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도는 신앙에서 머무는 신앙으로
하루가 멀다 하고 난민들의 안타까운 이야기가 들려오고 있습니다.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일어난 난민들의 실태는 너무나 비참합니다. 지중해를 넘어오다 바다에서 배가 뒤집혀 익사하는 경우가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중동에서는 시리아 난민들의 상황이 너무나 안 좋습니다. 정든 고향을 등지고 새로운 삶을 살고자 유럽으로 넘어온 사람들이 유럽의 국경에서 입국 금지 상태에서 기아와 질병 그리고 각종 범죄에 이용당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실태는 이제 너무나 빈번하여 자극적인 뉴스도 되지 않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도 난민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 들어오려는 난민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입국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난민의 문제 앞에 온 세계는 함께 고민하고 해결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 밖으로 그 길은 힘들어 보입니다.
난민(難民, refugee) 또는 망명자(亡命者)는 박해, 전쟁, 테러, 극도의 빈곤, 기근, 자연재해를 피해 다른 나라로 망명한 사람을 말합니다. 결국 난민은 자신의 살았던 집과 고향과 나라를 버리고 다른 나라로 떠돌아다니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더 이상 자신의 고향에 살 수가 없어서 떠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항상 다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입니다. 지금은 죽음의 공포를 피하여 피신하였지만 나라가 안정되면 다시금 돌아가서 삶을 누리고 싶어 합니다. 국제 사회가 이 문제를 잘 풀어야 앞으로의 위기를 잘 극복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난민들의 상당수는 아이와 여자와 노인 등 약자들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더더욱 이 문제가 잘 해결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길이 요연하기만 한 것도 사실입니다. 한국 교회도 이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난민의 현실을 보면서 영적인 눈으로 한국 교회의 모습이 겹쳐졌습니다. 자신의 나라와 고향을 떠나서 괴로워하며 살고 있는 수많은 신앙의 난민들이 떠 오른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자신이 다니던 교회를 떠나서 이곳저곳을 찾아다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다 똑 같이” 라는 생각에 큰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한번 속지 두 번은 안 속는다는 생각으로 교회를 찾아 떠돌고 있는 영적 난민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지치면 교회를 나가지 않고 홀로 신앙을 지키겠다는 자세를 갖기도 합니다. 그래서 인격적인 신앙이 아니라 일방적인 정보를 받는 비디오, 오디오 신앙으로 변질되고 있습니다. 물론 비디오나 오디오를 통하여 신앙은 육신적인 어려움이 있는 분들에게 조금의 유익은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사실상 거의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러나 바른 신앙을 위해서는 무익합니다. 신앙은 인격적인 관계를 통하여 자라기 때문입니다. 칭찬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징계와 상급을 함께 받고 함께 고민하면서 정직한 질문에 정직한 답을 구하는 과정이 바로 바른 신앙의 과정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이 없으면 신앙은 반드시 왜곡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배회하고 있는 신앙인들을 보는 것은 참으로 서글프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정착하지 못한 신앙에 어떠한 자존감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교회를 허락하신 이유 중 하나는 공동체를 통하여 자신의 모난 신앙이 깎아지고 온전한 사람으로 자라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없다면 참으로 서글픈 일이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영적인 떠돌이의 상태를 끝내지 않고는 평화 즉 샬롬을 누릴 수 없습니다. 차라리 육적인 고통의 자리에 있을지라도 영적인 고향이 있다면 샬롬을 누릴 수 있지만 육적인 만족의 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영적인 떠돌이 상태에 있다면 샬롬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샬롬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을 만나서 하신 첫마디가 샬롬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샬롬을 소망할 수 없다면 우리의 신앙은 헛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주변에는 너무나 많은 떠돌이들이 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망망대해에서 오직 구원의 손길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신이 살던 고향에서 더 이상 견딜 수 없기에 뛰쳐나왔는데 막상 갈 길이 막혔습니다. 그리고 내려 쬐는 태양 빛 아래서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교회가 구원의 방주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교회가 안전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떠돌고 있는 것입니다. 고향이 있는 데 갈 수 없고, 집이 있는 데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실망과 낙담과 원망과 분노만 남았습니다. 평화를 공급받아야 하는데 바닥이 났습니다. 샬롬 없이 이 동네 저 동네 헤매고 있습니다. 그러나 TV 앞에 라디오 앞에 섭니다. 그래도 살아야 하니까 몸부림을 칩니다. 하지만 여전히 갈급합니다.
영적인 떠돌이를 멈춰야 합니다. 영적 난민의 상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적 기갈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샬롬을 누리지 못하면 영적 기근에 허덕이다가 절망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절망이란 참으로 끔직한 일입니다. 키에르 케고르의 말과 같이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기 때문입니다. 다시금 영적인 샬롬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교회가 할 일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는 샬롬의 진원지입니다. 샬롬을 알려주고 샬롬을 나누어야 합니다. 샬롬의 길이 무엇인지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함께 샬롬을 누려야 합니다. 이것은 장차 완성될 샬롬을 연습하는 일입니다.
지금 영적인 고향이 있다면 감사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더욱더 열심히 나의 고향을 복되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은 모든 공동체의 역할입니다. 한 사람의 신념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지체들이 한 마음과 한 뜻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과 비전은 바로 샬롬의 교회를 만드는 일입니다.
'좋은 말씀 > 신동식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싼 수업료 (0) | 2020.07.02 |
---|---|
영적난민 구하기(3) - 영적 방황은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0) | 2020.07.01 |
영적 난민에서 벗어나기- 지 교회 성도의 신앙하는 자세 (0) | 2020.06.27 |
나는 날마다 죽지 못해서 기도한다. (0) | 2020.06.26 |
부모가 기대하는 자녀, 자녀가 바라보는 부모 (0) | 2020.06.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