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3 : 21 ― 25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바울 사도는 또 다시 1:17절에 나타난 이 의로움을 더욱 확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감추어진 복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의로움을 25절 말씀과 함께 생각해보면 바울 사도가 의미하고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즉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칭의에 대한 하나님의 방법은 공개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죄를 위하여 희생 제물로 들려졌을 때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의 죄악에 대한 성경의 답변입니다. 그리스도는 선생도 아니요 정치 지도자도 아니며 기적을 일으키는 자가 아니라 고난받으시는 여호와의 종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증거 합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니라"(고전 2:2). 세례 요한조차도 이렇고 고백하였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본문의 말씀에 대하여 마틴 루터의 설명은 아주 흥미로운 것입니다: '나는 사도 바울의 로마서를 이해하려고 무진작 열망했습니다. 그 결과 다음의 한마디로 표현하는 것 외에는 다른 말이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즉, "하나님의 의"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불의한 자를 벌하심에 있어서 의인으로 그리고 의롭다고 취급해 주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하나님의 의였기 때문입니다...나는 밤낮으로 이 문제와 씨름했습니다. 나는 의로우신 하나님의 의가 은혜와 자비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믿음으로 의롭다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까지 그 문제와 씨름하였던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나는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 일을 통해서 낙원에 들어가는 문을 열게 된 것입니다. 이제 제게는 성경 전체가 전혀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전에는 하나님의 의가 제게 매우 곤욕스러운 것으로 그리하여 몹시 싫은 것으로 다가왔었지만 지금은 그것이 놀랍게도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것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바울 사도의 메시지가 나를 천국 문으로 들어가게 한 것입니다'.
로마서 3 : 21 ― 25
사도 바울은 이 모든 것을 율법과 선지자들이 증언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복음은 구약에도 있음을 그들의 눈으로 직접 목격했습니다. 아이러니는 종교적인 율법에 집착하고 있는 유대인들이 그들의 코밑에 있는 복음을 놓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구원의 복음은 교회의 생명의 본질을 크게 왜곡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복음의 진정한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만세반석 열리니'라는 찬송(188장)과 '못 박혀 죽으신 하나님 어린양'(435장)은 바울의 가르침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으나 수많은 사람들이 그 진리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 복음과 아무 상관없이 살아갑니다. 심지어 이 진리를 선포하는 교회의 회원이 되는 것에 서약하면서도 실지로 믿지 않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바울의 사상은 그가 사용하고 있는 다양한 신학적 용어들이 담고 있는 신학적인 개념들을 제대로 파악할 때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약 성경의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의, 대속, 칭의, 속죄, 믿음이라는 용어들을 바르게 해석하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최종적으로 중요한 것들이 다 이 용어들 속에 함유되어 있습니다. 칭의(Justification)와 대속(propitiation) 및 속죄(redemption)는 죄인인 인간을 대항하게 하는 세 가지 요소들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정죄 아래에 놓여있습니다. 칭의가 그의 죄악을 입증하며, 그의 정죄를 제거해 줍니다. 인간은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아래에 놓여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대속되어지는 대가는 하나님의 진노를 제거하고 하나님과 화목한 자리에 이르게 합니다. 그러나 죄는 단순히 죄책감과 진노 그 이상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는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 가운데 거하는 자입니다(9절). 인간은 죄의 영향력과 지배력에 놓여 있는 자입니다. 구속의 의미는 이 종노릇하는 것이 깨어지고 자유로운 신세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구속이라는 말의 뜻이 값을 대신 지불하고 사서 주인의 속박에서 풀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들이 굳게 부여잡아야 하는 명백한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에 있어서 최고봉에 다다르는 깨달음입니다. 이들의 진정한 의미를 연구하는 자들에게 큰 축복으로 임하게 될 진리입니다. 이 부분들에 대하여 내일 좀더 상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3 : 21 ― 25
'의'라는 말은 본 로마서에서 아주 두드러지게 지적되고 있는 단어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인간의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의는 하나님께서 은혜의 선물로 수여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실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말이 바로 이러한 의미입니다.) 십자가 상에서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이 의입니다. 그리고 오직 믿음으로만 받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와 같이 이 의는 하나님의 속성으로서의 의를 말하기보다는 인간이 스스로를 위하여 할 수 없었던 것을 인간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결정적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칭의는 법적인 용어입니다. 재판소에서 사용하는 법률적인 전문 용어입니다. 이것은 명백한 대상이 있습니다. 죄책감(guilt) 또는 유죄라는 말도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한다는 것은 우리가 느끼는 무엇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책감 또는 유죄라는 말은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 서 있는 그 어떤 거대한 장벽입니다. 우리가 느끼던지 느끼지 못하든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의롭게 된다는 것도 어떤 대상이 있습니다. 인간 외부에서 전적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선언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모든 땅의 심판주이신 하나님께서 유죄라고 인정받은 죄인을 이제는 의인이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죄인을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자로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 안에서 이루어진 무엇이 아닙니다. 인간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이처럼 불가능한 일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묻는다면, 죄인이 하나님의 법정에서 무죄라고 판정 받아 석방되어지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묻는다면 이에 대한 유일한 해답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속자입니다. 그 분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가 서야 할 자리에 서신 분이시오, 우리 대신에 곤경에 빠져 고난을 받으신 분이시며, 우리가 받아야 할 정죄를 받으신 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죄 때문에 우리가 받아야 할 모든 저주와 형벌을 친히 당하셨습니다.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두 가지 중요한 그림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의가 없는 죄인인 인간의 모습,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과 정죄 하에 있는 죄인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두 번째 모습은 두 번째 아담이신 다른 사람, 즉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그는 죄인인 인간과는 전혀 다른 분입니다. 