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묵상

로마서 묵상[9]

새벽지기1 2021. 7. 22. 07:20

롬 2 : 1 - 16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

본문에 나타나 있는 심판의 네 가지 원칙들 중 복음주의 자들에게 껄끄럽게 생각되는 것은 두 번째의 것입니다. 즉 행함을 따라 심판을 받는다는 부분입니다(6절). 특히 이것이 율법을 행함으로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사상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사도 바울이 가르친 것임을 상기할 때 그가 전혀 모순되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전제하고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는 이중적인 입장을 띠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모순되게 보이는 것 같은 이 사실에 바울은 무엇인가를 재 확언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아집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다룰 때 세밀하게 언급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먼저 살펴보고자 하는 심판의 원칙은 진리에 따라 하신다는 말씀입니다(2절). 이 말의 뜻은 하나님의 심판이 사실들과 정확하게 일치되는 것으로 심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심판하심에 있어서 정확하십니다. 하나님에게는 불공평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항상 실수할 가능성이 언제나 열려 있는 것입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애매하게 혹독한 고문과 가혹한 아픔을 당하는 판결이 인간 역사에 수없이 많이 있었습니다. 우리들의 자랑스러운 법 조항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억울한 일들은 연일 벌어집니다. 불공정한 재판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는 진리를 따라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에 의하여 공정한 심판이 이루어질 뿐 아니라 공정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우리들의 눈으로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아합 왕에게 하나님께서 내리신 심판을 떠올릴 것입니다(왕상 20:35-43). 이처럼 인간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법정은 항상 사람들의 잘못된 행동에 반하는 불공정한 판결이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본문 3-5절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2절에서 말한 것을 적용하며 확대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진리에 따라 심판하시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우리들이 가진 특권 때문에 예외적인 판결이 있을 수 있다고 추측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입니다. 그 누구도 이 공의를 피하여 갈 수 없습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하기 800년 전에 활동했던 아모스 선지자의 실랄한 책망과 도전의 메시지에서도 잘 발견됩니다: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암 3:2). 하나님을 알았다는 것이 인간을 심판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율법을 불순종하고 멸시하면서 심판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분명한 심판이 임하게 된다는 확증을 나타내는 것이 이 심판의 원칙입니다.

로마서 2 : 1 ― 16

이어지는 7절에서 10절에 보충 설명하는 방법으로 되어 있는 6절 내용은 현대인들의 생각들에 의해 오해되기에 충분합니다. 언뜻 보기에 오늘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한 사람이 매우 열심히 노력함으로 영생과 상급을 얻을 수도 있을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이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일 뿐 아니라 사실이 바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교회 생활에 있어서 논쟁과 오해를 낳는 근거가 되어 왔습니다. 한편으로 사람들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진다는 바울의 가르침과 행위를 강조하는 듯한 예수님의 가르침, 실례로 마태복음 25장의 "나의 이름으로 냉수 한 컵을 대접하는", "지극히 작은 나의 형제들에게 행한" 것과 같은 가르침들 사이를 분열시키고자 시도해왔습니다. 한편으로, 어느 면에서 로마서 2장에서 바울이 말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5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에 동의하는 것으로 강조되어 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어떤 모순이 있는 것은 아닌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구원이란 인간이 할 수 있는 어떤 행위와는 별개로, 하나님의 부요하고 주권적인, 그리고 행위에 관계치 않으시는 은혜에 전적으로 기인한다는 것은 단호하고 명백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문제를 다룰 때 예수님의 말씀과 바울의 가르침을 다 인용한다는 것이 가능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실례로, 에베소서 2:8에서 바울과 요한복음 3:7에서의 예수님의 말씀을 비교해 보십시오. 양쪽 다 인간이 비록 열심히 노력하는 것과는 무관하게 성령에 의해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그에게 생명이 주어지기까지는, 그가 버려진, 타락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버려진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도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경우에 본질적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인간편에서 아무것도 행할 것이 없는 어떤 것입니다. 반면에, 마태복음 25:31 상반절이나 로마서 2:6-10절에서와 같이 매우 다른 방법으로 예수님과 바울을 인용하는 것도 가능한데, 두 구절 모두가 믿음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가 중요하다고 명백히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우리는 무엇이라고 말하여야 하는가? 이러한 외관상의 모순에 대한 가장 손쉬운 해결책은 예수님이나 바울이 실제적으로 서로 모순될 수 없다는 가정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의 인용된 내용들이 같은 기본적 사실에 대해 두 가지 다른 관점으로부터 진술되었음이 분명한 것입니다. 내일 이 문제에 대해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2 : 1 ― 16

