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4 : 1 ― 8
우리가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충분히 이해하고 감격스러워 하기 위해서는 사도 바울이 본 서신을 읽는 독자들 마음속에서 일어난 한 질문에 대하여 답하고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서신의 형태에 대해서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복음에 대한 언급에 있어서 유대인들과 한 토론을 벌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유대인들은 후방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확고히 방어하는 싸움을 한 자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사도의 강하게 몰아 부치고 있는 예리한 논리적인 공격 앞에서 휘청거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3:31에서 바울 사도가 율법을 온전히 세우는 복음에 대하여 언급하자 이 유대인은 마지막 비장의 무기를 꺼내들고 있습니다.
이제 이 유대인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도전적이고 거의 승리를 쟁취한 것처럼 일격을 가해 옵니다: '아브라함에 대하여는 어떻소?, 바울이여, 아브라함은 당신의 논리와 어디에서 일치한다고 생각합니까? 아브라함에 대하여는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왜냐하면 적어도 내 생각은 이 문제에 있어서 아브라함과 일치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유익했던 것은 제게도 유익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지금 사도 바울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영광스러운 진리의 말씀을 함에 있어서 누구도 자랑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다(3:27)고 언급한 것을 유념하십시오. 이것은 지금 유대인의 최후의 공격적인 발언에 대하여 답변하고 있는 것과 연계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만약 지금 유대인이 믿고 있는 것처럼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한다면 아브라함은 충분히 자랑할만한 근거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4:2).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 바울의 논지입니다. 그 사실을 바로 4장에서 펼치고 있습니다. 그의 계속적인 주장을 펼침에 있어서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에 대한 두 가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우선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확증되어졌다는 것입니다(3:21-31). 두 번째는 그 사실을 율법과 선지자들이 증거하였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두 번째 사실에 대하여 바울은 주목하고 있습니다(4:1 이하). 실로 바울 사도는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게 되었다는 유대인의 주장에 대하여 단호하게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는 "당신은 아브라함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만 그 부분에 대하여 이제부터 사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제 나는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그의 믿음이었지 행함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여 보이겠습니다. 아브라함의 경험은 나의 은혜 교리를 충분히 입증하고 있음을 보여주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논리가 본 4장 전반에 걸쳐 흐르는 것입니다.
로마서 4 : 1 ― 8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가 율법과 선지자들에 의하여 증거되었다는 바울의 논리적인 새로운 접근 방식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복음을 선포함에 있어서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더욱이 계속해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반박을 위해서도 이 논리는 의미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구원의 메시지로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서도 이 접근방식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한 기쁨과 평강에 대하여 아버지에게 설명한 한 여성의 사례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녀는 어떤 모임에서 주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당시 부모님, 특히 아버지와 매우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사회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 그녀의 아버지가 보여준 즉각적인 반응은 자기 딸이 어떤 새로운 종교에 빠진 자로, 또는 극단적인 사교적(邪敎的)인 단체에 가입된 자로 간주하였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 딸이 경험한 것을 이해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그가 종교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매주 어김없이 교회에 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러한 일에 시간을 보낼 여유가 없단다. 나는 대대로 장로교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다. 내 선친들에게 유익했던 것은 여전히 내게도 유익한 것이란다. 그리고 네게도 유익한 것임이 틀림없다'.
이 아버지는 더 어떻게 나빠질 수 없는 사람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에 충실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은혜의 교리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정통적인 교리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회심의 열매를 말하고 있는 그의 딸에 대한 반응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전통 안에서 그가 붙들고 있는 신앙관하고는 배치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우리의 선조들이 굳게 믿었던 은혜의 교리에 정면으로 위배된 신앙을 가진 자입니다. 오늘날 대대로 신앙 생활을한다고 믿는 자들 가운데서 구원의 기쁨과 감격에 사로잡힌 경험이 없이 단지 교회당에 충실히 다니는 것만으로 믿음 생활을한다고 믿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참된 복음의 열매는 기쁨과 평안가운데서 주의 사랑에 감격하는 생활입니다. 엄숙함이나 형식 자체만을 고집하지 않습니다. 그 속에 영적 환희가 있습니다. 영적 생명의 활발한 활동은 진정한 복음의 열매를 수반하는 것입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광신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주님이 주신 기쁨입니다. 감사요, 찬양입니다. 은혜만이 가져다주는 열매입니다. 행위는 스스로의 엄격한, 절도 있는 형식만을 자랑합니다. 거기에는 주님의 은혜가 자리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 4 : 1 ― 8
아브라함에 관한 질문에 대하여 답하고 있는 바울의 응답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는 마지막 논지를 내세우면서 랍비들이 무엇을 말했는지, 또는 회당의 지도자들이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 지를 내세우지 않고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를 가지고 논박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에게 효과적인 것이었다면 오늘날에도 우리들의 논쟁에서 가장 효과적인 것입니다. 성경이야말로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권위 있는 계시의 창고입니다. 구원론은 오늘날도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점검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또는 신학교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모든 가르침은 다 성경에 의하여 점검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것들은 아무리 좋아 보여도 사용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개혁 신학의 한 원리입니다.
