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묵상

로마서16

새벽지기1 2021. 7. 31. 06:46

로마서 5 : 9 ― 11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사도 바울은 5장의 전반부에서 '부끄럽게 아니한다'(5절)는 말씀에 강조점을 두고 논리를 전개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진술을 위한 여러 예증들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매 절마다 "만약 이것이...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니라"는 논리를 폈습니다. 이것은 9절과 10절에서도 "더욱"이라는 말이 강조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일하신 분이라면 우리가 그러한 상태에 있는 동안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게 하는 심각한 장애물을 제거하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 있는 구원의 영광스러운 목적을 달성함과 성도들을 온전케 하는 일은 결코 하나님께 난제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과 적대관계에 있을 때 우리를 위하여 한가지를 이루셨다면 지금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케 된 상태에서 우리를 위하여 다른 것도 능히 이루실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를 통하여 건짐을 받았다"는 것과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는다"는 표현은 동의어입니다. 후자의 표현은 물론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생명을 의미합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10절) 성도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성도들이 경험하는 지속적인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베드로가 조금 다르게 표현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말입니다: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벧전 1:5). 또 히브리서 7:25절 말씀도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바로 이것이 우리를 성화의 교리로 나아가게 합니다. 이 주제는 다음 6장에서 더욱 부각될 주제가 될 것입니다.

로마서 5 : 9 ― 11

9절에 표현된 진리는 10절에서 약간 다르지만 그러나 병행하는 모습으로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칭의'는 '화목'과 동일시되는 용어이고 '죄인들'은 '원수들'과 동일시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받게 된다는 표현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이것이 4:25에 있는 "우리를 의롭다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는 것과 관련지을 수 있습니다. 어떤 주석가가 지적했듯이 이것은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화목케 되었다"는 말씀에 대한 수사학적인 대조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사이에 있는 다른 역할들을 배제시키는 주장입니다.


한편, 또 다른 주장은 우리가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사도 바울이 죄인들이 하나님의 정죄 하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하신 것이 무엇인지와 화목케 되었을 때에 화목케 된 자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지금 무엇을 하시는지 그 차이를 언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도가 경험하는 지속적인 구원의 경험을 말씀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임스 데니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이 말씀의 진정한 뜻은 '우리가 최악의 상태에 빠져 있는 동안 우리를 위하여 도저히 믿기지 않는 것을 가져다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더욱 우리들에게 마지막까지 구원을 가져다주신다'는 것입니다(벧전 1:5, 히 7:25참고).
"살으심"이란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의미할 뿐입니다. 따라서 십자가에 못박히기 전의 생명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그리하여 5:12-8:39까지 성화의 교리가 더욱 부각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로마서 5 : 9 ― 11

본문 11절에서 사도 바울이 마지막으로 그리고 결정적인 결말을 짓고 있는 듯 합니다. 이것은 아마도 그가 전반부의 교리적인 진술을 끝마쳐가고 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그리고 다른 주제로 넘어간다는 것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마지막 절정에 이르는 본문 11절에서 사도 바울은 1:16에서부터 그를 사로잡고 있는 그림을 완성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11절). 그리고는 12절에서 새로운 관심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10절)는 말씀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연합을 함축하고 있는 것임을 지적한바 있습니다. 이 연합은 단순히 하나의 이론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살아 있는 연합을 의미합니다. 기계적인 실재(a mechanical entity)가 아니라 교제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구원의 마지막 또는 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목적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1:28절 말씀과 5:11절 말씀을 함께 두고 읽을 수 있게 도와줍니다.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이것은 타락의 불행한 결말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이었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과 벗하며 거닐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전능하신 자와 동반자가 되도록 지음 받은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이 불행하게도 그리고 비참하게도 하나님과 멀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위대한 구원의 역사는 어두운 배경막에 나타나는 최상의 은총으로 비쳐집니다. 왜냐하면 그 십자가 사역으로 인하여 어둠에 빠진 인간이 건짐을 받고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리에 나오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11절). 하나님과 불화하였던 원인들이 제거된 것입니다. 죄의 모든 비참한 결과들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교제의 즐거움이 회복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의 메시지입니다. 이것이 칭의의 요점이며, 그리스도의 피로 대속함을 입었다는 가르침의 요지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의 내용입니다. 인간의 영혼 속에 있는 은혜의 복음의 결과는 그들이 그렇게 싫어하였고 야유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리에 나오게 하였으며, 그 무엇보다도 더욱 하나님과 교제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은혜의 놀라운 역사요 영광입니다.

