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묵상

로마서 1 : 8 ― 15

새벽지기1 2021. 7. 15. 06:53

로마서 1 : 8 ― 15


9절 이하에 나오는 바울의 기도에 관하여 한마디만 더 묵상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이미 그가 로마에 가기를 열망하였다는 부분을 상고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기도와 다른 이들의 기도가 하나님의 정하신 선한 때에 얼마나 놀랍게 응답되었는지에 대해서도 묵상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어떤 영적인 은사를 나누어주기를 원하는 부분에 대하여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11절).
이 본문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대하여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성령의 은사'(charismatic gifts)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것을 성도들을 견고케 하고 온전히 세우기 위하여 성도들에게 목양하는 말씀 사역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그 어떤 것도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증거는 없습니다. 물론 이것이다라고 딱 부러지게 단정해야만 하는 중요한 문제도 아닙니다. 성경 이곳 저곳에 있는 유사한 말씀과 비교하여 바울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를 이해하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은사를 수여하고자 하는 목적은 성도들을 세우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11절). 이러한 단어를 바울은 로마서 16:26에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1:11과 16:26 사이에서 우리는 바울이 성도들에게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을 주려는 것이다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만일 그것이 맞는 것이라면 무슨 영적인 은사를 주려는 것이었을까요? 혹자는 로마서 15:29에 사용된 '그리스도의 복음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온다는 바울의 말을 떠올릴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복음 선포 사역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설교 사역을 통해서 주님의 축복을 충만히 받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슨 특별한 성령의 은사이든 아니면 일반적인 것이든 설교 사역을 통해서 성도들을 온전히 세우는 영적인 목적이 달성된다는 사실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12절에서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한다"는 말을 이어간 것입니다. 성도들의 교제를 이루는 축복만이 아니라 성도들 간의 교제로 말미암는 축복이 항상 있습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울은 성도들로부터 배우려는 욕구가 없이 선생의 지위만 내세우고자 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그가 성도들에게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그들을 복음에 확증시키려고 설교하고 있지만 바울은 성도들의 모범을 자신의 믿음의 열정에 덧붙이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인하여 피차에 서로 축복이 되기를 원하였습니다'.

로마서 1 : 14 ― 16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본문의 중요성은 사람들을 믿음에 순종하는 자리로 나오게 하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대하여 사람이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이 자신으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명감에 사로잡히게 만들었다고 증거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빚진 자로 만들었습니다. 성결함과 정직함으로 복음에 충실히 봉사하여 사람들을 복음에로 이끄는 사역을 감당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12:1에 있는 표현대로 복음에 합당하고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거룩한 사역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사명을 사람들에게도 빚 진자로 말하고 있습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나 모두에게 그리스도를 증거 해야 할 빚진 자라는 것입니다. 15절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라는 표현은 바울이 로마에서 하나님의 구원하시고자 하는 주권적인 뜻을 온전히 선포하고자 하는 자신의 열망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몰(Moule) 교수가 해석하는 것을 보면 "나는 할 수 있는 대로"라는 말은 '로마에 가고자 하는 일에 방해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그 방해물은 바울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울 주변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문제가 해결되면 나는 기꺼이 너희에게로 갈 것이다'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에서 그가 설교할 수 있는 기회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그 때가 오면 그는 즉각 로마로 갈 것이라는 말입니다.

본문에 세 번씩이나 등장하는 "나는" 이라는 표현: "나는 빚 진자,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나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등의 표현은 그 말 자체에 아주 놀라운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16절에 있는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씀 안에 그 첫째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이것은 거의 부정적인 측면에서 복음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는 바울 특유의 논법입니다. 이른바 '리토테스' 또는 '메이오시스' 로 불리우는 문자적인 명제를 통해서 반대에 대한 부정적인 방법으로 사실을 확증시키는 논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바울은 그야말로 복음에 대하여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여기에는 이 말의 문자적 의도보다도 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매우 탁월한 그러나 아주 다른 특성을 지닌 주해를 다는 크란필드 박사와 로이드 존스 박사 역시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 가운데 특별한 상황에서 복음을 매우 부끄럽게 여기고자 하는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을 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가능성을 주장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시몬 베드로가 주님과 관련 있다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부인한 모습을 연상할 것입니다. 또 우리 주님의 증거를 부끄럽게 생각할 위험에 대하여 바울이 디모데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을 연상할 것입니다-딤후 1:8) 크란필드 박사는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 단지 설교자들에게만 있는 문제가 아니라 모든 성도들의 삶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누가 감히 저 사도의 주장을 도전할 수 있겠습니까? 이 부분에 대하여 내일 묵상에서 더 살펴보겠습니다.

