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한경직목사

한 소년의 헌신과 그 결과 (요한 복음6:1-15)

새벽지기1 2017. 7. 3. 07:54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니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요6:9)

오늘 읽은 이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예수님께서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오 천명을 먹인 그 유명한 이적에 대한 기록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이적과 과학 문제라든가 또 이적의 가능성에 대한 철학적 문제라든가 이런 문제를 중심해서 생각하기를 원하지 아니합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께서 본래 온 우주를 창조하신 창조주로 믿을진대, 또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본래 하나님과 같이 계신 그 말씀으로써 도성인신(道成人身)하셔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을 우리에게 계시하신 절대이신 줄 우리가 받을진대 그런 문제도 다 구름과 같이 해소될 줄로 생각합니다.
오늘 이 시간에 이 크신 이적을 중심으로 해서 우리 각 사람에게 중요한 교훈을 찾아보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이 이적은 뱃세다 들에서 행하여졌습니다. 그 들은 광야입니다. 예수님의 교훈과 그의 이적을 따라서 많은 무리가 집 없는 광야로 모였습니다. 어른들만 5천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빈들에서 굶주린 이 백성들을 보시면서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하신 말씀이『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일 수 있겠는가?』빌립이 잠깐 생각하고 대답하는 말이 이 사람들을 조금씩이라도 무엇을 먹이려고 하면 적어도 2백 데나리온 상당의 떡을 사올지라도 오히려 부족하겠다고 했습니다. 우리 한국 돈으로 말하면 4, 5 만 환의 떡을 사온다고 할지라도 오히려 부족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후 조금 있다가 시몬 베드로의 동생 되는 안드레가 어떤 작은아이를 데리고 오면서 하는 말이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왔음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먹일는지 의아해 하면서 여쭈었습니다. 여기 어린아이가 하나 있어서, 아마 자기 어머니가 집을 떠날 때 점심하라고 싸주었던 한 사람 분의 점심인 것 같습니다. 이 아이가 있어서 보리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를 이렇게 가져다가 주님 앞에 바치는데, 그렇지만 이 조그만 걸 가지고 이 많은 무리에 대해서 무슨 도움이 될까요?


예수 님께서는 그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명해서 그 많은 무리들을 풀밭에 더러는 50명씩, 더러는 백 명씩 떼를 나누어 앉히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떡을 가져서 축사하시고 그 떡을 때어서 제자들에게 나누어 줄 때에 하나님의 큰 이적이 나타나서 아마 떼일수록 그만큼 많고 그만큼 불어서 五 천명을 먹이고도 오히려 남은 부스러기를 주운 것이 열두 광주리에 달하였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이 이적을 가만히 생각할 때에 몇 가지 진리를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는, 이처럼 굶주린 대중을 먹이는 큰 이적이 먼저 한 아이가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옴으로 시작되었다고 하는 이 사실입니다.

먼저 한 소년이 자기의 가졌던 것이 아무리 미약하지만 그것을 먼저 주님께 가져옴으로 이 큰 이적이 실현되었다고 하는 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세계역사를 뒤져보면 역사적으로 모든 위대한 운동,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혹은 종교적으로 모든 위대한 운동이 처음에는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16세기의 유럽 역사를 볼 때에 온 유럽을 그야말로 뒤집어 놓은 종교 개혁이라고 하는 큰 운동이 한 수도사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봅니다.
18세기 말엽에 영국에서 노예를 해방하고 노예 매매를 금지하는 새로운 운동이 일어나서 마지막에는 온전히 노예 제도를 없이 하는 그 위대한 인도를 위한 운동이 맨 처음에 윌버소스(Wilbersorce)라고 하는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
오늘날까지 세계 농촌의 모범 농촌이 된다고 세계적으로 이름을 가진 덴마크의 농촌 개량 운동, 농민 향상 운동이 한 사람, 한 목사 그런드빅이라고 하는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회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사람이 많다고 하지만 한 사람, 두 사람, 세 사람, 이렇게 개인들이 모여서 백 명도 되고, 천 명도 되고, 천만도 되고, 삼천만도 되는 것입니다. 태산이 아무리 높다고 하지마는 티 끝이 모여서 태산을 이룹니다. 아무리 태평양 바다에 물이 많다고 하지만 한 방울, 두 방울의 물이 모일 때 태평양의 물결을 이룹니다.
따라서 대륙을 움직이고 이 사회를 개혁하고 이 사회를 옳게 만드는 모든 운동도 결국은 한 사람이 깨닫고 먼저 시작하고, 또 한 사람이 그 사람을 따르고, 개인 개인이 움직이는 가운데 마지막에는 큰 운동을 일으켜서 위대한 일이 이 세계 역사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특별히 이 본문을 보고 여러분에게 이 말씀을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날 항간에서 보통 서로 말하는 것을 들으면, 이거 큰일 났다고 하며, 정치니, 경제니, 문화니, 관청이니, 군(軍)이니, 학교니, 할 것 없이 각계 각층이 속속들이 썩어 들어가는데 이것을 어떻게 할 수가 있나? 이것을 나 혼자 어떻게 할 수가 있나? 이것을 몇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가 있나?
썩어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알면서, 이것을 막아야 되고 이것을 고쳐서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야 될 줄 알면서도, 어떻게 할 수 없다고 그 날 그날 유유 도일해서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5천명을 먹이는 이 위대한 기적이 한 어린아이가 먼저 있는 것을 바침으로 시작되었다고 하는 이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아무리 우리 사회에 사람이 많지만 한 사람, 두 사람, 세 사람, 이렇게 모여서 우리의 사회를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이것을 먼저 깨닫고 자기부터 먼저 옳은 생활을 하고 각기 그 직장에서 싸워 나간다 하면 위대한 이적이 오늘날 20세기에 대한민국에서도 나타날 수 있는 줄 생각합니다.