그의 사적으로나 공적으로 가르치고 활동하신 모든 일들은 다 하나님께서 인준하신 것들이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이니라". 바로 이 완전한 분이 우리 인간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분, 하나님이 즐거워하시며 받으시는 분 그 분이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서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분이라는 것이 우리들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주님의 그 모습이 우리들에게도 주입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마치 그것들이 이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우리들의 것 인양 취급하시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우리들의 용납되지 못함이 그리스도에게 전가되고 우리들이 받아야 할 모든 것들이 다 마치 그리스도의 것인 것처럼 취급된 것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변화를 이루심에 있어서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우리들의 죄와 허물을 다 그에게 담당시키신 것입니다(사 53:6). 그리고 그리스도의 완벽한 의를 우리들에게 입혀 주신 것입니다(고후 5:21). 이 의의 주입에 대한 증거는 단순히 법적인 허상이 아닙니다. 진실로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로 받아드려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전가된 죄는 분명히 허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무시무시한 경험이었습니다. 십자가 상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울부짖게 한 경험이었습니다.
로마서 3 : 21 ― 25
칭의에 있어서 법률적 용어로서의 놀랍고도 영광스러운 모습을 우리가 봅니다만 그것만으로 충분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한쪽 면만 보여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칭의는 물론 인간의 죄책감 문제, 죄를 범한 죄인이라는 차원에서 다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죄는 단지 죄책감 그 이상을 의미합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그릇된 관계를 말합니다. 죄는 원래 인간이 하나님과 가졌던 관계가 붕괴된 것을 의미합니다. 실제 인격문제가 관련된 인간관계는 무엇이든지 필연적으로 쌍방에 다 영향이 가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궁지에 처하게 된 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유형의 궁지가 하나님에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의 죄악에 불을 붙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음만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이라는 차원에서 엄청난 문제들을 야기 시킨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들은 또 다른 유형의 곤경을 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초기의 법적 공방에서는 다른 면을 볼 필요성이 없었습니다. 이 때는 거의 비인격적인 요소들만 다룹니다. 그러나 의자에 앉아 있는 판사는 실로 냉철한 판단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냉정한 비인격적인 존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판사는 쌍방에 다 관심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의 임무란 일을 공정하게 다루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편견도 없이 공정하게 이루어졌다고 말해질 수 있어야 합니다. 피고자가 온 종일토록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하여 심문을 받습니다. 판사는 죄수들에게 반감을 살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날에 있었던 모든 일을 낱낱이 진술해야 합니다. 그리고는 저녁이면 집에 돌아갑니다. 그리고는 그 날에 있었던 모든 것들을 다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모든 땅의 권세를 쥐신 심판주이신 하나님께서 그처럼 행할 수 없습니다. 그는 잊을 수 없습니다. 그를 위하여 인간의 죄는 단지 다른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는 단지 그것을 철회할 의도는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죄 문제에 있어서 매우 핵심적인 존재입니다. 그리스도는 이 땅의 판사들이 별 중요한 사항이 아닌 한 읽지 않는 보고서처럼 그냥 방치해 둘 수 없습니다. 그는 단순히 인간의 죄악을 철회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모든 죄에 다 걸려 있습니다. 그리스도에게는 그 모든 것이 단면으로만 처리될 수 없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있는 측면을 다루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는 내일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로마서 3 : 21 ― 25
어제 묵상했던 말씀을 계속 생각합시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죄에 대항하여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실제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존영에 손상을 당한 문제를 그냥 지나쳐버릴 수 없으신 분입니다. 그의 위대한 이름을 모욕한 것을 방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성품이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죄를 구속할 어떤 무엇이 필요한 것입니다. 칭의가 인간 편에서만 다루어진 문제라면 하나님 편에서도 취급되어져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부르너는 이 부분에 대하여 이렇게 요약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희생 제물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평화가 유지되려면 반드시 무엇인가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내포하는 진리입니다. 죄로 인하여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가 개선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엇인가가 발생해야만 합니다. 실로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입니다. 실제로 피가 흘려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창조주시며 주인이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반역행위를 통하여 자신을 철저하게 부패시켰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죄인과 하나님의 진노하심 사이에 누군가가 아니면 어떤 무엇이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두 사이에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이것이 '중보자'라는 말의 뜻입니다. 십자가상에서 흘린 이 중보자의 피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을 만드신 것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하나님이 대속 사역을 하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마술적인 작용이 아닙니다. 복수심에 불타는 신이 피에 굶주려 행하신 요술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대속 사역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편에 놓여 있는 장애물을 다루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은혜의 기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인간과 멀리 있게 했던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게 된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는 제임스 데니 교수가 아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영광은 ...인간에게 있는 문제들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심각하게 그 모든 문제들을 처리하신 것을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확증을 통하여 무서운 죄악을 제거하신 것입니다. 복음의 영광은 하나님께서 무한한 값을 지불하여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화목을 이루신 것을 말씀합니다. 값으로 측량할 수 없는 이 평화는 죄인들에게 값없이 제공되고 있습니다'.
