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묵상

로마서 묵상 6

새벽지기1 2021. 7. 19. 07:02

로마서 1 : 19 ― 23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오늘 본문은 우리가 깊이 다루어야 할 중요한 것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한가지는 경건치 않는 것과 불의한 것 사이에 중요하게 연관된 개념이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바울은 이 두 가지에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명확하게 말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본문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24절에서 32절까지는 인간의 불의한 모습을 다루고 있는 것에 비해 경건치 않은 자들에 대한 언급이 분명히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낮에 이어 밤이 오듯 경건치 않은 것과 불의한 일은 서로 이어져 있습니다. 불의한 자가 경건치 않은 일들을 하고 경건치 않은 자들이 불의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진 인간의 삶이란 경건치 않은 삶으로 일관되는 것입니다(경건치 않다는 것은 에베소서 2:12절에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 없이 산다는 의미입니다, 또 골로새서 1:21절에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단순한 우리들의 절못된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을 인정치 않는 삶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처럼 단절된것 때문에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이웃에 대하여 온갖 잘못된 행동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불의한 행동을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경건과 불의가 붙어 다니듯 경건과 의로움은 항상 병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정하게 그의 진노를 인간에게 나타냅니다. 바울은 이것을 전개해가고 있습니다. 인간은 핑계할 수 없습니다(20절).


예를 들면 인간은 그리스도의 계시가 복음 안에서 주어지기 전에는 하나님을 결코 알 수 없었다고 핑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기회가 인간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자신들의 악한 행위로 그 길을 감추어 버렸습니다. 이 진리를 20절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은 곧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가운데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에 대한 진리입니다. 만물 속에서 분명히 하나님의 능력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이 하신 것들을 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하지 않았습니다(21절). 이것이 바로 인간이 항변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알 수 없었다고 핑계를 댈 수 없습니다.

로마서 1 : 19 ― 23

어제 말씀드린 내용은 아주 중요한 잇슈를 제기합니다. 그것은 곧 자연신학(natural theology)의 문제입니다. 간혹 학자들 사이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계시가 주어지기 전에 하나님은 세 가지 방법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다고 말합니다. 즉 자연을 통해서, 그리고 양심을 통해서, 마지막으로 율법을 통해서 계시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생각 속에는 은혜의 복음을 포함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다른 방도들이 있다는 것이 없습니다. 로마서에서나 그 어떤 서신에서도 그러한 생각을 지지할 만한 언급이 없습니다. 그는 실로 그러한 생각을 고린도 전서 1:21에서 반박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는 또 고린도 전서 2:14절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육적인 사람은 영적인 것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계시를 제외하고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계시는 없다고 말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셨다는 것을 바울은 부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보이지 아니하는 속성은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 가운데서 분명하게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이 나타났습니다(20절). 그렇지만 앞에서 말한 것과 20절 말씀은 서로 모순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울이 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에 대한 계시와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을 알게 하는 계시 사이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창조에 나타나있는 하나님에 대한 계시조차도 인간은 죄로 인하여 받지 못하는 상태에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죄가 인간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들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진리에 대하여 눈을 감아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보지 못함은 스스로 보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피조물 사이에서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명백한 모습은 그 자체의 빛만으로도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죄로 인하여 가려진 눈은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사악함에 대하여 분명한 깨달음이 없이 무지함을 간청할 수 있는 장님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핑계를 대지 못하게 하는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이 지식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는 다른 것입니다'.

로마서 1 : 24 ― 27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1장 마지막 절까지 본문의 내용은 죄의 무시무시한 결과가 무엇인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본문 첫 두 구절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버려두사" 라는 말씀을 두 번씩이나 언급하였습니다.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말씀은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고 죄를 짓기로 마음먹었을 때 하나님은 인간의 선택을 확증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즉 그들이 택한 길로 가게 내버려두신다는 것입니다.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나니"(창 6:3). 이것이 죄의 무시무시한 결과입니다. 인간이 죄를 짓기로 고집하는 상태에서는 하나님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의 무능하심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의도적으로 거부하겠다는 데에는 하나님께서 방치하시겠다는 것뿐입니다. 그 결과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십시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가기로 마음먹고 행동에 옮길 때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한 결과를 얻게 됩니다(가려져 있는 죄의 권능이 있습니다). 이 경우 사실 인간은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일반 은총의 보호막에서 벗어나게 만듭니다. 전에 결코 인식할 수 없었던 온갖 유형의 부패상황에 자신을 맡기는 결과를 낳습니다. 일단 죄를 범하게 되면 더 이상 우리들의 손으로 조정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탕자는 의도적으로 아버지의 권위에 반항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토록 비참한 지경에까지 자신을 몰고 갈지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그 자신의 의도를 막을 길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생각을 감행하였고 결국은 돼지의 우리에서 지내는 결과를 낳은 것입니다. 도덕적인 측면에서 볼 때 지금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가기로 마음먹고 행동하면 하나님은 우리들의 선택에 우리들을 내버려두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비참함입니다.

