세대사람인 요아킴 벤 자카이(Joachim ben Zakkai )의 담화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로마서신보다 10년 이상은 넘지 않은 것으로 여기서 그는 살인과 간음, 성적 사악함, 상업과 법의 부패, 지독한 소수파의 저항들, 그리고 다른 악한 일들이 증가하고 있는 것을 애통해 하고 있다. 바울의 말에는 이방세계의 커다란 도시들로 돌아다니는 교만한 마음을 가진 유대인에 대한 격렬한 분노를 첨가한 기록이 있고, 유대인이란 바로 그 이름이 장사꾼들에 의해 나쁜 방향으로 웃음거리가 되었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주석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경과 동시대의 기록들로부터 빛으로부터 돌아선 유대인들이 율법을 가지지 못한 이방인처럼 그렇게 어두움으로 빠져갔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2 : 25 - 29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제도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판단치 아니하겠느냐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지금까지 바울의 논쟁은 단지 율법의 소유와 부르심의 특권에 대한 유대인의 신뢰가 헛됨을 보여주는 것으로 설계되어진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그렇게 작동하지도 않고, 유대인들을 이방인들로부터 하나님과 다른 관계에 놓을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둘 다 똑같이 행위로 편견 없이 심판 받게 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다시 또다른 변명으로 돌아갑니다. 그것은, 그들 편에서 생각하기를 이방인들로부터 자신들을 구별하고, 다른 범주 안에 자신들을 놓는 가장 결정적인 논쟁은 할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삼으신 언약의 표가 아니었습니까? 그리고, 이것은 그들에게 하나님 안에서 안전지대이며 그들의 수용을 확인하는 것임에 틀림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그들을 이 피난처로부터 끌어내어, 이 외적인 표시로서의 할례가 내적인 실체에 의해 일치 않는 것이라면 무익할 뿐만 아니라, 아무런 효력도 없고, 오히려 반대로 무할례(25절)일 뿐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유대인들이 단지 의식을 수행하고 있다는 그 근거로서, 그들의 불순종에도 하나님께서 그의 눈을 친밀히 하실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오히려, 더욱 중요한 것은 무할례자인 이방인들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 그에게 순종하는 것이며, 하나님은 할례 받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범하는 것을 무할례로서 판단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심중에 깊이 심긴 변명이라는 것은 세례 요한(마3:9)과 예수님의 가르침(요8:39ff)에 그들이 본능적으로 기대고자 하는 것에서 보여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본능적 반응이 그렇게 심하고, 격렬했다는 것은 이것이 그들 가르침의 핵심이라는 일종의 증거입니다. 물론, 그들의 종교생활에 대한 총체적 구조가 문제로 간주되어지는 상황에서, 그들의 불안감과 당황스러움이 그렇게 공격적이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것도 이해는 되어 집니다. 그러나, 애초부터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는 깨달음으로 인한 불안함과 공포가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그 지점이 바로 정확하게 희망이 밝아오는 곳입니다.

로마서 2 : 25 - 29

어제 주해의 마지막에 언급했던 것은 때에 맞는 한마디가 내적인 성격을 희생시켜 외적인 상징으로 너무 크게 강조하는 경향으로 모든 사람에게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세례와 주의 만찬을 여기에서 할례로 대치시켜 보면, 그 양상이 현대적인 것으로 나타내어집니다. 자, 어떤 사람은 성례들에 대해, 특별히 세례에 대해 다른 의견들을 가지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는 우리와 다른 의견들을 견지하고 있는 사람들과 의견이 다르다는 것을 동의함으로 만족하며, 진지하게 자신의 의견을 고수하는 자들을 존중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거기에는 이 주제에 너무 사로잡히게 되는 것과 너무 도를 넘어선 신약증거의 특징을 주고자 하는 심각한 위험이 있음을 생각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보았던 무절제에 대해 슬픔과 애통함으로 이것이 이끄는 결과들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정말로 부드럽고 은혜로와야할 삶에서 잔인함을 낳고, 때때로 영적 교만에 대한 전율할 만한 드러냄을 격려하며, 무엇보다 결과로서 .개인들과 교제가운데 모두 영적 죽음이 옴으로 복음의 진정한 핵심에서부터 너무 멀리 빗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진실한 종교의 본질에 대한 28, 29절에서의 진술은 문자와 영(靈)사이의 대조에 있어 후에 7:6절에서 보여지는 것과 같이, 그리고 특별히 9:6ff에서 이스라엘 안에서 참 이스라엘을 구별하는데 있어 바울에게 매우 중요한 개념으로 간직되고 있습니다. 또한, 빌3:3과 같이 다른 서신 서에서도 진실한 할례는 영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리스도 예수를 기뻐하며, 육신에 대해 아무런 확신도 가지지 않는 그러한 자들에 관한 것이라고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런즉, 사도는 유대주의를 그가 알고 있는 것으로서 한번 속했었으며, 유대인들에게 주어졌었던 거룩한 계시를 근본적으로 오해한 종교로서 폭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가 양쪽 모두에게 선포하고 있는 기독교 신앙이 구약에 대한 참된 해석을 제공했고, 또한 성취되었습니다.