로마서 3 : 21 ― 25
어제 끝 부분에서 말씀드렸던 것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의 피가 인간의 죄악된 실체를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고 죄악의 제거로 인하여 인간에게 평화를 가져다주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이제는 변화된 거룩한 마음을 소유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도 증거하고 있다는 것이 그 얼마나 신비로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너희 죄와 허물을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리라'고 선언하는 이것이야말로 죄인인 인간이 듣는 최대의 복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의 피에 대하여 성경이 거의 말하고 있지 않다면 그것처럼 이상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세 번째 중요한 단어인 구속(redemption)이라는 말을 살펴봅시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이 단어는 앞에서 살펴본 단어들보다 더 깊고 놀라운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그 의미는 '값을 지불하고 속박을 풀어 주는 것'을 뜻합니다. 즉, 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를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구속은 첫째로 죄의 종노릇하던 자리에서, 노예의 상태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속은 둘째로 우리를 위하여 누군가가 외부에서 간섭한 것입니다. 즉 자신을 희생시켜서 우리의 구속을 취득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그 값진 희생이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구속은 셋째로 이처럼 속박에서 벗어난 죄인의 귀결된 상태를 말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지는 영광스러운 자유와 동시에 그리고 역설적으로 그리스도에게 새로이 예속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이 예속이 인간의 자유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이 마지막 부분이 깊이 고려해야 하는 중요한 것이 담겨 있습니다. 구속받는 것은 죄로부터 해방되는 것이요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관계를 가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을 로마서 6장에서 예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하심에 연합하는 것입니다. 실로 로마서 6-8장의 내용은 이 위대한 용어에 대한 설명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로부터 구속시켜(해방시켜) 주신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리스도와 합한 자가 된 것입니다.
로마서 3 : 21 ― 25
'믿음' 이라는 용어가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사용하고 있는 신학적인 용어 중 마지막 단어입니다. 바울과 신약 성경의 사상에서 믿음은 결코 그리스도나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인 태도나 자세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는 믿음은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믿음입니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인을 위하여 무엇을 하셨는지를 믿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라는 단어는 두 가지 용도로 쓰입니다. 하나는 제안적인 믿음(propositional faith-이것은 히브리서 11장 6절에서 믿음은 하나님이 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임을 믿어야 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또 하나는 신약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개인적인 신뢰를 말하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서로 상충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아니 됩니다. 전자가 후자를 대신할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신뢰하는 것으로서의 믿음은 바울 사도의 사상의 주도적인 사상입니다. 이것은 곧 구약 성경의 가르침과 직결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사용되고 있는 믿음이라는 여러 가지 단어들조차도 다 다른 사람에게 내 무거운 짐이 옮겨가는 의미로서의 신앙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는 밤중에 누군가에게 머무는 차원, 또는 완전히 전혀 도움을 구할 수 없는 밑바닥에서 누군가를 기대는 차원에서의 믿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의미에 있어서 도움이 절실한 상태에 있는 자라는 것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믿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사도 바울이 27절 이하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과 관련되는 것입니다. 자랑하는 자는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이 절망적인 상태에서, 완전히 좌절되어 있는 상태에서 그리스도로 채움을 입는 것이라고 한다면 인간이 자랑할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또 한가지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입니다(엡 2:8).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믿도록 주신 선물입니다(빌 1:29). 이 믿음은 복음의 말씀을 들음으로 오는 것입니다(롬 10:17). 다시 말하면 복음 자체가 인간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들을 때 그 복음에 의하여 사로잡힌바 되면 그것이 곧 믿음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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