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4 : 18 ― 22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아브라함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었다고 분명하게 지적한 사도 바울은 이제 아브라함의 믿음의 속성에 대하여 논의하고 있습니다. 이 논의가 오늘날에도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모릅니다. 24절에서 "우리도 위함이니" 라는 말씀이 시사하고 있는 것처럼 본문에서 다루고 있는 믿음의 속성문제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도 같은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아니고서는 아버지의 집에 올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얻습니다.
우선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매우 의미 있는 출발입니다. 지금 강조하고 있는 바는 아브라함의 믿음 자체가 아닙니다. 도리어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 자신이 더 중요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즉 믿음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강조는 믿음을 주신 하나님께 있습니다. 믿음의 대상은 신실하신 하나님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또는 본질적으로 믿음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있습니다.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하나님입니다. 이 하나님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언급합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전에 모습을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것들조차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리하여 웨슬레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가 말씀하시며 그의 음성을 듣노라면 죽은 자가 새 생명을 받네'
인간을 의롭다하심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를 그의 능력의 말씀에 의하여 인간에게 새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만큼 명확하게 강조하는 것은 없습니다. 일단 인간이 이 사실을 발견하면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게 됩니다. 의롭다함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칭의는 인간을 위해서 모든 것을 행하신 하나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습니다.
19절에서 아브라함은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습니다. 즉 아브라함은 자신의 신체적인 불가능성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그는 도리어 더욱 강하게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전진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약속 앞에서 그는 자신의 쇠약한 몸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따라서 19절의 말씀을 현재적으로 번역해보면 이러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불가능을 보았고, 자신이 처해 있는 실제 상황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믿음은 약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현실 문제에 눈을 감은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현실을 직시하였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이 처해 있는 현실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인간의 불가능성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로마서 4 : 18 ― 22
아브라함과 우리들 사이의 병행점은 매우 큰 격려의 말씀입니다. 물론 아브라함은 신앙의 거장입니다. 하나님의 벗이었습니다.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입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가장 위대한 것은 그러한 것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믿음 안에 있습니다. 그러한 믿음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위해서 행하신 일은 우리를 위해서도 하실 수 있습니다. 오직 믿음의 기초위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얻은 지위를 우리도 획득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가 가진 독특한 지위와 같은 자리에 이르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조상은 아브라함 하나로 족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생애 속에서 보여진 신실한 믿음의 원리와 그가 즐긴 하나님과의 교제 및 그의 섬김에 대한 충성한 열매들은 여전히 우리들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들의 삶에서 하나님께 기회를 드리기만 한다면 주님이 우리를 어떠한 존재로 만드실지는 가히 무제한적인 것입니다. 선하고 영원한 존재로 만드실 것입니다.
믿음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본문에서 우리는 두 가지 표현을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18절과 21절을 함께 눈여겨보십시다: 18절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는 말씀대로..." 와 21절의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이 말씀에서 살펴보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믿음이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 안에 있는 믿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 말씀을 신뢰하였고 그 말씀 위에서 행동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믿음의 본질이요 기초입니다. 믿음은 단지 하나의 일반적인 삶의 특성이라거나 혹은 하나님에 대한 지적인 신념을 말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말씀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 위에서 도전하는 것이며, 그의 말씀으로 그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한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증거를 믿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그의 아들의 죽음과 부활하심과 관련한 말씀 안에서 증거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인하여 내어준 바 되었으며 우리의 의를 위하여 다시 사셨음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것이 우리의 구원의 근거임을 명백히 선언하시고 있습니다. 이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구원의 말씀에 거하도록 초청하십니다. 그 말씀을 믿으라고 부르십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달려 있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사실을 로마서 10:9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이것이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는 믿음입니다. 아들에 관한 하나님의 증거를 믿으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가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들을 위한 약속의 메시지입니다.
