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한경직목사

새해의 새 출발 (요한 복음3:1-15)

새벽지기1 2017. 7. 6. 06:5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오늘 아침, 새벽 첫 주일 예배로 이와 같이 모였습니다. 우리가 다 새해에 새로운 축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또한 새벽에 대한 염원(念願)도 많이 있는 줄 생각합니다. 민족적으로 남북의 통일, 민주 대한의 확립, 경제 재건, 생화개선, 문화향상 등 여러 가지가 있는 줄 생각합니다. 또한 세계적으로 생각해 볼 때에도 세계 평화의 자유, 세계의 승리와 확립, 원자력의 평화(平和)전용(轉用) 또한 우주에 대한 계속 탐구와 정복 등 여러 가지가 있는 줄 생각합니다. 또한 개인적으로 혹은 가정적으로, 각 방면으로 새로운 염원과 이 염원에 의한 여러 새로운 계획을 세워 출발하는 것이 사실인 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새로운 출발 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것을 우리가 잊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그것은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옛 사람 그대로 아무리 무엇을 계획한다고 할지라도 결국은 새롭게 이루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아침, 우리가 새로운 계획 혹은 새로운 출발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새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 새 사람은 오직 중생(重生)해서 새롭게 나는 것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금년 새 출발을 중생해서 시작하길 원하는 것입니다. 중생이 우리 신앙 생활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친히 말씀하시기를『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조금 내려가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으로 이 세상에 온 것도 출생(出生)을 통해서입니다. 마찬가지고 새로이 나는 길을 통해서만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 출석, 새로운 결심, 새로운 노력이 있는 것으로써만 만족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고 하면, 새롭게 나지 아니하면 들어 갈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주님께서 분명히 여기에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며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 있는 사람입니다. 니고데모는 관헌 가운데 하나이며 70인 공회원(公會員) 중에 하나로 공부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에 대하여도 주님께서 분명히 선언하신 것은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거듭나야 새로운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새로운 계획을 한다고 하지마는 옛 사람 그대로 있어서 무엇을 새롭게 한다고 할지라도 그 결과는 오직 옛 일의 반복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새로운 가정을 생각할 때도 그렇고, 새로운 사회를 생각할 때도 그렇고, 새로운 국가를 생각할 때도 또한 같은 결론을 우리가 얻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중생의 진리는 신비해서 얼른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중생은 우리가 체험할 수는 있지마는 어떠하다고 설명하기는 매우 어려운 진리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는 신비한 것이 너무 많아서 우리가 일일이 이해할 수 없지마는, 사실로서 체험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자연계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도 우리가 그 현상을 체험하기는 하지마는, 일일이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어제도 뜻밖에 많은 눈이 내려서 이 대지(大地)를 덮었습니다. 우리는 경험에 의지해서 물이라는 것이 평상(平常)온도에 있어서는 액체로 있고, 좀더 뜨거운 온도에 있어서는 기체로 화하고, 낮은 온도에 있어서는 어름이 되고 눈이 되는 줄 알지마는, 어떻게 되어서 그렇게 눈이 아름다운 모양으로 승화되는지는 다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생명 세계에 들어와 보면 모든 것이 신비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항상 체험하듯이, 우리가 다 언제든지 음식을 먹지마는, 어떻게 이 음식이 변화해서 윌 속에 들어가면, 어떤 것은 뼈가 되고, 어떤 것이 살이 되고, 어떤 것이 머리칼이 되는지 우리가 분명히 다 이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같은 음식인데도, 동양 사람이 먹으면 머리칼이 새까맣게 나고, 서양 사람이 먹으면 샛노랗게 나는지 우리가 다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 한 사람이 먹을지라도 젊었을 때는 머리칼이 항상 새까맣게 나지마는, 50이 지나면 꼭 같은 음식을 먹을지라도 흰 머리칼이 되어서 나옵니다. 그런 비근한 것도 우리가 체험을 하지만 어떻다고 설명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 나는 것도 마찬가지일 줄 압니다. 어머니가 아기를 태 속에 배어서 열 달이 된 다음에 분만합니다. 어머니가 아기를 그 배속에서 체험을 합니다. 하지마는 어떻게 태아가 배속에서 형성되고, 그것이 어떻게 자라고, 어떻게 귀여운 아기로 열 달 후에 나타나는지 그것은 하나님께서만 아시는 큰 이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사실 육체의 아기가 나는 것도 신비합니다. 하물며 중생이라고 하는 것은 신령한 아기가 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되어서 중생이 되는지 다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읽어보아도 바람이 불되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이 성령으로 다시 나는 것도 다 이와 같으니라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뿐입니다. 사실 바람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아니합니다. 우리가 사실 만질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사실 잡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람이 있는 것을 우리가 체험합니다. 바람이 불면 춥습니다. 바람이 불면 나무 가지가 흔들립니다. 바람이 불면 물결이 요동합니다. 바람이 부는 징조를 보아서 바람이 있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


