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 로마서 5 : 1 ― 4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
우리의 과거의 죄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되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바울 사도가 말하는 두 번째 단계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 안에 들어감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현재 삶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들어간다'는 말로 번역된 단어는 법정에 출두하는 것과 관련된 개념을 시사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의미는 그보다 훨씬 풍부한 의미가 담겨 있는 말입니다. 보다 더 명확한 그림은 예배자가 희생제물을 드림을 통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던 구약시대의 장막을 연상케 하는 것입니다(히 10:19이하). 이제 우리들에게는 희생제물인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지성소에 들어가게 하는 새롭고 산 길(LIVING WAY)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하시는 자리에는 배제되었지만 이제는 우리가 단번에 하나님과 나누는 영원한 교제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영광스러운 보물 창고로 인도 받은 것임을 연상케 합니다. 그 보물 창고에서 우리는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하여 예비한 것들이요 너희는 그 모든 것을 마음껏 누리라, 너희는 이곳에서 너희가 필요하게 될 모든 것 보다 더 많은 것들을 발견할 것이다'는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실로 우리는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가 큰아들에게 한 말을 연상합니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야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다". 이것이 들어감을 얻었다는 말의 뜻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더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과거와 우리의 현재만 말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도 하나님의 축복에 포함되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합니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미래는 소망에 찬 밝음입니다. 복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경험하는 모든 것들은 미래를 바라보는 전망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선택받은 자들입니다. 그의 영원한 영광에 동참하도록 부름을 받은 자들입니다. 과거는 지워지고 변화된 우리의 현재는 그 영원한 영광을 위한 준비시키는 단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며 즐거워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 동참하게 될 것이라는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칭의는 우리의 과거와 현재 및 미래의 삶을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았는데 또 다시 불의하다는 판정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칭의는 단번에 일어난 영원한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새로운 지위를 변개시킬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8:39에서 사도 바울이 사용한 용어를 빌리면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화) 로마서 5 : 1 ― 4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만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성도는 고난도 즐거워합니다(3절). 여기서 사용된 즐거워하다는 말은 2절의 단어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도 바라고 즐거워할 뿐 아니라 고난조차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 일이 어떻게 가능하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첫째로 이 말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악한 마귀는 우리들의 삶에서 주도권을 상실한 것이요, 더 이상 우리를 주관할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고난은 우리들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이 가진 목적을 더 가속시켜 가는 도구로 간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그 모든 환난 가운데서 '정복자' 이상의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사단이 우리에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든지 그 모든 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안에서 더욱 경건하게 살게 하는 것이 될 것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고난받으심을 바라보게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도리어 고난이 하나님을 더 잘 섬기도록 도와주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과 핍박으로 인하여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기보다 실지로 우리들의 기쁨이 도리어 그 환난 가운데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은 믿음에 더 힘을 얻게 되고 그 의미의 풍성함에 사로잡히는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일입니다. 우리가 선택하는 이 일은 사단의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황폐하게 됨을 알게 할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에 있어서 우리는 배나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흥미로운 문제를 야기시킵니다.
어떤 주석가는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의 독자들이 '과연 이 구원이 최종적인 것입니까?' 라고 묻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인간의 복잡한 모든 문제들에게 필요한 안전한 것입니까? 라고 묻는 질문, 인간의 모든 필요를 채우고 만족시키는 구원입니까? 시작을 안전하게 구원하신 것처럼 우리들의 미래도 구원하는 확실한 것입니까? 라고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라는 것입니다. 과연 지금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구원은 가능한 것입니까? 확실하게 입증할 수 있습니까? 이 문제들을 우리는 내일 묵상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수) 로마서 5 : 1 ― 4
어제 말씀 묵상에서 던진 질문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해당되는 것들입니다. 그러한 질문들은 현대인들도 가지고 있는 의문점들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나는 그 구원을 끝까지 잘 지킬 수 있을까? 우리가 직면하는 어려움은 없을까? 현대인들의 이러한 질문은 충분히 답해질 수 있는 것들입니다.
어려움이란 위험한 무엇이라기 보다는 실지로 믿음의 인내의 기초입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전적으로 내맡기려할 때 주저하게 하는 요소들은(물론 우리들은 대가를 계산해봅니다만) 도리어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심령 안에 있는 믿음을 더욱 확고하게 하며 온전히 세워가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끝까지 인내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 아니함은 나의 의뢰하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니라"(딤후 1:12).