로마서 4 : 23 ― 25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예수는 "우리의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25절). 이 말씀에서 보는 '내어 줌과 살아남' 사이의 구분을 사도가 많이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두 경우에 등장하는 "위하여"라는 말은 헬라어에서 '∼ 때문에' 라는 의미로 번역됩니다. 이 의미는 첫째로 각자 다 어떤 것을 회고하는 의미로 취해질 수 있습니다. 즉 '그가 죽으신 것은 우리가 죄를 범하였기 때문이요 그가 다시 살아나신 것은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라는 것입니다. 즉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 바로 우리들의 죄악 때문이고 우리들의 의로움을 위한 것이었다는 회상적인 측면에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 의미를 장래의 어떤 것을 예기하는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의 미래적인 참조로서 해석하는 것인데 우리의 범죄함 연유로 인하여 죽으셨고, 그 죄악을 속죄하기 위하여 죽으셨으며, 우리의 의로움 때문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즉 그 사실은 미래에 성취된 사실이었습니다. 세 번째로는 전반부는 회고적인 것이요 후반부는 미래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과거) 그가 죽으셨으며 우리의 의를 가져오기 위하여(미래) 다시 살아나셨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문법적으로 서로 바꾸어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 차원에서 사도 바울이 본문을 기록할 때 그의 심중에 이러한 어떤 구분을 두고 한 것인지 아닌지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어떤 학자는 사도 바울이 초기 신경의 일부를 인용했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칭의와 연계시키고 있는 다른 본문을 보면(5:9)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결과는 우리들의 죄악 때문이고 그의 부활은 우리의 의를 위함이라는 분리된 생각을 가졌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의 말씀을 우리의 모든 죄짐으로부터 구원받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으셨고 부활하셨다고 해석하는 것이 최고로 나은 것입니다. 바울은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만을 알았습니다. 대속의 죽음을 당하셨다가 다시 사신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 바울이었습니다. 따라서 믿음은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살아 계신 구주 안에 있는 믿음입니다. 그의 죽으심의 가치 때문에 다시 사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이 우리를 의롭게 합니다.
이 말씀 안에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의 죄 문제 해결과 우리가 의롭게 되는 길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죄 사함과 의롭다함을 얻는 길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로마서 5 :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이제 우리는 사도 바울이 다루고 있는 또 다른 위대한 주제를 살펴보게 됩니다. 앞으로 볼 다음 4장의 내용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수여해 주신 하나님의 의가 담고 있는 놀라운 진리들을 언급하는 것들입니다. 성경의 그 어떤 부분보다 앞으로 다룰 4장의 내용들은 성도들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한 단락들입니다.
지금까지 사도 바울은 인간에게 의가 없다는 것과 그 의는 복음 안에서 하나님이 준비하셨다는 것을 언급하였습니다. 우리가 로마서를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라는 말씀에 대한 강해서로 취급한다고 해도 지금까지의 요점으로 충분히 동의할 것입니다. 바울은 인간에게 부족한 의를 지적하였습니다. 그리고 복음안에서 그 필요한 의를 하나님께서 제공하셨음을 언급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 5장으로부터 8장에 이르기까지 바울 사도는 "살리라" 라는 말을 펼쳐가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들의 것인 새 생명의 속성입니다. 소요리문답이 지적하고 있듯이 칭의란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행위로서 그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자기 앞에서 옳게 여겨 받아 주시는 것이니 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돌려주심이요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칭의는 하나님이 하신 어떤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선언하신 무엇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가지는 어떤 느낌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가지신 어떤 느낌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화목하라는 것도 우리의 마음이나 정신에 들어오는 평정한 마음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적대감이 온전히 중지된 지속적인 평화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일어난 죄 문제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을 멈추었기 때문이 아니라(이것은 믿음 이후에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적대적인 관계를 청산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대속적인 피로 우리에게 부어질 진노를 되돌리신 것 때문입니다. 우리가 받을 진노를 그리스도가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웨슬레가 표현한 것처럼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니 우리의 하나님과 화목케 된다' 고 잘못 표현하는 것이 있습니다. 알미니안주의 자들은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것은 우리들이지 하나님이 우리와 화목케 하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내용을 유심히 살펴보면 마치 우리가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주체인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인간 스스로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고 바울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평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이미 그리스도께서 이룩하신 대속의 죽음에 근거하여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한 죽음이 없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화평케 될 수 있습니까?