바울 사도가 창세기 15:6절로부터 인용하며 언급하고 있는 문맥은 적어도 아브라함을 생각할 때 행위가 관여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가능성이 없는 것입니다. 여기엔 오직 믿음만 연관될 뿐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그대로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지금 사도 바울의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그렇다면 만일 아브라함을 하나님에 의하여 의로 여기신 바 되었다고 한다면 아브라함이 의를 위하여 선한 행위를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의는 단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여기신 바 되었다' 는 말은 문자적으로 '아무개의 구좌에 집어넣다'(put down to one's account)라는 말입니다. 즉 믿는 자 편에 하나님의 의를 주입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행위로 말미암지 않는다'는 말은 행위 자체가 중요하지 않다든지, 또는 불필요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선한 행위 자체가 무익하다거나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해 주시는 소망의 근거로, 또는 구원의 조건적인 근거로 행위를 내세우는 것은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로마서 4 : 1 ― 8
사도 바울은 창세기 15:6 말씀에 대한 해석을 시편 32편의 내용을 인용함으로서 더 확정시키고 있습니다. 즉 바울은 '지금 내가 아브라함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은 정확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이 시편에서 다윗을 통하여 그리고 다윗에 대하여 똑같은 진리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바울은 창세기 15:6에서 '의로 여기신 바' 되었다고 하는 표현을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는 이 시편을 가지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 시편에서 "의가 주입되었다"고 하는 말은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7절)라는 말과 동일한 말입니다. "죄를 인정치 아니하신다"(8절)는 표현도 죄를 제거하셨다는 측면에서 죄 사함을 받았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죄책으로부터 벗어난다는 말은 의의 주입으로 말미암아 수반된 축복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셨기 때문에 죄의 모든 짐으로부터 해방된 것입니다. 이것은 의롭다함을 받은 자에게 주어진 축복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복음을 이해함에 있어서 바울의 가르침에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고후 5:21).
바울은 의로 여기신 바 되었다는 말의 두 가지 형태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3:21이하에서 이미 다루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죄와 허물을 다 씻어내는 하나님의 목욕탕이었습니다. 우리들의 죄를 그가 담당하셨습니다. 그의 구좌에 입금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우리들 구좌에 입금되지 않는 것입니다(왜냐하면 두 번 입금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들에게 주입된 것입니다. 죄의 유입이 단지 허구적인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받아야 할 모든 저주를 그가 친히 당하시는 것을 의미하는 한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들에게 주입되는 것 역시 허구적인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에 기인한 축복이며 영광의 실체인 것입니다.
로마서 4 : 9 ― 12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받을 자에게 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도니라"
3:27-31에 있는 질문들을 잠시 되돌아보면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과, 그렇기 때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하는 문제에 대한 바울 사도의 첫 번째 답변에서 바울이 다음 질문을 취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말은 오직 할례(또는 유대인들)와 연관되어 설명할 수 있는 것인가?' 바울의 반대자들은 다윗이 말하고 있는 복이란 오직 유대인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유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유대인들에게 이 말을 쓴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의미하는 것은 결코 이것이 아닙니다. 그는 다시 아브라함에게 되돌아가 설명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오직 유대인들에게 한정된 사실만 언급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그가 할례를 받기 전에 이러한 축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즉 아브라함이 할례를 통하여 유대인이라는 이름을 받기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의로 여기신 바 된 것입니다. 그러한 의식이 언급되기도 전에 그는 의롭다함을 받은 것입니다. 창세기 15장에 있는 성경 기록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할례문제는 17장에 가서야 비로소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할례는 칭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할례는 그의 칭의를 확정하는 것일 뿐입니다. 할례가 칭의를 논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인치는 표시일 뿐입니다(11절). 따라서 유대인들이 할례에 깊은 신뢰를 두고 반박하였으나 바울의 논증 앞에 다시 흔들리게 된 것입니다. 바울의 이러한 설명은 할례나 성찬 특히 세례식 과 같은 교회 의식을 이해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줍니다.
