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묵상

로마서 묵상 [12]

새벽지기1 2021. 7. 25. 06:55

로마서 3:25-26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몇일 전에 우리는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인 하나님의 의가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고 둘째는 율법과 선지자들에 의하여 증거되었다는 것을 살펴보았었습니다. 이것들 중 그 첫 번째가 3:21-31에 펼쳐져 있습니다. 두 번째 것은 4:1-25 말씀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구분은 로마서에서 아주 잘 이루어져 있고 또 잘 정의되고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그 첫 단락에서조차(3:21-31) 심지어 구약 성경을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사도가 칭의와 대속 및 구속이라는 걸출한 용어들을 언급한 후에 25절에서 매우 흥미를 돋구는 언급을 하고 있는데 그 부분을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많은 다른 문장들 안에서 언급한 것처럼 본문에서도 두 번씩이나 '그의 의를 나타낸다' 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진술이 받고 있는 문장구조는 무엇일까요? 이 부분에 대한 현대 번역 성경은 우리들의 이해에 유용한 자료라고 생각됩니다. 우리 번역 성경에 때로 애매한 부분을 종종 현대 번역 성경이 명확하게 해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사하심으로' 가 아님) 라는 표현이 과연 무엇을 지칭하고자 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죄를 다루심에 있어서 그리스도가 죽으시기 전에 죄와 죄인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함축하고 표현입니다. 이와 비슷한 개념이 사도행전 14:16절과 17:30에서도 강조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는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으나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여 회개하라 하셨으니"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매우 중요한 문제가 들어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는 여러 학자들의 의견을 종합하여 내일 더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3:25-26

더람 교구의 경건한 주교였던 핸들리 몰(Handley Moule)은 바울의 진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대속자로 나타나게 되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의혹하고 있는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율법을 선포하셨을 때 그것이 아직 복음에 계시된 것이 아니었던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용납하시고 형의 집행을 유보하시며 그의 진노를 거두신 분으로 비추어지는 그 옛날에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가운데서 그들을 용서하신 것이다'.
사실인즉 내용은 지금까지의 죄는 어떤 의미로서든지 하나님께서 그냥 지나치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몇몇 주석가들에 의해서 생생히 제기되었습니다. 고뎃(Godet)은 그의 주석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지난 4천년 동안 전 우주에 인간에 의하여 나타난 광경은 그야말로 계속적인 스캔들이었다. 심판에 대한 몇몇 엄청난 사례들을 제외하고 하나님의 의는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하여 심지어 어떤이는 과연 하나님의 의가 존재한 적이 있었는가? 라고 반문하기까지 한다. 인간은 이 땅에서 죄를 범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인간은 살아가고 있다. 인간은 계속해서 죄를 범하고 있다. 그럼에도 인간은 백발이 무성한 채로 안연히 살아가고 있다...죄의 값은 어디에 있는가? 바로 이러한 상대적인 무혐의, 무심판 때문에 하나님의 의는 반드시 엄히 나타나야만 하는 것이다'.
제임스 데니 역시 이와 비슷한 논조를 펴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은 죄를 심각하게 다룸에 있어서 그 죄에 대하여 무관심하게 지나쳐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오래참으심과 관련된 섭리의 저주였었다. 이제 이 죄과를 제거할 새로운 것이 왔을 때 그리고 신의 속성을 방어할 태세가 되었을 때...전에는 가능했었을지라도, 죄란 하나님이 하찮게 간주하는 것이다 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가능한 것이 아니다.'

로마서 3:25-26

어제 설명한 인용문에서 주어진 해석 중 한가지 더 말할 수 있는 것은 구약시대에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가 완결한 상태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즉 때가 차서 하나님 편에서 죄를 완벽하게 다루실 것과 비교할 때 죄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구약 시대에는 불완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구약을 공부할 때 바로 그와 같은 견해를 가지고 연구하는 것이 바람직함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를 실지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루셨는지를 보게 하는 안경입니다. 이것은 바울 사도가 3:21에서 불경건한 자들을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며 율법과 선지자들에 의하여 증거를 받은 하나님의 의가 어떻게 죄인을 의롭게 하는 지를 보는 방편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4:1-25에 있는 주제를 충분히 다룰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문을 잠시 눈여겨보는 이 연구는 본 서신의 핵심 주제에 보충적인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전제는 복음의 진면목을 전부 이해하는데 있어서 큰 빛을 비추고 있는 것일지라도 로마서의 핵심 주제에는 부수적인 것일 뿐입니다. 히브리서의 서두를 보십시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히 1:1-2).


