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한경직목사

그리스도의 마음 (마태복음 11:25-30)

새벽지기1 2017. 7. 14. 06:59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도 내게 배우라.』(마11:28-29)

이 말씀은 주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부르짖는 말씀이올시다. 이 말씀 가운데서 오늘 아침에는 다만 한 구절만 생각하려고 하는 것입니다.「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생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일생을 아프리카 대륙을 위하여 바친 리빙스턴이 아프리카 밀림 지대에서 홀로 기도하다가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하는 소식이 세계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영국 조야(朝野)의 여론이 이와 같은 인물을 아프리카에 그냥 묻어 둘 수가 없으니 아무래도 그 유해를 영국 본국으로 운반하여 다가 영국의 모든 귀한 사람들이 묻히는 웨스트민스터 예배당 안에 묻는 것이 합당하다고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영국 정부에서는 특별히 사람을 파송해서 리빙스턴의 유해를 운반하려고 할 때에 그냥 전부 다 가져온 것이 아니고 그 유해의 가슴을 가르고 심장을 꺼내서 그 심장만은 그이가 일생 동안 제일 사랑한 아프리카 대륙에 묻은 것입니다.
사람에게 제일 귀한 것은 그 마음이올시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어떠하였는가? 사람의 생각으로 다 헤아려 알 수 없습니다. 단순히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그대로 오늘 아침에 잠깐 동안 생각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먼저 말씀하시기를「나는 마음이 온유하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마음은 온유하셨습니다. 온유(溫柔)라고 하는 말은 우리가 그 뜻을 잘 압니다. 아마 따스하고 부드럽다고 하는 뜻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위에 올라오실 때에 성신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그 머리 위에 임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둘기 모양으로 임한 것은 순결한 뜻도 있는 줄 압니다. 그러나 역시 온유한 성품의 표시도 그 가운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속에는 온유한 성신이 충만히 계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 님을 향해서 증거 하는 말이『세상 죄를 지고 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이와 같이 말하였습니다. 거기에는 대속의 깊은 뜻이 있지마는 특별히 어린양이라고 하는 그 모습 가운데는 온유한 모습, 온유한 마음이 또한 포함되어 있는 줄 생각합니다.
이사야 53장에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보면 양이 털 깎는 자 앞에서 입을 열지 아니함과 같이 잠잠하였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한 마음의 표현인 줄 생각합니다.
또한 어떤 곳에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고 꺼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한다는 말로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 있습니다. 이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한 심정을 기록한 말씀인 줄 생각합니다.
옛날 믿는 사람들이 사랑하는 이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 장사해둔 지하 묘지에 남아 있는 옛날 초대 시대의 기독교 예술을 살펴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그릴 때에는 흔히 목자의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그 목자는 어린양을 자기 가슴에 안고 혹은 어린양을 자기 어깨에 메인 모습을 그린 그림이 제일 많습니다. 이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이 얼마나 온유하였나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사실이올시다.
그래서 제자들의 생각에는 어린아이들이 가까이 오는 것이 시끄럽게 보였지마는 예수님께서는 그런 때에, 어린아이들이 예수에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하시며 천국에 있는 자들이 어린아이와 같다고 말씀하시면서 어린아이들을 영접해서 친히 안으시고 그 머리에 안수하시고 축복을 하여 주신 것입니다.
어떤 때에는 문둥이들이 와서 예수 님에게 구하는 말이 그를 불쌍히 여겨서 어루만져 주시오 하는 요청을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 때에도 예수 님께서는 거절하지 아니하시고, 친히 손을 내 밀어서 더러운 문둥병 자를 어루만져서 고치어 주신 것입니다.
또한 한 번은 주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실 때에 두 소경이 멀리서 소문을 듣고 주님께 와서『다윗의 자손 예수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부르짖은 일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같이 따라가고 분주한 때인지라 제자들은 잠잠 하라고 오히려 책망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오라고 하여 그들의 구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습니다.『주여, 보게 하여 줍소 서.』하고 간구 할 때에 그들의 눈을 볼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대중을 보실 때에 목자를 잃어 유리하여 흩어지는 양과 같이 보시고 민망히 여기셔서 탄식하시는 말씀이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기도하여 일군을 더 많이 보내게 해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도 그리스도의 온유한 심정을 볼 수가 있습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 많은 사람들이 우는 양을 보시고, 예수 님께서도 같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을 보시고『예루살렘아!』감탄하시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린 일 등 모든 것을 우리는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한 심정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붙잡히실 때에 베드로는 용감히 칼을 빼어서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잘랐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하시는 말씀이 그 칼을 그의 칼집에 도로 넣으라고 명령하시면서, 대개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경계하고, 조용히 그가 체포를 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법정에 끌려 다니면서 많은 곤욕을 보셨지마는, 베드로가 친히 베드로 전서에 기록한 대로 그는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셨다고 기록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십자가에 달리셔서 무한한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말씀은 이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여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은 온유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온유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약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강하고 담대하였습니다. 이것은 죄를 용납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죄를 미워하시고 죄를 책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모든 가련한 민중들을 긍휼히 여기시던 오직 그의 온유한 마음과 성품의 표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고린도 사람들에게 편지할 때에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써 너희를 권하노니 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온유는 성신의 아홉 가지 열매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산상보훈을 가르치실 때에,『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차지할 것이오.』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온유한 이가 마지막에는 이깁니다. 온유한 자가 마지막에 이 땅을 차지합니다. 마음이 온유한 어린 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에 온 세상을 차지하실 것을 우리는 기억하여야 될 것입니다.
온유한 자는 순복(順服)합니다. 온유한 자는 모든 것을 다 잘 참습니다. 마음이 온유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여 줍니다. 마음이 온유한 사람은 악을 선으로 갚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서양 속담에 향나무는 자기를 찍는 도끼도 향기롭게 한다 하는 말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온유한 사람은 자기에게 손해를 입히는 사람에게도 여전히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톨스토이의 여러 가지 작품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추운 날 예배당 근처에서 떨고 있는 사람을 만나서 자기의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이 사람은 친절한 마음을 가지고 이 분을 도와주기 위해서 데려왔지마는 그 부인은 성가시니까 이 분을 친절하게 대하지 아니하고 냉하게 보고 불친절하게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데려온 사람은 어른이었는데 이상스럽게 점점 줄어지고 쪼그라져서 그 사람이 적어졌다고 합니다. 그것을 보고 주인이 민망해서 부인에게 잘 말해서 다시 친절히 그이를 대하고, 좋은 말을 하고, 좋은 음식을 대접하니까 적어졌던 사람이 점점 다시 커지고 아름다워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고 천사였다고 합니다. 천사는 항상 온유한 기분과 사랑이 충만한 하늘에 있던 분이 되어서 그렇게 냉정하고 조폭한 분위기 가운데에서는 줄어들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온유와 사랑의 분위기 가운데 있게 될 때에 다시 크고 아름다워졌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의 심령이 그렇습니다. 온유하고 사랑의 분위기 가운데서 심령이 바로 자랍니다. 아이들도 심령의 분위기가운데서만 그 심령이 원만히 자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온유한 마음을 배웁시다.