결혼 반지 역시 하나의 표시입니다. 결혼을 한 사이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실지로 결혼이 성립되지 않았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단순히 반지일 뿐입니다. 누구든지 결혼반지를 끼고 다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지가 결혼을 이끄는 것이 아닙니다. 즉 결혼 예식이 거행되고서야 비로소 가치가 있는 반지가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할례나 세례식은 일종의 표시일 뿐입니다. 은혜와 구원의 인침을 나타내는 표시입니다. 그러나 내적인 역사함이 없이는 외부적인 그러한 표시는 아무런 효력이 없습니다.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도리어 매우 위험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러한 의식들이 무시되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의식들은 각각의 가치가 있는 것들입니다. 우리 주님에 의하여 제정된 의식들입니다. 결혼한 이후에 결혼반지를 끼지 않고 다니는 부인은 매우 이상한 여자일 것입니다.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결혼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혼반지는 부부관계에 효력을 발하는 하나의 상징적인 요소인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는 것도 이미 구원받은 사실을 인치는 표시이며 세례를 받음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와 우리들과의 관계가 연합된 것임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4 : 13 ― 17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 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그러나 한가지 더 다루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바울은 이미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은 것이 아님을 밝혔습니다(1-8절). 할례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9-12절). 그리고 이제 그는 자신의 주장을 다른 용어를 가지고 밀고 갑니다.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는 불가능한 것임을 언급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는 율법과 약속을 대조하며 이 사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만일 율법이 칭의와 어떤 연관이 있다면 약속은 아무 효과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지로 율법은 칭의 문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즉 바울이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아브라함이 의롭게 되었을 때는 아직 율법 자체도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주제를 바울은 갈라디아서 3:17-18에서도 다루고 있습니다. 율법은 아브라함 때로부터 430년 후에야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그 목적은 칭의(稱義)의 길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갈라디아서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사람들을 믿음에 갇혀 있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의롭다 할 수 있는 유일한 그리스도에게로 이끌기 위한 몽학선생이 되게 하려함이었습니다(갈 3:23-24).
이것을 강조하는 것은 율법의 목적에 대한 유대인들의 이해 때문입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는 힌트를 얻어 그 목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본문 15절에서 율법이 진노를 이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인간을 정죄 아래에 놓이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로마서 첫 세장의 내용에서 다룬 것들입니다. 율법은 인간을 죄인으로 규정하며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한 죄인인 것을 선언합니다(롬 3;19-20). 우리는 여기서 바울 사도가 다른 서신들에서 할례에 대하여 진술한 것들을 쉽게 첨가하여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니라"(갈 6:15), 둘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 5:6). 셋째,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고전 7:19).
이상의 세 구절들을 순서대로 살펴볼 때, 이것은 로마서 4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바울 사도의 기본적인 논증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실로, 중생과 믿음 및 성도들의 윤리 등을 포함한 복음 메시지에 대한 요약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하여 볼 때 구원은 이처럼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로마서 4 : 13 ― 17
13절 말씀에서 언급한 약속, 즉 아브라함은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는 약속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여러 언약들의 요약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창 12;2 이하, 13:14 이하, 15:5,7,18이하). 이 약속들로부터 바울의 실제적인 요점, 즉 구원과 동일한 용어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전개하고 있는 것처럼 본질적으로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선물 개념입니다. 따라서 구원을 혹 있을 수 있는 율법을 지킨다는 차원에서 말하는 것은 전적으로 일치되지 않는 주장인 것입니다. 실지로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제외하고 아무도 없습니다. 약속을 얻는 것과는 거리가 먼 율법은 도리어 진노를 불러일으킬 뿐입니다(15절). 왜냐하면 율법은 죄악을 일깨우고 우리의 허물을 들추어내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죄를 심히 죄 되게 하는 것입니다(7:13).
그렇다면 율법은 구원과 정 반대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과 약속은 상반되는 것이지 일치할 수 없습니다. 서로 배타적인 것들입니다. 다른 세계에 속한 것입니다. 지금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것들, 율법이나 죄악 및 진노는 이 세상에서(1:18-3:20절의 세상) 작동되고 있고, 아브라함과 모든 진실된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리는 세상은 은혜와 약속 및 믿음이 작동되는 세상입니다(16절).
그렇다면 약속은 율법에 의존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의존되는 것입니다(인간 편에서), 그리고 하나님 편에서는 은혜에 의존되어 있습니다. 이 은혜는 율법의 영역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한정될 수 없을 뿐 아니라(유대인들), 적어도 그들이 아브라함처럼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약속들을 받아드리지 않는 한 그들을 명백히 배제시켜 버립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누구든지 구원의 은혜를 입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명백하게 선언하고 있는 진리입니다. "내가 너를 열국의 아비로 삼으리라" 고 한 약속의 의미가 바로 이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14절과 15절에 대한 칼빈의 주해는 그 점을 아주 강조하고 있습니다: '만일 인간의 구원이 율법을 지킴에 달려 있다고 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인간의 양심은 어떤 확신도 가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도리어 불안에 떨며 두려움에 사로잡힐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인간은 절망에 굴복하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 자체는 불가능한 것이 되어 인간에게 어떤 열매도 맺지 못하고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를 전적으로 은혜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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