로마서 5 : 1절이하
지금은 5:1부터 8:39절까지의 내용을 잠시 요약하여 살펴보는 것도 매우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단락의 주제는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새 생명의 특성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어떤 주석가는 5장의 주제를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자유함을 얻는 새 생명을 기술한 것으로 말했습니다. 6장은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는 새 생명을 다루고 있고, 7장은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는 새 생명을 언급하며, 8장은 죽음으로부터 자유함을 얻는 새 생명을 다루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지금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의 특성을 네가지 그림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각자의 그림은 각기 다른 요점을 가지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각자의 요점은 더 많게 그리고 더 깊게 다루어집니다. 전체 그림이 완성될 때까지 우리는 바울 사도가 새로운 측면을 첨가시키고 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흑백 인쇄밖에 못하던 것에 칼라를 입히는 인쇄를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첫 번째 그림은 대략 스케치한 것이고, 두 번째 그림은 그 위에 색을 첨가하고, 세 번째 그림에는 더 많은 색을 그리고 마지막엔 완성된 그림을 보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다음의 4장을 살펴보면 각 장마다 보다 고상한 상태의 삶을 살게 되는 성도의 성공적인 신앙생활을 그린 것이라고 오해하는 위험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각 장을 그처럼 이해하는 것은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곡해하는 것입니다. 한없는 혼돈 속으로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참된 성도의 경험을 풍자화 시켜버리는 것입니다. "알지 못하였느냐" 라는 문구를 세 번씩이나 반복한 것은(6:3, 6:16, 7:1) 이 사실을 명백하게 입증하는 것입니다. 한 단계에서 확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 단계로 점점 나아가는 것이요, 마지막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되는 최종적인 그림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됨이 없이는 누구도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
로마서 5 : 1
이제 우리는 4:24,25절에 있는 "또한 우리를 위하여" 와 "우리의 의를 위하여" 라는 용어와 5:1에 있는 "우리"라는 말 사이의 연결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사실이었던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두에게도 사실이라는 점을 보다 명확하게 설명하는 것은 본문의 이러한 연결점 외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칭의는 하나의 이론이거나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먼 개념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무엇이요 우리에게 반드시 일어나야 할 필요입니다. 실로 그리스도는 죽으셨습니다. 다시 사셨습니다. 바로 우리들에게 의롭다함을 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라는 말씀은 단지 교리로부터 벗어나 실제의 경험속으로 들어감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이 어둠으로부터 빛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나아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학이 단지 하나의 신학적인 이론으로 머무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인간의 심령 속에 파고 들어가야 할 사실입니다. 신학은 인간에게 소망과 기쁨과 평강과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실체여야 합니다.
따라서 지금 5장에 와서야 성령에 관하여 처음으로 언급되어 있다는 것이 의미 있는 것입니다(5:5). 주이시며 생명의 수여자이신 그 분이 성도의 신앙 생활 경험 속에서 하나님의 의를 불러일으키고 심령 속에 믿음을 창출하시는 분입니다. 믿음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복음입니다. 복음 선포에 있어서 새 생명을 일으키는 기적의 은혜가 작동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사도 바울이 언급한 것처럼 믿음은 "들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소요리 문답에서 이렇게 질문하고 답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값 주고 사신 구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가?'(문답 29번) 답: '그리스도의 성령께서 그 구속을 우리에게 효력 있게 적용하심으로 우리가 그의 값 주고 사신 구속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 그 다음 문답에서 성령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구속을 우리 속에서 믿음을 불러일으키시어 효력 있게 적용하신다는 것을 가르쳐줌으로 완전한 그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심으로 그리스도의 값 주고 사신 구속을 적용하십니다. 효력 있는 부르심은 이처럼 성령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우리의 죄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깨닫게 하여 회개하게 하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불러일으키시며 우리의 의지를 새롭게 하십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복음 안에서 값없이 제공하여 그리스도를 품에 안도록 설득하시며 믿게 하십니다.
로마서 5 : 1 ― 4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우리가 본문으로부터 모을 수 있는 첫 번째 사실은 하나님의 의가 전인을 다 커버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화평과 확신의 궁극적인 기초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것은 우리의 과거와 관계가 있는 것을 참고케 하는 말입니다. 과거에는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자였지만 이제는 사죄와 칭의의 은혜 안에서 영원히 거하게 되었다는 것을 담고 있는 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이제 다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적하는 일들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다는 것은 우리들의 현재 생활과 관계 있다는 것을 참고케 하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성도들에게 제공하는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며 교제를 즐거워하는 성도들의 현재의 삶에서 누리게 되는 것들입니다.
소망 가운데 즐거워한다는 것은 우리의 미래의 삶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의 미래는 밝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표현들을 이제 차례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과거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 죄인들이었습니다. 우리가 그 과거들을 돌이켜보고 회상해보면 시계를 돌리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과거는 원상태로 되돌릴 수 없습니다.
"움직이는 손가락이 기록한다. 기록된 자국은 그 대로 남아 있으며 손은 계속 움직인다. 당신의 경건이 그 자국을 지울 수도 없고 단 한 줄도 되돌릴 수 없도다. 당신의 모든 눈물도 그 기록된 말 한마디도 씻어버릴 수 없도다"
죄는 우리들의 전 인생에 걸쳐서 그림자처럼 따라다닙니다. 과거에 손으로 쓴 것이 우리들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우리들이 하는 모든 윤리적인 조직이나 삶의 방식들이 다 붕괴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윤리 도덕이나 삶의 방식은 우리의 과거 문제를 취급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전능하신 간섭하심만이 죄의 무거운 짐을 해결해 주십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서 있는 죄의 장벽을 무너뜨리십니다. 이처럼 죄의 무거운 짐을 가볍게 하거나 해결할 방법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 외에는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우리를 이 죄 짐으로부터 건지십니다.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평화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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