문제의 핵심은 예수님이나 바울이 어제 진술한 두 구절, 특히 마태복음과 로마서의 인용구절들은 '칭의'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심판'에 대해 말씀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이 주제를 요약할 수 있습니다. 성경(예수님과 바울)이 믿음을 통해 은혜로 의롭게 된다고 말할 때, 그 본문은 기독교인 삶의 기원에 대해 언급하며, 그것이 우리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예수님과 바울)이 행위로 인한 심판을 언급할 때, 그것은 기독교인 삶의 기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인의 삶에 나타나는 선행은 사실 의롭다함 받는 믿음을 통하여 처음 나타난 것이 마침내, 바로 그 실제 구원의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한 주석가는 이것을 "사도는 단순히 의는 생명으로 인도하고 불의는 죽음으로 인도한다는 위대한 사실과 연관짓고 있다. 그는 과정이 아니라 결과를 다루고 있고, 방법이 아니라 목표를 다루고 있다. "라고 주석했습니다. 또 다른 전세대의 가장 위대한 주석가중의 한 사람인 고데트(Godet)는 말하기를,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은 심판의 때가 아닌, 죄에 대한 값없는 용서를 통해 구원으로 들어가는 때에 적합하다. 값없는 은혜를 주신 하나님은 죄인들이 회심할 때, 믿음 이외에는 아무 것도 묻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때로부터 신자는 전적인 새로운 책임을 갖게 되는데, 하나님은 은혜의 수령자인 그로부터 은혜의 열매들을 요구하신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 형벌 없이 죄를 지을 수 있는 가공할 특전의 실재가 아니라, 반면에 믿음은 죄를 극복하고 거룩하게 행동케 하는 수단인 이유이다. 만약 이 생명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면 그것은 죽은 것이요, 무익하다고 선포될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기에 고린도후서 5:10 에서 바울이 진술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고찰로 설명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로마서 2 : 1 ― 16

공평하심에 따른 심판(11절)과 복음에 따른 심판(16절)의 세 번째, 네 번째 원리는 덜 논쟁적이고, 성경이 믿음을 통해 은혜로 의롭게 된다고 언급할 때는 기독교인의 삶의 출발을 언급하며,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행동에 대한 것을 말하고, 성경이 행위에 대한 심판을 언급할 때는 그것은 기독교인 삶의 기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을 언급한다는 것을 바로 이해한다면 곧바로 합리적 결론에 도달합니다. 물론, 선행으로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스스로 의롭다함 받을 것이라고 논쟁하지는 않지만, 그러한 생명의 결핍은 그가 의롭게 되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논쟁을 낳게 합니다. 왜냐하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유대인들이 즐겼던 특권들로부터 나와야할 열매의 결핍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진실한 믿음(진리에 대한 순종)에 대한 열매로서 참고 선을 행함을 보여 주어야 했으나, 그렇게 하는데 실패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정죄였습니다.

 

바울은 14-16절에서 행함의 어려움을 율법의 요구를 행함과 단지 그것을 지식적으로만 아는 유대인들과 비교하며 이방인들을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때때로 이방인들이 비록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방식은 아니지만 율법의 요구를 따른다는 사실이 율법의 요구가 그들의 심중가운데 쓰여져 있음을 증명합니다. 즉, 그들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별할 수 있는 객관적인 증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 그들 역시 빛에 대항하여 죄를 범한다면 하나님 앞에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동일하게 마지막 심판인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에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면하여 심판받도록 반드시 이끌림 받게 됩니다. 복음은 악한 사람을 선히 만들고 새로운 도덕적 순결함을 창조할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이다. 그리고,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할 때, 그들은 선을 창출할 수 있는 그 가능성을 거부하는 것이 됩니다.

로마서 2 : 17 ― 24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 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로마서 2장의 남은 부분에서 바울이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유대인들이 누리는 특권으로 인해 맺혀져야할 열매의 결핍에 대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선택받았음과 율법을 소유하고 있음에 대한 열매들을 보여주었어야 했으나,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그들은 참된 신앙으로 말미암은 열매인 '인내로서 계속 선을 행함'의 열매를 보여주어야 했으나, 그렇게 하는데 실패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정죄 받은 이유입니다. 또한 이 장의 나머지에서는 인류에 대한 바울의 고발도 잇따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살피기 전에 서론의 형태로 14, 15절에 대해 언급해야만 할 것이 있습니다. AV역 성경은 14절의 시작을 '그 이방인들'로 지칭하고 있으나, 실상 원문에는 정관사가 없고 현대 번역본들이 올바로 번역하고 있는 것처럼 단순히 '이방인들'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적하고자 하는 핵심은 성경이 '모든' 이방인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일부의 이방인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사실 14절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지 일부 이방인에 관한 언급일 수 있습니다.