로마서 1 : 14 ― 16

사도행전 22:18이나 갈라디아서 1:16-17을 보면 바울 사도가 교회의 성장과 확산의 최전선에서 사라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아라비아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그는 홀로 초야에 묻혀 지내듯 지냈습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 주님께서 '지금은 네가 설교할 때가 아니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네가 많은 어려운 문제들과 씨름해야만 한다. 다메섹에서 네게 일어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생각해야만 한다'고 바울에게 말씀한 것과 같습니다. 바울은 아라비아에서 복음의 참된 의미와 씨름하였고 복음의 진수를 굳게 부여잡았습니다. 그의 영혼이 복음의 능력으로 사로잡히고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뜨거움으로 타오를 때까지 복음과 씨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로마가 그의 씨름의 결과라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만 로마서 자체는 바울이 깨달은 복음의 전 내용입니다. 복음을 그의 것으로 만들었고 그 자신의 깊은 영적 체험으로부터 복음을 더욱 진전시켰습니다.
그에게 분명해진 것 중 하나는 복음이 그로 하여금 결코 피할 수 없고 뗄래야 뗄 수 없는 의무감에 사로잡히게 했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그를 하나님께 빚진 자로 만들었고 사람들을 복음에로 이끄는 일을 위하여 진실과 성결케 된 자로 일생토록 헌신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는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해야할 빚진 자였습니다. 우리들의 심령으로부터 죄의 짐을 털어 내게 하는 복음은 우리의 어깨에 새로운 짐을 부과해 줍니다. 즉 잃어버린 세상을 짊어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할 사명에 사로잡히게 만듭니다.

바울이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기를 소망하고 때가 되면 즉각 가겠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부요하심을 증거하고자 하는 바울의 단호한 결단과 열정을 엿보게 합니다. 바울에게 영향을 준 복음의 그 능력이 우리들의 삶에서도 동일한 영향력으로 다가온 것인지를 자문해 보십시오. 복음의 능력은 능히 우리를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망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나를 죄로부터 구원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다른 영혼들도 죄의 쇠사슬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누리게 하는 마음이 없으면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한 자인 것입니다.

로마서 1 :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우리는 이 위대한 말씀 앞에서 잠시 쉬어가야만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우리에게 로마서 전 서신의 주제로 이끌어주기 때문입니다. '능력'으로 번역된 헬라어의 '두나미스'에서 우리는 다이너마이트라는 말을 유추하였습니다. 사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복음의 능력은 문자적으로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위력을 지닌 것입니다(바울 당시에 다이너마이트가 없었기 때문에 복음의 능력을 다이너마이트의 위력으로 연상하는 것은 무리가 있는 것이지만 그 이상의 능력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의 메시지는 능력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권능에 대하여 말하는 메시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메시지 자체가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약성경에서 설교자가 아니라 설교를 항상 강조하고 있는 그 이유입니다. 만일 복음이 단지 하나님의 능력에 관한 이야기라면 정말 중요한 것은 설교자입니다. 설교자가 그 이야기를 전달하는 능력과 그의 스타일이나 언변력 및 전달 기술등이 참으로 중요하게 부각될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 그 자체가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에 우리가 중요시 여길 것은 설교입니다. 인간의 언변력이나 스타일 및 기술적인 능력 또는 바울이 사용한 말의 지혜 등을 강조하면 복음 메시지 자체를 가리는 우를 범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효화시켜버릴 것입니다. 이에 대한 간략한 예화를 하나 들겠습니다. 한 사람이 청중들에게 달려가며 불이야! 라고 소리쳤다고 봅시다. 청중들이 앞을 다투며 밖으로 달려나가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소리친 사람의 인격 때문이라거나 그의 언변때문이 아니라 그가 외친 메시지 때문입니다. 가장 위대한 웅변가가 불이야! 라고 외치는 것이나 아주 유약한 어린이가 불이야! 라고 외쳐도 효과는 같을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들려져야 할 것은 복음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이 예화를 통해서 살아있고 생명을 주는 복음의 능력 자체를 굳게 신뢰해야 함을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 메시지를 토론하게 될 때 우리는 한 주제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생동감있는 능력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복음의 능력이 가져올 효과에 대하여 우리들은 충분히 다 평가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복음 자체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믿으십시오.

로마서 1 : 16

복음 자체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씀은 다른 것들과 관련하여 볼 때 논리적인 것보다는 폭발적인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복음은 논쟁에 의해서가 아니라 복음 자체에 의해서 결국엔 확증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논쟁이나 토론을 통해서 복음이 무엇인지를 입증하려고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논리적인 명제가 아니라 생명을 위한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확증되어져야 할 수단이 있어야한다면 성령의 확증과 복음의 능력이 최고의 수단입니다.

제임스 데니 교수는 설교자의 임무란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답변되어질 수 없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물론 복음은 답할 수 있는 합리적인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불가항력적인 인상을 받게 합니다. 그러한 인상을 양심에 박히게 합니다. 인간의 도덕적인 본성에 심어줍니다. 반항해보았자 전혀 효과가 없는 것임을 알게 합니다. 복종하지 않고는 안 되는 그리고 진리를 나타내는 자로 일생을 헌신케 하는 능력이 복음입니다. 복음을 듣는 사람들의 양심에 복음 진리가 말해질 때까지 복음 진리를 굳게 붙드는 것입니다.'