로마서 3 : 1 - 8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페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받는 것이 옳으니라"

질문은 계속 됩니다. 이미 유대인들은 침묵하게 될 정도로, 그들은 바울의 통렬한 논리에 의해 막다른 골목으로 몰려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잇따른 질문들이 바울에 의해 잠잠하게 되어 아무도 더 이상 대답할 수 없을 때까지 제기됩니다. 왜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논쟁을 하려는 것이었습니까? 그것은 오직 그들이 기꺼이 진리에 순종하기를 원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의 문제는 지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도덕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1절과 3절의 처음 두 질문은 좀더 숙고해 보아야할 특징이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메시아의 오심에 직면하여 유대인의 지속적인 불신앙의 신비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고, 그리고 바울도 후반 9장에서 11장까지 여기서 다루는 것보다 더욱 깊게 그것들을 다룰 필요를 발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스스로 가장 간단한 대답으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가장 큰 특권은 그들이 하나님이 스스로에 대한 자신의 특별한 계시인,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에게 마음을 흡족케 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진실한 순종으로 책임져야하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그것이 주권적인 은혜에 의한 것일지라도, 구원에 대해 자동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불신앙(3절)은 말씀이 아무런 효력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거부되어진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5절과 7절에 있는 다른 질문에 대해서 바울은 대답보다는 간과해 버리는데, 우리는 여기서 기독교인의 논쟁에 있어 어떤 질문들은 대답할 가치가 없다는 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결코 질문되어져서는 안될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엉뚱한 말로 우리를 수렁에 빠뜨리고자 하는 신실치 못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서 3 : 1 - 8

바울은 그의 회심 이전에 예루살렘에서 사도의 설교에 의해 공박을 당했을 때, 그리고 그가 증오했던 그 복음이 사실은 아닐까 두려워지기 시작했을 때등, 그의 회심 시절 전에 싸웠던 심한 내적 갈등을 회상하며, 이 구절에서 자서전적인 기록으로 잘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건들에서 여기 세워져 가고있는 요점은 2:25 -29절에 있는 바울의 논쟁이 마치 유대인이 전혀 유대인이 아닌 것처럼 제시되고 있는 듯 한데, 바울에 따르면 유대인이란 것이 전혀 차이를 만들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유대인이라는 것이 그 스스로 구원의 보장이 아니라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특별한 지위는 무엇입니까? '처음은 유대인이요(롬1:16)'라고 한 것은 어떤 특별한 지위를 암시하고 있는 것인데, 지금 본문은 그것과는 대조되는 듯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로 언급하는 것은 상태에 대한 책임들보다는 특권에 대한 선입견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어제 주해에서 지적되었듯이, 이것은 유대인들이 어느 지점에선가 근본적인 착오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3절에서 다음에 제기되는 문제는, 이스라엘의 불성실함으로 손상되거나 무효화된 듯이 보이는 하나님의 신실함에 관련한 것입니다. 이의 제기자는 이것이 그렇게 된다면, 바울의 추론과는 상반되게 가정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암시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셨다는 것은 그들이 반드시 하나님과 모든 것에서 옳바라야만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 유대인이 행한 모든 불성실함이 하나님의 신실함을 더욱 드러냈고, 그것을 더욱 명백히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요점으로부터, 반대들은 논리적으로 더욱 빈약해지며 힘을 잃고, 바울이 최종적으로 그것들을 무시할 정도가 되며, 인류의 죄에 대한 그의 고발은 9 - 20절에 있는 결론에 이르게 합니다.