로마서 5 : 12 ― 21

"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 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어제 살펴본 죄로 인하여 인간이 처했던 비참함과 복음을 통하여 기적적인 변화를 입은 인간 사이의 대조되었던 요점은 본 장의 내용과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습니다. 이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행하신 일들이 어떻게 인간의 삶 속에 변환되는 효과를 가져온 것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바울 사도는 그의 논리를 펼쳐가고 있는 기본적인 전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8:39절까지 주장하고 있는 내용은 사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논리들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 주장을 더 깊이 설명하는 것들입니다. 그것을 나타내는 접속사가 12절에 등장하는 "이러므로"라는 단어입니다. 즉 이 말은 '그렇다면 이것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라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입니다.


논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놓여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구속받기 이전의 상태측면에서 죄인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이전의 상태에서 아담이 모든 죄인의 대표자였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새로운 질서를 알려주게 되었습니다. 즉 새로운 세계에서는 그리스도가 그 대표자라는 사실입니다. 그 세계에서는 죄의 권능이 부서졌고 인간은 이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옛 사람의 대표자인 아담과의 유기적인 연계성 때문에 인간은 죄인으로 잉태되고 출생되었습니다. 그러나 새 사람의 대표자인 그리스도와의 연계성 때문에 이제 인간은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고린도 전서 15:22 참고). 이처럼 죄와 죽음, 심판과 진노는 아담에게로 거슬러 올라가고 칭의, 용서 및 구속은 그리스도에게로 올라갑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은 더 이상 아담에게는 없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만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아담의 표상이요 대조물인 이래 C. K. 바렛(Barrett) 교수가 지적한바와 같이 '우리는 아담이 저지른 행동의 결과를 이미 나누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 결과를 함께 나누게 된다는 분명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 일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유효한 것입니다.

로마서 5 ; 12 ― 21

비록 문장 구조나 내용이 약간 어렵기는 하지만 본문의 가르침은 로마서 전체 서신의 핵심적인 요점 중 하나입니다. 바울 사도의 주요 논지는 12절과 18절을 함께 읽을 때 파악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13-17절을 삽입구절로 이해하면 됩니다. 이제 바울 사도는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온 것 같이....의의 한 행동으로 많은 사람이 의롭다함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 구절의 기본적인 문장 구조입니다. 사망이 아담으로 말미암아 왔듯이 생명은 지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두 상태의 차이를 비교하며 대조하고 있는 표현은 "아담 안에서" 와 "그리스도 안에서"에 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인간의 비참한 상태가 아담 안에 있을 때였고 그 때의 인간의 상태란 정죄 받은 상태였음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인간이 이제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어둠의 나라에서 불러냄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것입니다(골 1:13).

 

이 가르침을 강조하는 것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지기 전에 먼저 인류는 한 조상으로부터 나온 존재라는 사실을 부각시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아담과 그리스도는 단지 역사적인 인물로서 표현하고 있기보다는 그들은 옛 사람의 대표자와 새 사람의 대표자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각자는 각자의 후손들의 머리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망과 저주가 아담에게 임하였다면 그것은 아담이 그 후손들의 머리였기 때문에 사망과 저주가 그의 모든 후손들에게 임한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에도 대표성의 원칙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가 하신 것은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진 것입니다.