그 다음에는 「겸손하니」라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또한 겸손하였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일생을 가만히 돌이켜 생각하면서 그의 생활 가운데 조금이라도 교만하다던지 또는 자기 것을 나타내 보인다던지 하신 일이 있었는가 스스로 생각해 보십시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마는 이사야 53장에 이 메시야에 대한 시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그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으니』아마 자세히 알 수 없지마는 그 얼굴 생김과 풍채도 그다지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물론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을 들여다보면 하나도 교만한 자취가 없습니다.
우선 나실 때에는 마구간에서 나셨습니다. 그것보다 더 겸손할 수 있습니까? 나셔서 처음 누운 보금자리가 말구유올시다. 거기에서 더 낮아질 수 있습니까? 그래서 그런지 모르지마는 예수님이 나신 그 자리에 주후 4세기에 세운 굉장히 큰 예배당이 지금까지 내려오는데, 그 예배당의 특색은 안에 들어가면 큰 예배당이지마는 처음에 들어가는 문은 아주 좁고 낮습니다. 아마 넉 자 밖에 안 될 것 같아요. 그래서 허리를 굽히고야 그 예배당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합니다.
인도하는 사람에게 왜 문을 그렇게 좁고 낮게 만들었느냐고 물으니까 대답하는 말이, 거기 들어오는 사람은 겸손한 마음으로 들어오라고 그렇게 낮게 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겸손하게 나셨습니다.
그는 일생을 목수의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그 때 사람들은 보통 예수님을 목수의 아들이라고 불렸습니다. 그가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하는 말을 주님께서는 들으셨습니다. 그는 친히 목수의 일을 했습니다. 아무개의 아들 목수라고 하는 이름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주후 4세기 이후에 온 로마 제국이 기독교화 된 다음에 줄리안이라는 사람이 황제가 된 이후에는 기독교를 반대하고 핍박까지 했습니다. 한 번은 전장에 나가서 바사에서 전쟁을 하면서 어떤 예수를 잘 믿는 장군에게, 기독교를 비웃으면서 하는 말이『그 당신이 공경하는 주라고 하는 목수는 요즈음 무엇을 하는고?』하는 비웃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 때 그 기독교인인 장군이 공손히 대답하기를,『자세히는 알 수 없지마는 우리 목수님께서 아마 대왕을 위해서 관을 짜시는 것 같습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런 일이 있은 후 며칠이 안 되어서 그 왕이 전장에서 부상을 입어 죽었습니다. 과연 관을 짜던 중인가 봅니다.
예수님이 젊어서 한 생활 가운데 자랑할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는 친히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 곳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처럼 가난한 생활을 한 사람은 없습니다. 일생 동안에 사귀신 사람들을 보면 어부와 농부 등 보통 무식한 사람들하고 사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즈음 어떤 사람처럼 교제하기 위해 세력 있는 사람이나 어떤 사람에게 찾아 다녔다는 말은 없습니다. 항상 예수님을 반대하던 사람들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 그러한 비웃음을 받으셨지마는 또한 그것이 사실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는 행동을 좀 달리 하신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마지막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의 일입니다. 그 때에는 제자들이 앞뒤로 따라 가면서 종려나무를 들고 호산나를 부르며 들어갔으니까 좀 보이게 들어가시지 않았습니까? 제일 조그만 유대 나라 나귀였습니다. 그 나라 나귀는 우리 나라 나귀보다 더 적습니다. 그런 나귀 가운데서도 보통 나귀가 아니고 나귀 새끼였습니다. 어쩌면 발이 땅에 닿았는지도 모릅니다. 겨우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였던 것입니다. 겸손한 와이올시다.


