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영적 방황은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영적 난민을 발생시킨 구조
온 몸에 빨간 점이 생기고 열이 오르고 눈가는 풍선같이 불어 오르고 잠은 안 오고 몸은 힘이 없고 이러다가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신이 없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아프면 찾아 가는 것이 병원입니다. 동네 의원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차도가 없었습니다. 좀 더 큰 병원을 찾아 갔습니다. 진단을 하고 약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차도가 없습니다. 오히려 통증의 범의가 더 넓어질 뿐입니다. 그러다가 양약에서 한약으로 변화를 시도하였습니다. 그런데 동일하게 차도가 없었습니다. 정말로 힘이 없는 상태에서 제 몸을 잘 알고 있는 중의인 장로님을 찾아 비행기를 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문제의 근원을 찾았습니다. 침과 약을 반복하고 휴식을 취하였습니다. 2주 만에 차도가 있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힘든 시간을 이기고 일상으로 돌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누구나 병이 걸릴 수 있습니다. 감기도 걸리고, 전염병도 걸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빨리 회복하기 위해서는 진단이 정확해야 합니다. 진단이 잘못되면 처방은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처방이 잘못되면 회복의 길은 요원합니다. 그래서 질병에서 건강한 삶으로의 전환을 위하여 무엇보다도 정확한 진단과 처방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단지 우리의 육체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영적인 우리의 삶에도 동일합니다. 영적인 삶의 활력을 위하여 진단과 처방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영적 난민이 발생하여 방황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발생하게 된 원인은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여기에는 세 가지 측면에서 진단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교회의 구조적 요인입니다. 두 번째는 목회자의 신학과 세계관입니다. 세 번째는 성도의 신앙하는 자세입니다.
1] 교회의 구조적 요인
하나는 교회의 구조적 요인입니다. 영적인 방황을 일으키는 요인에 교회의 구조적 문제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작금의 교회가 성도들에게 어떠한 신뢰를 주고 있는지 되 새겨 보아야 합니다. 기윤실이 지속적으로 조사한 한국 교회 신뢰도 조사에 의하면 한국교회의 신뢰도는 참으로 부끄러울 정도입니다. 도대체 이러한 상황이 주어진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교회가 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우선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한 확고한 지식의 부족입니다.
성도들이 교회에 대하여 많이 듣습니다. 교회가 무엇인지 안 가르치는 교회는 없습니다. 새가족 공부부터 교회가 무엇인지를 가르칩니다. 모든 성경 공부에서 교회에 대한 이야기가 없는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고한 지식의 부족이라고 말하는 것은 가르치는 교회가 가르침대로 세워지지 않기에 배우는 성도들이 확신을 갖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이 말하고 가르치는 대로 교회가 세워졌다면 교회는 좀 더 건강하였을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교회에 대하여 배운 지식을 말하면 잘 대답합니다. 그런데 너희 교회는 어때? 라고 물을 때 자신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이 말하는 교회와 우리가 경험하는 교회가 같아져야 합니다. 격차가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가까워질 때 비로소 교회가 신뢰를 얻습니다. “예수님은 좋은데 교회는 싫다”는 말은 전혀 성립될 수 없는 말인데도 불구하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들리는 것은 경험하는 교회가 성경의 교회와 이질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러한 모습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비판하고, 성도의 자리에서 영적 방랑자의 자리로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지상의 모든 교회는 그리스도가 설립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교회를 세운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6:118] 그러므로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에 따라 세워져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그의 지체들입니다. 즉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지체공동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를 떠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에서 떨어지겠다는 뜻이 됩니다. 성도가 의미있는 존재가 되는 것은 교회로 있을 때입니다. 교회로 있지 않고서는 성도든 더 이상 성도의 의미를 가질 수 없습니다.
둘째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이면적 의미를 바르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교회는 영적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는 곳입니다. 교회를 통하여 성도는 태어납니다. 교회 없이 성도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성도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로서의 교회의 의미를 잘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무너지면 우리는 방황하게 됩니다. 어머니가 없는 자녀를 생각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불쌍하기 그지없습니다. 더구나 믿음의 선배들이 말하였던 것처럼 교회를 어머니라 부르지 않고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습니다. 이렇듯 교회는 생명의 젖줄입니다.