둘째로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한 어린아이가 자기에게 있는 것을 참 무사기한 마음으로 전적으로 그리스도에게 갖다 바칠 때, 이것을 축복해서 위대한 일을 이루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십시다.

하나님께서도 한 개인의 헌신을 축복해서 위대한 일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가 비록 적지만 온전히 헌신해서 그리스도의 손안에 들어갈 때에 그것은 불고 불어서 초(草) 천명을 먹일 수 있는 이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아무리 한 개인일지라도 그이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의를 위해서 싸울 때에는 온 우주가 그의 배후에서 그를 후원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동양의 옛 성인도『덕불고(德不孤)라 필유인(必有隣)이라.』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덕이라고 하는 것은 외롭지 않다고, 맨 처음에는 외로운 소리로 홀로 부르짖기 쉽습니다. 그러나 덕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로 외롭지 않아 반드시 이웃이 있다고, 의를 위해서 싸울 때에, 전 민족 전체의 복리를 위해서 싸울 때에, 진리를 위해서 싸울 때에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축복해 주신다고 하는 이 사실입니다.
안중근 의사가 할빈 역두(驛頭)에서 일본의 정치가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저격할 때에 선언서를 미리 인쇄했다가 뿌렸다고 합니다. 그 선언서 한 절 가운데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나는 절대로 일본의 정치가 한 사람을 암살하는 한 자객으로 알지 말라, 나는 대한민국 독립군의 한 사람으로서 전 일본제국을 향하여 싸우노라.』모든 사람이 다 어찌할꼬 하고 손들고 있을 때에 독립군의 한 사람으로서 전 일본 제국을 대항해서 싸웠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일을 하나님께서 축복해서 마지막에 우리 민족에게 다시 독립과 자유의 축복을 허락하여 준 것입니다.


여러분 다니엘을 읽어보시면 거기에 느부갓네살 왕의 유명한 꿈이 몇 있습니다. 한 번은 느부갓네살이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그만 깨어나서는 잊어버렸습니다. 이상한 꿈을 꾸어서 알기는 알아야겠는데……. 그래서 바벨론의 유명한 술객(術客)을 다 모아 놓고 하는 말이『내가 어제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이 꿈을 해몽해 주길 바라노라.』그러니까 술객들이 하는 말이『무슨 꿈을 꾸었습니까?』『그 꿈을 잊어버렸다. 그 꿈까지 생각해 내라.』 이 술객들이『꿈을 말씀하면 해몽하겠지만 그 잊어버린 꿈을 누가 해몽할 수 있습니까?』했습니다. 이거야 속수무책이란 말이오. 그래서 다니엘을 청해왔다고 그러치 않았습니까? 다니엘을 청해서 그 이야기를 하니까 하나님은 특별히 다니엘을 택해서 세운 종인 까닭으로 다니엘에게 그 꿈의 비밀을 말씀해 주었습니다.