'구원' 이라는 말은 바울에 의해서 폭넓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이 인간을 위하여 무엇을 하는지를 확증하는 것을 나타내는 여러 가지 사상을 담고 있는 말입니다. 우선 인간으로부터 죄의 무거운 짐을 들어올릴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복음입니다. 그리고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화목케 하는 유일한 것도 복음입니다. 구원이라는 바로 이것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죄책감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쳐져있는 높은 장벽입니다. 인간의 인생 경험에서 피할 수 없는 무거운 것이 바로 이 죄입니다. 한가지 형태나 아니면 다양한 형태이든지 죄는 전인간을 부패시킨 것이요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죄가 인간의 전 삶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 무거운 죄 짐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모든 노력들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노력은 과거의 죄악의 바윗덩어리에 부딪혀 침몰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과거를 지니고 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과거를 추궁하실 것입니다(전도서 3:15). 우리가 걸어온 발자취를 지워버릴 수 있는 능력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움직이는 손가락이 쓴다, 쓰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우리의 모든 경건이나 위트가 지나간 과거를 되돌릴 수 없도다 우리의 모든 눈물바다조차도 기록된 글 하나조차도 지울 수 없도다(Omar Khayyam).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 짐을 들어올리신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그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자신의 몸에 지우고 돌아가셨습니다.

로마서 1 : 16

두 번째로 생각할 것은 복음은 죄로 인하여 상한 사람들의 심령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의 기쁜 소식은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온전히 고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구리 뱀을 치켜들음으로써 사람들이 그 뱀을 쳐다 볼 때 불뱀에 물린 모든 재난으로부터 고침을 받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인자가 땅에서 들려질 때 그를 바라보는 자마다 고침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3:14에서 하신 우리 주님의 선언이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는 사마리아 여인, 버림받고 상처가 많은 여인, 죄를 안고 살고 있고 죄악이 들통 날까봐 아무도 없는 시간에 우물에 나온 여인을 예수께서 고쳐주신 것입니다. 그녀의 무거운 죄짐을 이 땅에서 누구도 벗어나게 해 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생수이신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을 때 그의 사랑의 손이 그녀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셨을 때, 사랑의 친절로 충만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상한 그녀의 심령은 고침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치료하시는 손길이 임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그녀는 완전히 고침 받고 마을로 돌아갔습니다. 그녀는 구속함을 받았고 고침을 받았으며 회복되었고 죄 사함 받았습니다. 그리고 고백하였습니다: "그가 진실로 세상의 구주이신 그리스도로다".

세 번째로 생각할 것은 복음은 인간을 죄의 쇠사슬과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유일한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인생을 변화시키며 새 생명에로 이끌며 결국 전인적인 변화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은 한 세상으로부터 다른 세상에로 이끌어 줍니다. "만일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우리는 고린도 전서 6:9-11에서 사도 바울의 생생한 고백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고린도 교인들이 회심하기 전에 그들 안에 있었던 전적 부패 상황을 묘사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이 얼마나 도덕적, 영적 변화를 말하고 있습니까! 그러한 것이 바로 믿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곧 복음입니다.

로마서 1 :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지난 이틀 동안 복음의 능력을 살펴보았는데 오해나 혼돈을 피하고 보다 더 확고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17절에 사용된 "나타나서"(revealed) 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 단어가 '내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이 선포하는 의문점이 아닙니다. 그러한 질문은 복음에 대하여 잘못된 견해나 이해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질문을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발견하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을 찾을 수 없습니다.

실로 인간은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 로마서에서 명백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3:11을 보십시다: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 고 하였습니다. 복음이 선포하는 질문은 아주 다른 종류입니다. 그것은 '내가 누구도 피하여 달아날 수 없는 하나님과 어떻게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가?' 입니다. 진리는 이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를 복음의 말씀 속에서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네가 어디 있느냐?" 고 물으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찾습니다. 프란시스 톰슨이 쓴 하늘의 사냥(The hound of heaven)이라는 시에 보면 하나님이 인간을 찾으시는 모습을 아주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죄인들을 찾으십니다. 이 모습을 본문에서 "나타나서" 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말입니다. 즉 복음 선포에서 인간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이 구원을 얻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복음 안에서 역사 하는 하나님의 능력은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믿는 자는 누구든지"라는 말에 이어서 나오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믿음은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믿음 자체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엡 2:8). 믿음은 복음 선포를 통해서 창출되어집니다(이것 역시 복음이 가진 능력의 일부분입니다). 복음을 들음으로서 믿음이 생기게 됩니다(롬 10:17). 복음이 능력인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믿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복음을 들을 때 복음에 의해서 정복당하면 그것이 곧 믿음이 생겼다는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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