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묵상

로마서 묵상 7

새벽지기1 2021. 7. 20. 06:48

로마서 1 : 28 ― 32

본문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그토록 지독하게 나쁜 깊은 심연의 바다에 빠진 인간을 구원한다는 복음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바울은 기술해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고린도 시에서 기록한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고린도는 그 당시에 속칭 방탕과 타락의 도시였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이와 같은 용어들을 가지고 죄의 속성과 영향을 묘사한 것은 하나의 이론을 말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고린도에서 죄의 본성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보았습니다. 그는 죄의 온갖 퇴폐적인 모습과 죄의 야비한 공포가 무엇인지를 친히 목격하였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내 눈으로 직접 목격한 것을 여러분들에게 적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그러한 상황에 침투해 들어갔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보십시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환상 가운데서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사도행전 18:8이하):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그러한 타락한 도성에 하나님의 백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 가진 복음의 영광입니다. 복음은 인간을 죄의 쇠사슬로부터 능히 건져냅니다. 복음은 인간을 구원하여 하늘의 영광의 잔치에 참여하게 합니다. 고린도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바울 사도는 매우 놀라운 사실을 언급하였습니다(고전 6:9이하). 이곳에서 본문에서 언급한 죄의 목록과 견주는 목록들을 언급하였습니다. 그리고 덧붙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바울이 왜 이처럼 복음에 대하여 자랑스럽게 여기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는 고린도에 있는 깊은 오물덩이에 복음을 풀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놀랍게 구원함을 얻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를 설교하는 것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요 구원을 얻는 자들에게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입니다(고전 1:18).

로마서 2 : 1 ― 4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사도 바울은 자신의 논지를 본문에서 더 전개하고 있습니다. 이 새로운 장에서 그의 주의를 다른 유형의 사람들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1절에 있는 '판단한다'는 말은 1장에서 바울이 이방인들에 대하여 규탄한 사실적인 내용을 듣고서 판단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을 비난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1절에 "네가" 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에 대하여는 다른 의견이 있습니다. 혹자는 유대인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분들은 이방인들 중에 선하고 존경받는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합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는 누구를 지칭하든지 바울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즉, '유대인들의 죄는 이방인들의 죄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그들의 죄는 너희가 행하고 있는 범주 선상에 놓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너희의 행동은 이방인들이 행하고 있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너희도 이방인들처럼 빛을 대적하는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제 1장에 있는 정죄의 원칙은 이방인들이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진리에 대한 지식에 충실치 못한 사실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즉 불의로 진리를 막아버렸던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하지 않았습니다. 2장에서 사도 바울이 지적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보다 나은 진리에 대한 지식에 충실치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율법을 소유하고 있었고, 선지자들과 약속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언약들을 소유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소유한 그 모든 진리에 불의를 행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불충성스러움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정죄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볼 때 유대인들도 이방인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유대이들이 받은 계시가 이방인들이 가지고 있는 자연 계시보다 월등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받는 정죄는 상대적으로 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로마서 2 : 1 ― 4

그렇다면 사도 바울의 논쟁은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의 잘못된 행동 때문에 이방인들에게 공정하게 임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유대인들도 이방인들 못지 않은 악을 자행했는데 하나님께 달리 취급받아야 하겠는가? 라고 묻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심판을 피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것은 바로 바울이 유대인들이 생각하고 있고 믿고 있는 것에 대한 답변에서 물은 질문입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는 다르게 판단 받게 될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의 유대 문헌들이나 지혜문헌들을 보면 하나님의 진노가 이방인들에게 임하는 것과 유대인들에게 내리는 것은 차원이 틀린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내용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특히 오늘날에도 가문이나 전통에 집착하여 우리들의 악한 행동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다르게 취급할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는 자들에게 주는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본문 2절과 3절에서 단호한 어조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이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교훈을 받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본문의 가르침을 일종의 대화체로, 또는 상대방과 논쟁하는 어조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방인들이 핑계할 수 없는 죄인들임을 지적하였을 때는 전혀 대화체가 아니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그런데 종교적인 사람들인 유대인들에게 말할 때는 전혀 다른 어조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논쟁이 출발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본문에서 논박하고 있습니다. 독선적이며 존경받는 종교적인 사람은 불의한 사람이 은혜가 필요한 것처럼 자신도 주님의 긍휼과 자비가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논쟁에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논란은 순종치 않는다는 큰 표시입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기다리는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로마서 2 : 1 ― 4

많은 사람들이 복음 선포를 들으면서 마음에 찔림과 도전을 받습니다. 설교를 통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직면하게 됩니다. 그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의하여 숙연해지고 또는 크게 도전을 받으며 말씀에 사로잡힌바 되기도 합니다. 자신이 심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하여 이 놀라운 사실 앞에 자신의 삶을 돌이키고 개선해야만 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깨달음을 통해서 그리스도께로 나오면 괜찮은데 전혀 돌이키지 않고 하나님께 자신을 전폭적으로 헌신할 준비가 되지 않아서 들은 진리를 대적하는 일을 계속한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어찌 피할 수 있겠습니까?

 

들은 진리를 내동댕이치지 마십시오. 가슴으로 품으십시오. 주께로 돌아오십시오. 전적으로 헌신하십시오. 그렇지 못할 때 죄의 강퍅케 하는 능력이 무엇인지를 실감케 될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은 내리막길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결국은 버려진 자들이 받을 최후의 심판을 하시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떠나 가버리는 것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닙니다. 성경은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인지를 수없이 많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한 부자가 겪는 고통을 보십시오(마 19:16이하). 펠릭스 각하의 모습이 좋은 증거입니다(행 24:22이하).


이 두사람은 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하늘 문 앞까지 도달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복음과 함께 자신을 맡기기보다는 복음을 등지고 뒤 돌아섰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증거합니다: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히 4:7).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조상은 아브라함'이라고 말한 바리새인들을 만난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용납해 주시는 자들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그들에게 "너희의 아비는 마귀니라" 고 말씀하신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그 말을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에 있어서 가문과 혈통이나 지식이나 출신이 중요하지 않고 지금 주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가 않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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