 

주석가 크란필드(Cranfield)는 바울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럴법한 해석은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실한 신자들에 대한 지칭은 여기 바울의 논쟁에서는 적절치 않습니다. 바울이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 죄 아래 있는 사람으로 포함하고 있기에, 믿는 이방인들은 그러한 범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또한, 믿는 이방인들은 율법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아닙니다. 만약 그들이 제대로 교육을 받았다면 그들은 율법을 가지고 있고, 그리스도를 향해 '율법 안에 있는'(고전9:21)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존 머레이(John Murray)교수는 이것에 대해 매우 분명하게 의미를 드러내고 있는데, 만약 이러한 이방인들이 율법이 없는 자들이라면,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에 대한 지식이 오고 '율법이 없는 곳에는 죄에 대한 전가도 없다'(롬5:13)는 말씀에 근거하여, 어떻게 그들이 죄지은 자들로 간주될 수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머레이에 따르면 비록 이방인들이 특별히 계시된 율법의 의미에서는 '율법이 없는' 자들이지만(이것은 유대인들만 가진 특권이었습니다), 그들이 전적으로 율법 없는 자들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그들에게 알려진 바 되었고, 다른 방식으로 그들에게 효과적으로 율법을 지키도록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내일 이 문제에 대해 더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로마서 2 : 17 ― 24

어제 주해에서 우리는 이방인들이 '그들 자신 안에 율법'이 있어 '그들 마음에 기록된 율법을 나타낸다'고 지적했습니다. 어떤 점에서는 '율법이 없다'는 것이 또 다른 면에서는 '율법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본성으로'(14절)란 말은 그들의 자연적 성품가운데 새겨져 있는 것을 언급합니다. 그것은 요한이 요한복음 1:9에서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그 빛'을 언급하며 강조하고 있는 것과 유사한 말씀입니다. 칼빈은 이 구절을 '사람들은 자신을 다른 동물들보다 우월하게 만드는 이 독특한 탁월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며, 그것은 사람에게 이성과 지성을 부여하고, 그들의 양심가운데 새겨진 선악간의 구별을 수행하게 한다. 그러기에 인간으로서 영원한 빛에 대한 인식에 이르지 못할 사람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그 누구도 '까닭 없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같은 구절들에 대해 주석한 제임스 데니(James Denny)는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는 이방인들에게 율법이 있다고 증명할 수 있는 세 가지 증거물이 있다고 했습니다: i) 그들의 행위에 대한 호소- 사도에 의해 해석된 것과 같이, 적어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행위가 마음가운데 기록된 율법의 소유를 명시한다. ii) 양심의 활동 - 비록 그것이 내적인 것일지라도 그들의 행위에 의해 태어나는 외적 행동들에게 그것의 증거를 연결한다. iii) 그들의 사고 - 그들의 사고는 그들 안에 율법이 있음을 증명합니다. 그들의 사고 속에서 상호 교통하고 있는 측면에서는 그들의 사고는 정죄하기에 바쁘며 혹은 드물기는 하지만 방어를 주창하기도 합니다. 즉, 어떤 경우에도 율법의 인식을 시사하는 도덕적 기능들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죄를 지으면 그들의 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며 율법을 가진 유대인들만큼 더 심판을 받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것에 의해 양심의 법을 어기는 죄를 범하고 있고,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사악한 이방인들은 불의가운데 진리를 억누르며 창조의 빛에 대항하여 죄를 저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2 : 17 ― 24

명백히 말해서, 바울은 유대인들에 관해 명백히 언급함에 있어서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이미 일반적으로 말했던 것을 특별하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에게 진리인 것은 유대인들에게도 바로 진실이라는 것을 말하며, 또한 불경건(빛에 대한 거부)은 그들을 불의로 이끄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설교자들에게 강단에서 어떻게 행했으면 하는 것에 대해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 그는 얼마나 그는 맹렬한 공격을 영적으로 교만하고 자기 의에 빠진 유대인들을 향하여 던지고 있는가! 여기에 옛 모든 선지자들의 외침은 나단(Nathan)이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외침과 같이 다시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그가 그들을 고소하고 있는 비난의 본질을 주시해 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그의 격정을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빛에 순종해야 하는 그들의 실패로 인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했으며, 그의 거룩한 이름을 이방인가운데 참람 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23, 24). 이러한 비난들은 원칙적으로 그가 이방인들을 대항하여 이전 장에서 세웠던 원리들과 동일하다는 것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1:21-13), 자신과(1:24-27), 그리고 사회(1:28-32)에 대항하는 죄들이었습니다. 여기서도 그것은 사회(21)와 자신(22), 그리고 하나님(22b, 23)께 대적하는 죄들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이 종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던 혹은 그렇지 않던,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고 그의 빛을 거부할 때, 언제나 그 결과는 불의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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