로마서 3 : 1 - 8

오늘 본문의 논쟁을 현대의 언어로 다음과 같이 바꾸어 볼 수 있습니다. "만약 교회의 회원이 된다는 것이 그 자체로 구원의 보장이 되지 않는다면, 무엇이 교회 일원이 되게 하는 핵심입니까? 만약 기독교 가정에서나 교회의 교제를 통해 양육을 받고 있다면 그것들로 우리를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하고, 우리로 하나님과 올바르게 하는데 충분하지 않습니까? 무엇이 이러한 것들의 유익점입니까?" 대답은 "크고 측량할 수 없는 유익은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성경을 갖고 있습니다. 당신의 손에 당신으로 어떻게 살며, 어떻게 죽어야 할지를 가르치는 그 책이 놓여 있습니다. 그것이 당신이 복음의 복된 소식에 대해서는 결코 들어보지 못한 이방인들을 넘어 소유하고 있는 말할 수 없는 유익입니다. 빛은 당신 주위의 모든 사람에게 비취고 있습니다. 그러나, 명백히 그 책이 사람에게 어떤 유용함이 되기를 원한다면 읽혀져야 하고 이해되어야 하며, 순종해야할 책입니다.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이나 기독교인의 가정에서 자라나는 것, 그리고 기독교적인 영향아래 있다는 것들이, 만약 그것들로 다른 사람에게서와 같이 어떤 사람에게도 그리 큰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것들이 사람들을 더 쉽게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만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은 굳고, 본질적으로 모든 면에서 하나님을 대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의 빛안으로, 그리고 영광스럽게 구원받을 가능성의 범주 내로 인도되어 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기독교적 영향가운데서 양육된 사람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가지고 있는 말할 수 없는 특권입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모든 곳에서 구원에 대해 말하고 있는 그 책을 당신 손에 들고 있을때 정말 심각한 책임이 있다면, 빛을 거부하는 것은 거듭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빛이 세상에 왔으나, 사람들은 빛보다 어두움을 사랑하였도다, 이는 그들의 행위가 악함이라"란 비난입니다.

로마서 3 : 9 - 20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느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우리는 이 구절들에서 바울의 논쟁에 대한 결론에 이릅니다. 9절에 '우리는 그들보다 나으뇨?'라는 문장을 이해하는데 해석상의 문제가 있음을 주의해야 합니다.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한 주석가들 사이의 관점의 차이는 반대되는 번역(그리고 합당한 것으로)인 '우리가 그들보다 못하뇨?'를 더 선호하는 사람들과의 사이에 충분히 오랜 동안 매혹적인 해석으로 내려 왔습니다. 모든 것을 고려해볼 때 권위역 성경의 번역(한글개역과 같음)이 거의 옳은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신분이 더 났고 이방인들과는 다른지에 대해 묻고 있고, 바울은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그가 결론지었듯이,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 죄아래 있으며, 하나님 앞에서 죄있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실제 핵심은 우리가 어떤 것을 택하든, 결론은 그 어떤 경우에도 같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는 구약에서 연속적으로 인용함으로 이것에 대한 성경적 보강증거를 위해 '장과 절'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그들 성경의 판정을 교묘히 피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바울은 그들로 '율법이 말하는 것은 율법아래 있는 그들에게 말하는 것이다' 즉, 이방인들보다는 유대인 자신들 에게라는 것을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성경의 참조구절들은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것이며 '그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이것은 나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비천한 자들과 밖에 있는 자들과 같은 자들에게 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은 너희들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판결문은 그러한 것입니다. 잠시동안 멈추고 우리가 어디에 와 있는지 바라봅시다. 바울은 율법의 행위에 의해 즉,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함으로, 그리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함으로 하나님의 시야에 의롭다함을 받을 육체가 아무도 없다고 확언하고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기록된 것과 같이, "우리는 우리의 최선의 행위로 인한 공력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받을 수 없다' "그러면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우리는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울이 우리에게 간청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복음 메시지로부터 떠나 그가 지금 돌아설 때, 거기에는 오직 한가지 가능한 일이 발생할 수 있는데, 그것은 심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좋은 말씀 >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마서 묵상 [12]  (0) 2021.07.25
로마서 묵상[11]  (0) 2021.07.24
로마서 묵상[9]  (0) 2021.07.22
로마서 묵상(8)  (0) 2021.07.21
로마서 묵상 7  (0) 2021.0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