마찬가지로 성신을 통해서 역사 하심으로 말미암아 중생 하는 것도 그 결과를 보아서 아는 것뿐이지 어떻게 설명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혹 어떤 경우에 이와 같은 비유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중생하는 것도 어린아이가 이 세상에 오는 것과 비슷한 것으로, 어린 아기가 어두운 모태에서 광명(光明)한 이 세계에 나오는 것과 같이 중생이라고 하는 것은 어두운 세계에서 광명한 세계에로 나오는 것이라고 비유해서 설명하려고 합니다. 마치 유충이 변해서 성충으로 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유충이 변해서 성충이 다 된 후에는 고치를 뚫고 광명한 세계로 나옵니다. 속박에서 자유로 나옵니다. 죄의 구속 가운데서 영적 자유를 얻는 곳으로 나오는 것이 곧 중생이라고 비유해서 말하는 사람이 혹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아는 것은 있습니다. 중생은 신비해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중생의 표적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래서 과연 내가 중생 하였는지 하지 못하였는지 스스로 알 수는 있는 줄 압니다.


중생의 표적이 무엇인가? 간단하게 몇 가지로 지적할 수 있는 줄 압니다.
첫째는 거듭나게 되면 보는 것이 있습니다. 전에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됩니다. 깨닫게 됩니다. 신령한 눈이 열립니다. 중생하기 전에는 하늘과 땅, 산과 바다를 볼 때에 단순히 하늘만 보고 땅만 보고 산만 보고 바다만 봅니다. 그러나 거듭난 심령이 하늘을 보고 대지를 보고 이 대자연계를 볼 때에는 물질만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이 가운데 조물주 대 주재의 권능과 그 영광과 그 지혜아 이 배후에 계신 하나님의 영원한 존재를 능히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연만 새롭게 보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물을 보는 방면이 변합니다. 사람도 단순히 전에 보던 대로 보지 않게 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자녀를 사람 가운데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환경과 어떠한 주위에 살든지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오묘한 경륜이 이루어져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다 한 번은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인간의 최후인 죽음을 볼 때에도 그 보는 눈이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전에는 단순히 암흑과 절망과 공포로만 보였지만 중생한 사람의 눈은 죽음 가운데서도 영원한 소망의 문을 발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보는 것이 달라집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둘째로는, 과연 거듭난 사람은 그 마음속에 전에 없던 기쁨, 전에 없던 화평(和平), 전에 없던 든든한 그런 기분이 있는 것입니다. 유충이 변해서 성충이 된 이후에는 다 노래를 부릅니다. 매미가 노래를 부릅니다. 모든 벌레가 가을에 노래를 부릅니다. 마찬가지로 과연 거듭난 심령은 그 심령 속에 새로운 노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항상 주안에서 즐거워하라. 이런 말이 자연히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나의 평안을 네게 주노라.』그리스도께서 주는 평안을 그 마음 가운데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셋째로는, 비록 좁게 시작이 되지마는 새로운 성품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기가 모태 속에 있을 때에는 그런 것을 깨닫지 못했지마는 이 세상에 나온 지 얼마 후가 되면 곧 젖을 찾게 됩니다. 중생 한 영혼은 전에 사모해 보지 않던 것을 새롭게 사모하게 됩니다. 신령한 것을 사모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모하게 됩니다. 예수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연히 기도할 마음이 많이 생기고, 성경을 볼 마음이 많이 생기고, 자연히 주일을 당하면 예배당에 갈 마음이 생기고,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바로 제가 지난주간에 우리 교회에 잘 출석하는 어떤 자매 님이 기록한 일기를 누가 가져왔기에 보니까, 그 일기 가운데 마음의 영적 체험을 기록하였는데 얼마나 주를 사랑하고 주를 사모하고, 어떻게든지 주님을 뜻대로 해보려고 간절히 원하는 그 소원이 페이지 페이지마다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와 같은 심령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중생 한 이후에야 이렇게 새롭게 사모하는 것이 있습니다. 위에 있는 것은 공경하는 그런 새로운 성품이 생기게 됩니다.