이 말씀은 어떤 차원에서든지 장엄한 고백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로마서에서 펼쳐지고 있는 복음의 엄청난 규모와 힘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만들어 줍니다. 이것이 우리들에게 말하고 가져다주는 것은 그 자체에 완벽함이 있지 아니하고 다른 유형의 표준이 필요함을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그 표준은 이 모든 것들 너머에 있는 것인데 그것은 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이 모든 불완전한 것이 완벽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성육신한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본문 말씀 묵상은 일찍부터 하나님께서 주시고 감동하신 무엇을 찾고자 하는 선한 양심들이 있어 왔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거의 정확하지 않았고 자세히 알려지지도 않았던 것이요 미완성 작품이요 분명치가 않고 그럴 것이라고 느끼기만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러한 계시는 인간의 심령을 평온케 하였고 복잡한 마음을 안정시켰던 것이었습니다. 그 시대에는 사람들이 스스로 얼마나 잘못되었는지에 대한 자각도 별로 없었고 하나님도 사람들의 요구에 답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 나가는 문은 오랫동안 잠겨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었습니다. 그러나 이 희미한 것이 분명하게 되어졌을 때 오랫동안 사람들이 묻고 있는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쉽게 답하게 만듭니다. 인간의 과거에 지은 죄에 새겨진 문제의 해결책을 쉽게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는 좀더 설명이 필요한 것인데 내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3:25-26

우리가 구약성경을 놓고 볼 때 율법과 선지자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해결하기 위하여 두 가지 해석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이며, 서로에게 상호 보충적인 이 율법과 선지자는 그 자체로는 다 결점들을 안고 있고 효과도 완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둘은 그리스도를 향하여 달려가게 하였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 목적들이 성취되어진 것들이었습니다. 전자는 제사장적이요 희생적인 요소를 담고 있으며 후자는 선지자적인 사역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구약에 나타나 있는 인간에게 필요한 이 둘의 역할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상세하게 설명된 제사장적인 요소들이 얼마나 세세히 제시되고 있는지에 대하여 놀라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 내용을 상세하게 살펴볼 시간은 없습니다. 그러나 단지 우리는 그 메시지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희생제사는 죄를 치유하기 위한 것이다'.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이 주제는 히브리서에서 아주 잘 서술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의 죄를 지시고 하나님과 화목케 하시는 일로서 자비로우시고 충성스러운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나님 앞에 서서 자기 백성의 죄를 위하여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나타내는 말씀입니다(히 2:17). 죄의 감염과 부패는 제거되고, 율법을 어긴 죄에 대한 형벌은 희생제물로서 값을 치르신 것입니다. 제사제도에 의하여 산출할 수 있는 특별한 통찰력의 요소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죄를 제거하는 것과 관련한 치유 행위, 즉 화목은 하나님께서 하셔야만 하는 무엇이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인간 밖에서 일어나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이룩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들이 올바른 행동들을 하기를 원하신다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헌신도 요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희생제사에 대한 개념은 죽음으로서 하나님께 충성한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3:25-26