 

이처럼 대표성의 원리란 다윗과 골리앗의 모습 속에서 잘 설명될 수 있습니다(삼하 17:9, 51절). 두 진영의 군사들은 한 사람이 싸움에서 이기면 진 사람 편에 있는 모든 군사가 다 이간 사람에게 속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담은 싸움에서 졌고 그의 편에 있는 모든 사람들도 다 권리를 상실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기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편에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를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로마서 5 : 12 ― 21

12절에서 바로 이 두 가지 문제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죄와 사망 사이의 관계요, 다른 하나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라는 말씀의 의미를 다루고 있습니다. 세상에 사망이 들어오고 그 결과가 온 세상에 넘치고 있는 것은 죄의 결과로 말미암은 것 때문입니다. 나중에 언급하고 있듯이(롬 6:23) 사도 바울은 사망을 죄의 값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에덴 동산에서 인간이 하나님께 불순종한 것을 근거로 한 것입니다. 사망은 죄의 대가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얼마나 심각하게 취급하시는 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12절의 후반부는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는 것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아담의 운명을 타고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 모두는 우리가 저지른 죄 때문에 죽음에 복종해야한다면 다음과 같은 논리적인 추론은 가능합니다. 즉 우리가 성취할 수 있는 어떤 수단으로 인하여 얻는 의로움 때문에 생명에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 사도 바울이 주장하고 있는 것과는 정반대의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생명을 얻는 것은 우리가 어떤 무엇을 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 때문입니다. 그 의로 인하여 우리는 생명에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 사도가 논쟁하는 것은 아담 안에서 모든 인간이 죄를 범하였다는 것입니다. 비록 이것을 우리가 이해하기가 상당히 어렵다할지라도 바울이 주장하고 있는 의미인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어떤 논리적인 모순이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우리들의 개인적인 경험에 의하여 논리적인 모순으로 들어 날 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죄에 대하여 우리가 깊이 이해하고 있는 진정한 개념은 우리가 저지른 죄를 우리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비참한 방법 안에서 우리가 죄를 범합니다. 그 일에 대하여 우리는 결코 도울 수 없는 것이요, 우리가 저지른 죄는 최종적으로 조종할 수 없는 무엇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의 지성이 섬짓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을 우리의 마음이 증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5 : 12 ― 21

12절에서 언어적인 표현의 난제를 조금 더 생각하고자 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헤프 호 판테스 헤마르톤)는 표현에 대한 해석상의 논쟁이 여러 세기를 걸쳐 진행되어 왔습니다. '헤프 호'는 '왜냐하면' 또는 "사실적인 측면에서"라는 뜻으로 분명히 이해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문맥적으로 "그 안에서" 라는 말을 첨가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읽으면 "그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라는 말이 됩니다.


역설적이게도 라틴어 성경에는(Vulgate) '인 큐오'(그 안에서)를 번역한 것이 비록 헬라어의 의미에는 충실한 번역이 아니지만 사도 바울이 의미하고자 하는 말을 정확하게 필역한 것입니다. 본문에 흐르고 있는 저류가 있는데 개인들이 짓는 범죄 옆에 어떤 무엇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무엇은 바로 아담의 타락을 의미합니다. 타락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죄성입니다. 타락은 죄와 사망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해석의 유용성은 13절과 14절에서 찾아집니다.


바울은 율법이 없는 곳에서는 죄가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아담과 모세 시대에까지는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을 때도 죄는 여전히 죄로 남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결과 사망과 저주가 온 세상에 임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담이 죽은 것처럼 아담과 모세 사이에 살았던 사람들도 아담이 죽게 된 그 죄 때문에 죽었다는 것입니다. 즉 그들이 죽은 것은 그들이 아담 안에서 죄를 범하였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들도 어떤 죄악을 실지로 범하기 전에 죽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죽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깊은 측면에서 그들도 아담 안에서 죄를 범하였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 역시 타락한 본성을 타고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아담에게 속한 자들입니다. 사망의 저주와 그림자에 가려진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여기서 사망은 모든 인류 위에 폭력적인 존재로 군림한다고 지적합니다. 인간에게 자기를 섬길 것인지 아닌지를 묻는 법이 없이 자동적으로 죄를 섬기게 합니다. 인간은 죄의 법에 순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흐릿한 장면가운데서도 우리는 한가닥 빛을 볼 수 있습니다. 14절입니다. 아담과의 우리의 관계는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예시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이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사는 자가 될 수 있다는 빛을 바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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