로마서 1 : 24 ― 27

우리는 이 무시무시한 본문의 말씀 안에서 죄악의 격한 모습이 지칭하고 있는 죄의 점진적인 능력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죄는 단지 부정적인 분량의 문제가 아닙니다. 또는 선함이 결여된 무엇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그 안에 긍정적으로 악의가 들어 있습니다. 마음의 공허함과 허망함을 일으키는 것과 우상숭배와 욕정 및 교만함과 어리석음, 불명예스런 열정, 비열한 행동 그리고 완전한 타락이 가져오는 모든 목록들을 열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 죄는 인격을 떨어뜨리는 일을 하고 마지막엔 역겨운 자가 되게 합니다. 이러한 과정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히브리서에 있는데 하나님의 구원이 등한시되는 곳에는(2:3) 항상 히브리서 6:4-9에 있는 복음을 거절하게 만듭니다. 또 히브리서 10:26-29에 있는 것처럼 복음을 비웃음과 멸시하는 악을 나타냅니다. 죄의 이러한 전개 과정은 로마서 1:21-23절에 언급하고 있는 죄악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요, 24-27절에 있는 죄악은 자아을 대적하는 것이며, 28-32절의 죄악은 사회를 대적하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로부터 우리가 배우는 교훈은 도덕적인 붕괴가 명백하게 드러나기 전에 이미 오랫동안 속에서부터 썩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죄목들을 열거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는 타락과 퇴폐의 정도를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 이방인 세상에 임하고 있는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명백한 증거가 바로 이러한 목록들이라는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28절에서도 세 번째로 언급된 "하나님이 버려두셨다"는 문구는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사용된 것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너무나 극단적인 용어를 사용하고 있고 바울은 그렇고 그런 사람이라고 단정해버리는 잘못된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들이 모든 인간의 행위를 묘사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을 기록한 것임을 확실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일에 절대로 빠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이해하고 있든지 아니면 우리의 마음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진실은 이것입니다: 이 모든 무서운 일들의 씨앗은 우리들의 마음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존재임을 알도록 우리들의 삶에 그 죄성(罪性)의 결과가 나타납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우는 교훈은 '네 자신을 알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염두에 두고 우리 자신이 얼마나 추한 인간인지를 안다면 우리를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러한 악한 상태로부터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귀하고 놀라운 것인지에 대하여 크게 감격할 것입니다. 우리가 죄가 없다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요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주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씻겨주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입니다(요일 1:9).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찬양할 뿐입니다.

로마서 1 : 28 ― 32

본문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그토록 지독하게 나쁜 깊은 심연의 바다에 빠진 인간을 구원한다는 복음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바울은 기술해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고린도 시에서 기록한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고린도는 그 당시에 속칭 방탕과 타락의 도시였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이와 같은 용어들을 가지고 죄의 속성과 영향을 묘사한 것은 하나의 이론을 말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고린도에서 죄의 본성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보았습니다. 그는 죄의 온갖 퇴폐적인 모습과 죄의 야비한 공포가 무엇인지를 친히 목격하였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내 눈으로 직접 목격한 것을 여러분들에게 적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그러한 상황에 침투해 들어갔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보십시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환상 가운데서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사도행전 18:8이하):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그러한 타락한 도성에 하나님의 백성이 많다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 가진 복음의 영광입니다. 복음은 인간을 죄의 쇠사슬로부터 능히 건져냅니다. 복음은 인간을 구원하여 하늘의 영광의 잔치에 참여하게 합니다. 고린도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바울 사도는 매우 놀라운 사실을 언급하였습니다(고전 6:9이하). 이곳에서 본문에서 언급한 죄의 목록과 견주는 목록들을 언급하였습니다. 그리고 덧붙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바울이 왜 이처럼 복음에 대하여 자랑스럽게 여기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는 고린도에 있는 깊은 오물덩이에 복음을 풀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놀랍게 구원함을 얻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를 설교하는 것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요 구원을 얻는 자들에게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입니다(고전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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