계속해서 더 상고하고자 하는 것은 화목함이 밖에서 오는 것이요 인간 너머의 일이라는 사실은 그것을 남용할 가능성으로 이끌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지로 남용이 일어났습니다. 저주의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수많은 희생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선지자들을 일으키시고 그들의 공허한 의식을 지적하며 타락상을 파헤치고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선지자들의 메시지에서 크게 주목할 것은 심령의 변화를 촉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아...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서 6:8). 여기에 선지자들의 메시지와 제사정적인 강조점 사이에는 어떤 분이 제시한 것처럼 기본적으로 상충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선지자들이 선포한 것은 제사장적이요 희생제사적인 요소들에 대한 바른 인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의 바른 사용을 벗어나 남용하게 되었을 때 그 제사들의 진정한 의미가 희석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인정함에 있어서 선지자적인 통찰력은 화목 그 너머까지 가게 되는 것입니다. 즉 화목은 구속 위에서만 근거되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선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한 속성을 만족시킬 수 있는 길이 무엇입니까? 따라서 죄를 구속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하여 선포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불의한 자를 위하여 의로운 자가 죽으신 이유입니다. 불의한 우리들을 의롭게 하여 의로우신 하나님께 나오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배울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로 제사장적인 것과 선지자적인 것, 두 제도는 그 자체 너머에 있는 무엇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둘 자체에는 죄 문제를 해결하는데 부적절한 것들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그 둘은 법적으로도 효력적이 아닙니다. 한편 히브리서가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황소나 염소의 피로 죄를 씻을 수가 없음이 사실입니다(히 10:4). 그 보다 나은 것이 필요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선지자들의 증거는 하나님의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인간의 마음속에서 생산해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킬 만한 것이 인간에게는 전혀 없습니다. 궁극적인 의미로 선지자적인 메시지는 절망하게 하는 것뿐입니다. 인간이 그 요구를 충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난제의 해결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며 그리스도 안에서 충족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위한 희생 제사가 인간 밖에서 오는 것으로 확증되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서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화목을 성사시키시는 분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그가 죽으신 죽음 안에서 구속은 사람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며 인간 밖에서부터 우리가 서야 할 자리에 그 사람인 그리스도께서 서신 것입니다. 그곳에는 죄의 값을 치르는 것이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존엄을 손상시킨 부분을 수선하는 일이 가능한 것이요, 그 두 가지 일들을 하나님 앞에 흠도 티도 없으신 그리스도의 희생제물이 성사시킨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셔야했습니다. 지금 바울 사도가 언급하고 있는 내용을 천천히 다시 보십시오, 우리는 구속 사건의 신비한 모습, 두렵고 의로운 면을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기이한 일을 이루신 그리스도를 찬양하며 살아 계신 하나님만 경배합니다.

로마서 3:27- 31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 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3장 나머지 부분은 세 가지 질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째, 자랑(27절)할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구원의 계획에 있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일을 이루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심지어 인간에게 믿음을 주신 분도 하나님입니다. 일찍이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믿음은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믿음은 선포되는 복음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반응일 뿐입니다. 그 말씀 안에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믿음의 규칙, 혹은 믿음의 참된 원리는 자랑할 데가 전혀 없다는 것을 확증합니다.

둘째, 이 구원이 오로지 한 족속에만 제한시킬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29절).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이 주님의 구속의 은총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이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특별한 종교적인 경험을 했다고 해서 그 길만이 구원의 길이라고 단정시키는 것은 잘못입니다. 구원의 길은 우리들의 종교적인 경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경의 선포에서 찾아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길이라고 가르치며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우리들의 경험담이 구원의 길인 것처럼 착각해서는 아니 됩니다.

셋째, 복음은 율법을 폐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율법을 완성시킵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의 가르침은 율법을 무효화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잘못 이해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구약이 행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가르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제 4 장에서 유대인들이 어떻게 해서 그런 실수를 했는지에 대하여 진술해가고 있습니다.

로마서 3:27-31

어제 살펴본 세 가지 질문 중 첫 번째와 관련하여 스웨덴 신학자인 A. Nygren 학자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의 규칙에 의하여 자랑이 배제된다는 것에 대한 아주 흥미있는 해석을 주었습니다. 그는 율법은 자랑의 뿌리를 제거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덧붙여 설명하기를 '율법은 실제로 우리들의 자랑을 낮게 만들뿐이지 원칙적으로 제거하지는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또 그는 '율법에 근거해서 사는 한 인간은 율법을 더 잘 지키려는 이론적인 가능성을 항상 추구할 것이다...적어도 추측해 볼 때 인간은 자랑이 정당화되어질 그 때를 향하여 달려가게 될 것이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심지어 이 가능성조차도 배제시켜버립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가 우리들에게 값없이 주어진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어떤 공로도 없었고 받을 만한 무엇이 전혀 없음에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행위를 떠나 의롭다함을 받는 길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의 법을 따라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에서 바울 사도는 유대인들에게 자명한 진리를 강조함으로서 답변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진리를(신 6:4) 강조하며 구원의 은총은 유대인들에게만 제한되는 축복이 아니라는 것을 답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은총을 나누어줌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유일한 창구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 창구를 통하여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도 구원의 선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31절에 있는 율법은 전체 유대 종교의 율법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은 율법을 헛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실지로 완성시키는 것이라는 바울 사도의 주장을 보다 더 확고히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르게 이해할 때 유대인들의 종교 즉 구약의 율법은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구약의 율법은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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