셋째 참된 교회의 표지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모든 교회를 참된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참된 교회가 있듯이 거짓된 교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교회는 생명을 출산하지만 거짓된 교회는 멸망에 이르게 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교회를 바르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참된 교회의 표지는 믿음의 선배들이 한결 같이 외쳤듯이 바른 말씀이 선포되는 교회입니다. 바른 말씀의 선포란 성경이 말하는 것을 말하는 교회입니다. 성경을 통하여 성경을 해석하는 교회입니다. 성경을 강해하는 교회입니다. 자신의 철학 욕망을 전하는 교회가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것을 말하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칼빈이 말하였듯이 성경이 가는데 까지 가고 성경이 멈추는데 멈추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참된 교회의 아름다움 가운데 하나는 성경을 연속 강해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강해의 전부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연속 강해는 설교자로 하여금 성경에 복종하게 하기 때문에 가장 좋은 설교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바른 성례가 집행되는 교회입니다. 세례와 성찬이 신실하게 집행되는 교회가 참된 교회입니다. 세례는 성도의 공적인 고백입니다. 그래서 세례를 통하여 한 가족임을 보여주는 외적 표지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의 구원에 대한 최종 판단은 하나님이 하시지만 우리의 눈에 보이는 믿음의 고백은 바로 세례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세례는 새 생명의 탄생을 온 성도들이 함께 목격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교회의 가장 큰 축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교회의 살아있음을 바로 세례를 통하여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찬입니다. 성찬은 보이는 설교입니다. 설교가 듣는 것이라면 성찬은 보는 것입니다. 특별히 성찬은 주님께서 직접 명하신 것으로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지켜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찬이 바르게 시행되지 않으면 참된 교회라 말할 수 없습니다. 성찬시에 주님께서 영적으로 임재하십니다. 성찬의 자리는 주님과 함께하는 참으로 복 있는 자리입니다. 주님의 피와 살을 함께 먹고 마심으로 주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어지는 시간이 바로 성찬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성찬은 자주 시행되어지는 것이 좋습니다. 일년에 6번 이상은 성찬이 시행되어지여야 합니다. 그래서 설교를 보고, 주님과 깊은 영적인 연합가운데 거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 오시는 날까지 기념하는 성찬의 바른 시향이 바로 참된 교회의 표지라 할 수 있습니다.
넷째 죄에 대한 분명한 가르침이 있어야 합니다.
죄를 죄라고 선포하지 않는 교회는 참된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하여 결코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회개하는 자에게는 사랑으로 갚아주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죄를 바르게 선포하고 징계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를 살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죄에 대하여 심각하게 인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설교에서도 죄에 대한 경각심이 너무 낮아졌습니다. 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약해졌다는 것입니다. 존 번연과 같이 천국 문 앞에도 지옥을 떨어지는 옆문이 있음을 설교해야 합니다. 그것은 철저한 회개의 자리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값싼 구원을 가르치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의롭게 된 우리의 삶이 얼마나 복되고 소중한 존재인지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오직 죄에 대한 바른 인식과 참된 회개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이 있다면 적어도 참된 교회의 기본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교회가 이러한 모습으로 바르게 서 있는지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가볍게 되고 구원의 기쁨과 영광도 무가치하게 되어 집니다. 교회가 무엇인지 그리고 참된 교회의 기본적인 모습을 담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거짓된 교회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내가 지키는 곳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존재할 때 지켜집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교회는 그리스도가 주인이십니다. 그리스도가 지키십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합당하지 않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짓된 교회에 머뭇머뭇 거려서는 안 됩니다. 참된 교회의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다섯째 교회는 권력의 도구가 아닙니다.
교회는 오직 사랑으로 진리를 전하는 곳입니다. 교회가 자신의 본질을 망각할 때 나타나는 것은 바로 권력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교회를 사유화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납니다. 목사와 장로가 목이 굳어집니다. 자신의 신앙이 대단하여서 그 자리에 있다고 착각을 합니다. 아닙니다. 벌레만도 못한 자였는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복음의 도구가 되라고 세우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모르고 직분을 권력의 도구로 삼고 교회를 권력의 기반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것과 하등 관계가 없습니다. 교회를 권력의 도구로 삼는 자가 어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이 땅에서 부귀와 영화를 누린 권력자들이 천국의 영광을 과연 볼 수 있겠습니까? 교회는 권력의 도구가 아니라 사랑으로 진리를 전하는 곳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누누이 가르치는 일입니다. 복음의 통로로서 교회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 교회를 통하여 구원 받는 이들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철저하게 사랑의 진리를 전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교회가 내적으로 복음을 확고하게 선포하고 밖으로는 온 백성에게 칭찬받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하여 가난한 자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를 돌아보고,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내는 일에 열심을 다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교회는 결코 구원의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여섯째 교회는 정직하고 투명한 공동체를 지향하여 합니다.