그러다가 마지막 저녁을 잡수실 때에 제자들은 누가 크냐 하는 토론이 나서 서로 발을 안 씻어 줄 때에 예수님께서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만찬 후에는 많은 멸시와 형벌을 받으시고, 가장 추한 죄인이 받는 악형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겸손하신 분이올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빌립보 2장 5절 이하에『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 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이와 같이 기록했습니다. 그리스도는 겸손한 분이올시다. 항상 겸손하라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바리새인이 가서 기도할 때에는 자기의 자랑만 했습니다. 그러나 세리가 가서 자기의 죄를 회개하면서 겸손히 기도할 때에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셨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복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57장 1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시고 무시무정한 곳으로 거처를 잡으셨지마는 마음이 겸손한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같이 계셔서 겸손한 심령을 부흥하게 하여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미가 선지자를 통해서,『사람아, 주께서 너희에게 선한 것을 보인 것이 아니냐? 곧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고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아니냐?』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야고보 장로는『주 앞에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 가운데 얼굴이 빛났다고 하는 분이 세 분 있습니다. 모세와 예수와 스데반이올시다. 이 세 사람이 모두 가장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이 기록하기를, 그리스도인이 구할 덕은 첫째로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라고 했습니다.『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나는 배우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는 이렇게 온유하고 겸손하시므로 누구든지 주님 앞에 나올 수 있습니다. 아무리 과거에 죄를 많이 지었다 할지라도 주님 앞에 나올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도 나올 수 있고, 무식한 사람도 나올 수 있고 어떠한 허물이 있는 사람도 다 나올 수 있습니다. 제가 지난 번 아프리카에서 한 회회교 예배당에 가 보니까 거기서 하는 말이, 그 예배당에는 남자만 들어 올 수 있지 여자는 들어 올 수 없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교회는 여자들도 다 들어 올 수 있습니다. 온유와 겸손을 잘 배워야 되겠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를 가만히 보십시오. 그저 학생들이 운동하느라고 모였다가 싸움하고 헤어집니다. 길거리에서 학생들이 칼부림을 하고 싸우고 심지어는 학생간에도 살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요 며칠 전에 신문을 보니까 심지어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손에 좀 스쳤다고 그것 때문에 말다툼이 일어나서 나중에는 그 사람을 때려서 죽였다고 합니다. 학생들이 선생님을 위협하고 실험기를 깨뜨려 버리는가 하면 선생들은 학생들을 고소합니다. 오늘날 신문에 나는 성명서니 해명서니 하는 것들을 보면 모든 강퍅한 표현의 말로 쭉 납니다. 무도하고 무법하고 무례하고 아주 강퍅하고 포학(暴虐)이 얼마나 우리 사회에 충만한 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우리 민족이 배워야 되겠습니다. 이와 같은 사회에 사는 우리 믿는 사람들이 어느 사회에 가나, 어떤 자리에 가나, 아무리 강포(强暴)와 포학이 많을지라도 그리스도의 온유와 겸손한 마음과 정신으로 우리 믿는 사람들이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향기로 채워야 되겠습니다.『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나를 배우라.』 (1959년 1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