성도는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것들에게 얽매여 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환난이 주는 유익이 무엇인지를 알고 즐거워합니다. 성도는 환난이 결코 자신을 부끄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프리쳐치 신학교 조직신학 교수였던 핀레이슨(R. A. Finlayson)목사는 영광이 이르게 되는 이 부분에 대하여 두 가지 길을 설명하였습니다. 하나는 칭의와 평강과 들어감, 소망, 영광이요, 다른 하나는 고난, 인내, 경험, 소망, 영광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평행점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복음의 목적과 주관적인 실체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것에서 바울은 우리의 구원의 객관적인 실체가 무엇인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에게 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유업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기 이전에 이미 있는 사실들입니다. 그 사실들이 우리들의 경험이 되는 길은 고난을 통해서 입니다. 실로 구원이 내게 주어졌다는 분명한 확신은 고난으로 입증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과 더불어 친히 증거 하는 성령의 역사하심과 더불어 오는 확신입니다.
그리스도에게 헌신한다는 것은 겸허하게 꾸며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것이요, 우리의 완강한 고집을 꺾는 것이요,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요 그리스도가 당하는 모욕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항상 고난이라는 말로 대변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초기 모든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기뻐하였던 그 이유인 것입니다. 고난은 성도들의 회심과 칭의에 대한 확실한 보장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존재임을 나타내는 도장인 것입니다.
(목) 로마서 5 : 5 ― 8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성도들의 소망이 결코 실망스럽다든지 또는 부끄러운 것이 아닌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도의 마음속에 부어진바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왜 이것이 복음의 소망에 대한 완전한 확증이요 방어로 간주해야 합니까?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되어졌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인을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바로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죽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죽음이 우리를 죄의 형벌로부터 건져주시는 능력이 있는 것이라면 가장 큰 문제인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그러한 능력을 발휘하셨다면 나머지는 아주 손쉬운 것입니다. 그의 다시 살아나심이 우리를 매일 지키실 것이요 영광에 이르도록 인도하실 것이라고 믿는 것은 쉬운 것입니다. 이것을 설명함에 있어서 장애물 달리는 선수라는 그림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넘어야 할 가장 큰 장애물은 죄의 실체였습니다. 그러나 한번 넘었던 것은, 그의 죽으심과 부활로 단번에 완전히 이루어진 이것은 마지막 골인지점까지 능히 달려가게 하는 원동력일 것입니다. 이제 방해할 것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넘었던 강력한 장애물인 죄와 견주어서 우리를 영광에 이르도록 인도하는데 남아 있는 장애물은 하나도 없습니다. 본문에 쓰인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말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구원함을 받은 성도에게 있어서 하나의 열매인 하나님을 위한 우리의 사랑은 본문에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사랑을 언급함에 있어서 사도 바울은 추상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인간들에게 보여주시는 일반 은총에 의한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이루신 그 사역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옛 스코틀랜드 목사 중 한 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십자가는 영원한 사랑의 절정이다(the cross was the noon-tide of everlasting love). 영원한 자비의 절정을 비취는 광선이다'. 그 얼마나 진실한 고백인가?
하나님의 사랑을 확정하고 나타낸 것은 십자가상에 달린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8절).