이것은 아주 미약한 것 같지만 나중에는 교회를 허물게 합니다. 이 땅에 공존하고 있는 각종 이단들이 교회를 공격할 때 가장 중점적으로 찾아오는 것이 바로 교회의 정직성과 투명성입니다. 이것은 재정의 투명성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직분을 세우는 일도 동일합니다. 교회는 직분자를 세울 때 참으로 정직하고 투명하여야 합니다. 이 일에 실패하면 영적 난민을 양산하게 됩니다. 그래서 정직한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도한 재정의 투명성은 두 말할 필요가 없지만 한국 교회가 가장 많이 실수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이 부분에 최선을 다하여 감당해야 합니다. 이 일만 잘 해도 교회는 건강을 회복할 수 있고 영적 난민 사태를 막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오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상에 교회는 완전한 곳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주님 재림하실 때까지 교회는 부족한 상태로 존재합니다. 그래서 완벽한 교회를 찾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교회가 되려고 몸부림치는 교회는 있습니다. 그런 교회가 참된 교회입니다. 부족하더라도 몸부림치는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아직 살아 있는 이유입니다.
일곱째 교회는 건물이 크면 사람은 채워진다는 환상입니다.
이것은 아주 못된 생각입니다. 철저한 천민자본주의 생각입니다. 더구나 1960-70년대 보릿고개 이야기입니다. 당시에는 먹을것과 놀 곳이 없었습니다. 그 허망한 마음을 채워주는 곳이 바로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통하여 인재가 나왔습니다. 사탕 하나에 수 많은 사람들이 몰렸습니다. 당시에 통일교는 콜라와 10원을 주면서 유혹하였습니다. 어릴 적 친구들이 얼마나 많이 갔는지 모릅니다. 이러한 모습은 교회도 본받았습니다. 어린이 사역으로 유명한 한 교회는 전도하는 아이들에게 손목시계를 주었습니다.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당시만 하여도 귀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교회는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신도시가 개발되면서 경쟁적으로 교회를 건축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교회만 세우면 사람들이 온다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신화는 10년 동안 지속되었고 무리해서라도 교회를 건축하였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교회 건축을 통하여 교회를 성장시켰습니다. 무리하게 대출을 받아도 감당하였습니다. 이때부터 나온 말이 있습니다. 교회는 적당하게 빚이 있어야 성도들이 헌신을 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21세기가 시작되면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더구나 막차를 탔던 사람들이 큰 위기에 빠진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러한 생각에 여진이 남아있어서 교회개척을 하려면 최소한 1억-2억 정도로 인테리어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만큼 사람들의 삶이 나아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하교회나, 시대에 뒤 떨어지는 인테리어를 가진 교회는 멀리하기 시작합니다. 그러기에 더욱 경쟁적으로 교회 외형을 화려하게 만들어 갔습니다. 이것은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렇게 했다고 해서 교회가 자립하는 시대가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성장주의에 함몰되어서 과도한 건물을 짓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슬픈 일은 한국 교회의 현실입니다. 현재 한국 교회는 1년에 100여개의 교회가 매물로 나오고 있는 실정입니다. 여기에는 과도한 빛을 대출받아서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교회들이 상당 수 입니다. 대출 자체를 부인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과도한 대출은 교회를 허무는 일을 하게 합니다.
결국 본질은 빈약해지고 교회는 건물이 크면 사람은 채워진다는 환상이 낳은 비극입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교회의 허세에 실망하고 교회를 떠납니다. 일부는 타 교회로 가고, 일부는 타 종교로 가고, 일부는 영적난민으로 남아있습니다. 본질이 사라지난 교회의 외형은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한국 교회는 내진 설계가 없이 세워진 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진이 몰려왔습니다. 지금은 흔들리고 있는 상황이지만 좀 더 큰 지진이 오면서 무너질 수 있습니다. 영적 내진 설계가 필요한 시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오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상에 교회는 완전한 곳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주님 재림하실 때까지 교회는 부족한 상태로 존재합니다. 그래서 완벽한 교회를 찾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교회가 되려고 몸부림치는 교회는 있습니다. 그런 교회가 참된 교회입니다. 부족하더라도 몸부림치는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아직 살아 있는 이유입니다.
'좋은 말씀 > 신동식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복장 터지는 날 (0) | 2020.07.03 |
---|---|
비싼 수업료 (0) | 2020.07.02 |
떠도는 신앙에서 머무는 신앙으로 (0) | 2020.06.28 |
영적 난민에서 벗어나기- 지 교회 성도의 신앙하는 자세 (0) | 2020.06.27 |
나는 날마다 죽지 못해서 기도한다. (0) | 2020.06.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