전에 제가 미국에서 학교에 다닐 때에 어느 여름 방학에 어떤 미국 부자 집 별장에 가서 일한 경험이 한 번 있습니다. 높은 산 위에 아름다운 호수가에 좋은 별장을 지었는데 여름에만 와서 삽니다. 거기 가서 한 해 여름 일을 했는데 저 뿐이 아니고 일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흔히 저녁이 되면 젊은 사람들이 모여서 놀기도 하고 춤도 추는 그런 곳이 있어요. 어떤 날 저녁에 저 보고도 자꾸 춤추는 곳에, 댄스 홀에 가자고 그런 단 말이오. 그래서 나는 춤도 출 줄 모르고 그런 곳에 도무지 갈 마음이 없노라고, 이렇게 거절하니까, 그 젊은 사람들이 다 간 다음에 그 집주인 부인이 제게 웃으면서 하는 말이『네게는 벌써 네 옆구리에 천사의 날개가 나기를 시작했구나.』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제 이야기를 해서 대단히 미안합니다.


신령한 의미에서 우리 믿는 사람들 가운데 과연 거듭나면 신령한 날개가 나기 시작합니다. 높은 곳을 향해서 올라가려고 하는 마음! 높은 곳을 사모하는 마음! 보다 더 깨끗한 것을 간절히 원하는 성품! 이것이 생깁니다. 벌레가 벌레대로 있을 때에는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본성입니다. 그러나 그 놈이 변해서 나비가 되든지 벌이된다고 하면 위로 올라가는 것이 본성입니다. 오해하지 맙시다. 온전히 완성되었다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처음 시작이지마는 아무리 적게라고 이 높은 곳을 향해서, 보다 더 깨끗한 곳을 향해서 올라가려고 하는 새로운 성품이 생기는 것입니다. 음악 가운데도 사람을 아래로 내려가게 만드는 음악이 있습니다. 반면에 사람의 심령을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는 음악이 있습니다. 반면에, 심지어 친구간에도 나를 끌어내리는 요소가 있습니다. 그 반면에 나를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는 요소와 친구가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새로운 성품이 생기를 것입니다.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대체로 중생 한 사람의 그 특색을 간단히 세 가지로 지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순결, 둘째는 겸손, 셋째는 사랑. 그런데 이 중생은 오직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본래 이 난다(生)고 하는 것은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께서 육신으로 이 세상에 오실 때에도 내가 이 세상에 오겠다. 이렇게 생각해서 나오신 이 누가 있습니까? 우리 마음대로 못합니다. 그저 이 세상에 왔으니 왔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중생도 내가 중생 하려고 해서 중생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온전히 성신의 역사요,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인 까닭으로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언제든지 중생이 있을 때에는 두 가지 조건이 따라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요한 복음 1장 12-13절에 기록한 바와 같이『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 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서 난 자들이니라.』언제든지 중생이 있는 곳에는 먼저 그 심령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믿고 영접하는 그 사람에게 중생이 따르는 것을 우리가 봅니다.
또 한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먼저 예수를 내 구주로 온전히 믿고 자기의 죄를 회개하는 그러한 심령에게 하나님께서 성신을 통해서 중생의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를 믿는 것도 회개하는 것도 내 힘만으로는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신을 주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믿기를 원하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죄를 회개하게 합니다. 다만 내가 성신의 역사를 거스르지만 아니하면 내가 주를 영접할 수 있고, 내가 죄를 회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더 길게 말할 필요가 없는 줄 생각합니다. 새해에 새 출발을 바르게 하려고 하면 오직 중생으로 새 사람이 되어서 이 새해를 새로 시작해야 되겠습니다. 이 중생은 오직 하나님의 역사인데 예수를 중심에 영접하고 죄를 회개하는 그 사람들에게만 허락되시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역사인 것입니다. 오늘 이 아침, 이 자리에 앉아 계신 여러분의 생명을 스스로 돌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알지 못하지마는 하나님께서는 아십니다. 또 여러분 자신도 어느 정도까지 짐작할 수 있는 줄 압니다. 이 새해 아침에 우리 하나 하나가 마음속의 죄를 온전히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온전히 거듭 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1958년 1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