(금) 로마서 5 : 5 ― 8
그러나 성도들의 구원의 확신은 단지 하나님의 사랑의 실체에만 근거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우리들 마음속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들의 경험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안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본문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라고 표현한 것은 우리들의 마음속에 성령께서 퍼부으셨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이 표현은 오순절에 성령의 부어주심의 역사를 말할 때 사용하는 단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성도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경험을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깊이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하나님의 영입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을 개인적으로 성도 각자의 마음에 적용하시는 분입니다. 그리스도가 이루신 것을 개인적인 것이 되도록 적용하십니다. 이처럼 의롭다함을 받는 자리에 이르게 되면, 화목케 하는 큰 은혜를 받게 되면, 복음의 의미를 보게 되는 눈을 가지게 되면 하나님과 화목케 되는데 그것은 곧 성령의 일입니다. 의롭게 하시는 은혜를 굳게 붙들게 하는 믿음의 선물을 수여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성령뿐입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이 없이는 구원이란 들을 수 있는 무엇이 될련지는 몰라도 결코 개인적인 경험이 되어질 수는 없습니다. 구원이 우리들의 것이 되도록 역사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입니다. 성령에 의하여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 주신바 될 때 우리의 내적 존재에 큰 빛이 비추이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을 비추이는 것을 뜻합니다. 인간들의 심령 속에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적용하는 것은 성령의 직책이요 사역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성령께서는 우리들의 심령에 일격을 가하는 최선봉책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구속의 사역을 심령 속에 단호하게 적용시키시는 분이 성령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이렇게 부연 설명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전능하신 창조주께서 혼돈과 인간의 죄의 모든 어두움을 집어넣으신 장소이며 어두움에 빛을 가져오는 능력의 말씀을 선언하는 곳이요 인간의 아들들에게 생명을 가져다주는 장소이다. 그곳에서 우리 마음의 어둠을 뚫게 하는 빛이 비추이고 은혜가 우리의 침침한 눈을 어루만져주는 곳이며, 그리스도의 사랑스러움을 보게 하여 주며 우리의 갇힌 감옥 문을 열어 주는 자비를 비추이는 곳이며, 우리의 손에 왕의 사면장을 쥐어주는 곳이다'.
(토) 로마서 5 : 5 ― 8
어제 묵상 가운데서 '감옥 문'에 대하여 언급했었습니다. 이 표현은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의 극단적인 상태와 죄의 깊은 수렁을 상기해주는 표현입니다. 잃어버린 상태에서 인간은 진실로 무력한 존재이며 전혀 소망이 없는 자입니다. 6장 끝에 나오는 불의한 사람이라는 표현이 이를 더 밑받침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떨어져 있는 존재(엡 2:3,12), 하나님과 함께 하지 못하는 존재, 하나님을 닮지 않는 존재요(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했기 때문임),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음, 골 1:21)가 죄에 빠진 인간입니다.
7장에 와서 의인과 선한 자 사이의 대조는 바울이 8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의인이나 선인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위한 것으로 들어내고 있는 곳에서는 더 크게 구분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사랑은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의 범위와 역량을 넘어 서 있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가 죽으심으로 확증되어진 사랑입니다. 이것이 곧 우리를 위하여 가지신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라고 물을 것입니다. 그 물음에 답할 것이 여기에 있습니다. 십자가상에 나타난 행함이 있는 사랑입니다. 단순히 말로만 입증하는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죄를 다루신 행동으로 보이신 사랑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 안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신 행동을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들추어 우리를 정죄할 수 있는 것이 더 이상 아무 것도 없게 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열어 놓은 길을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러한 사상은 한 신학자의 고백과 같이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하나님의 움직임'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나타나기 전에 때가 이를 때까지 하나님이 기다릴 수 없었고 그리고 구약에서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하여 언급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보는 그림은 구원하시기를 열망하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강권적인 사랑입니다. 그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주일) 로마서 5 : 9 ― 10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
본 장의 전반부에서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과 같이 사도 바울의 논증은 "부끄럽게 아니함"에 강조점이 있었습니다. 매 단락마다 '만일 ...이라면 얼마나 더하겠느냐?' 라는 논리를 폈습니다. 이것은 9절과 10절의 '더욱 ...하니라'는 말을 더 강화하는 문구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행하셨다면, 그리고 우리가 여전히 동일한 죄인의 상태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을 제거하셨다면 우리 안에 있는 구원의 은혜로운 목적하심과 온전케 하심에 있어서 지속적으로 이루어 가실 하나님은 어려운 문제들을 인하여 난감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자리에 있을 때에 다른 것을 이루신 하나님이었다면 다른 일도 능히 이루실 수 있으신 전능한 하나님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와 화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를 통하여 구원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의 아들의 생명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은 것입니다. 여기에서 생명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말합니다.(물론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생명은 십자가상의 이전의 모습이 아니라 그 이후의 생명을 말합니다).
지금 바울의 논지는 삶의 현장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성도들이 경험하는 지속적인 구원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은 약간의 다른 방도로 사도 베드로가 베드로전서 1:5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히브리서 7:25에서도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므로 자기를 힙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이것은 우리를 성화의 단계로 인도하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다음 장에서 크게 강조되고 있는 주제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