그 꿈은 다른 꿈이 아니고 꿈에 보니 큰 우상, 하늘에 닿는 우상을 보았습니다. 그 얼굴을 금으로 만들어서 번쩍번쩍 빛이 납니다. 그 가슴과 팔은 전부 은으로 만들어서 역시 광채가 납니다. 그 아래는 동으로 만들어서 역시 광채가 납니다. 그 아래는 쇠로 만들어서 든든히 섰습니다. 하늘에 닿을 듯 한 큰 우상을 보았는데 그 위엄이 어떻게 큰지 감히 사람의 얼굴로 우러러 볼 수 없으리 만큼 위엄이 굉장합니다. 그런데 문득 보니까 저 하늘꼭대기에서 조그마한 돌이 하나 내려옵니다. 그 돌이 내려오더니 조금(많이는 아닙니다) 우상에게 부딪칩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큰 우상이 와르릉 하면서 넘어질뿐더러 어디에 갔는지 흔적도 없어지고 찾을 수도 없이 되었단 말이요. 그러더니 조그마한 돌이 점점 커지는데 얼마나 커지는고 하니, 온 세계에 가득 차게 커졌다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 그 돌이 무슨 뜻인지 다 짐작하실 줄 압니다. 다른 말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허위의 우상이 있습니다. 불의의 우상이 있습니다. 악의 우상이 있습니다. 힘이 있어 보입니다. 모든 금, 은, 동, 철은 다 가졌습니다. 우상이 굉장합니다. 그러나 우상이 아무리 크지마는 작은 진리의 돌이 한 번 내려올 때에 진리의 돌에 부딪치게 되면 아무리 큰 우상이라고 하루아침에 일시에 다 부서져만하여 없어지고 오직 진리만 크고 커서 그 진리가 온 세계를 점령한다고 하는 그 뜻입니다. 장차 이 세상의 모든 불의의 우상, 모든 허위의 우상, 모든 죄악의 우상이 아무리 큰 것 같지만 결국 진리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 산산이 부서지고 그리스도께서 최후 승리를 얻는다고 하는 끗입니다.
오늘날 어떤 우상은 굉장히 큽니다. 금, 은, 동, 철이 많습니다. 원자탄도 준비했습니다. 인구가 제일 많습니다. 토지가 굉장합니다. 그러나 이런 허위의 우상이 아무리 커 보이고 든든해 보인다고 하지만 진리의 돌에 부닥칠 때에는 넘어지고 말 것입니다. 아무리 한 개인일지라도 자기가 전적으로 온전히 진리를 위해서, 참 민족을 중심으로 해서, 의를 위해서 가지의 있는 것을 온전히 바치고 나선다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축복해서 그를 통해서 위대한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로, 이 점을 생각합니다. 이 소년이 주님께 바친 것은 무슨 별 것을 바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자기가 가졌던 것을 바쳤습니다. 자기 어머니가 싸준 그것, 가졌던 것을 바쳤습니다.. 그것을 바쳤더니 주님께서 이와 같이 위대한 일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슨 별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우리에게 있는 것을 바치기를 요구합니다. 내게 있는 시간, 내게 있는 힘, 내게 있는 재주, 내게 있는 지식, 내게 있는 돈, 내게 있는 무엇, 그저 내게 있는 것 바치는 것입니다. 다섯 냥쭝 은혜 받았으면 닷 냥쭝 어치, 두 냥쭝 은혜 받았으면 두 냥쭝 어치, 한 냥쭝 어치 받았으면 그저 한 냥쭝 처치 바쳐도 족합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라고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모든 것 다 할 수 있지마는 특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가령 우리 사회가 썩어 들어가는, 도의가 부패한 모든 것을 우리가 하루아침에 나가서 다 깨끗하게 만들지는 못하지만 우선 내 속에 썩어지는 것이 있다고 하면, 이것이야 우선 바로 잡지 못하겠습니까? 이것이야 우선 방지할 수 있지 않습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까? 문필가 칼라일 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우선 네 자신부터 정직한 사람이 되라, 그러면 좌우간 이 세상에 정직하지 못한 사람의 구가 하나는 줄이 않을 것이냐?』이렇게 말했습니다.
가령 우리가 여기 앉아 있는데, 2천명 가까운 사람이라 합시다. 만일 여기 앉은 우리가 다 나아가 우리 정계나 관청이나 각 방면에 가서 새로운 어떤 운동을 전개하지 못한다고 하지마는 우선 내 자신 하나만이라도 온전히 바로 잡아서 내가 참된 사람이 되고 내가 정직한 사람이 되어, 내가 바로 한다고 하면, 우선 우리 서울 장안에 二천명 가까운 사람이 옳은 사람이 될 것이 아닙니까? 그만큼 나쁜 사람의 수가 줄 것이 아닙니까?
이 소년이 다른 것을 주님께 드린 것이 아닙니다. 그저 자기에게 있는 것을 드렸습니다. 우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우리가 해야 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내 자신에서 시작하고, 그 다음에 내 가정에서 하고, 그 다음에 내 직장에서 하고, 이렇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6장을 보면, 이사야가 청년 시대에 성전에 가서 기도 드립니다. 때는 바로 웃시야 왕이 죽던 해입니다. 나라가 어지러워지고 국제 정국이 험악한 그런 때입니다. 그 때 청년 이사야가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문득 이상한 환상이 그 신령한 눈앞에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높고 높은 하나님께서 보좌에 않으신 것과 그 앞에 스랍들이 날아다니면서『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그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도다.』계속해서 할렐루야 찬송을 부르는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광경을 볼 때에 이사야는 양심에 질려서 곧 하는 말이『아! 큰 화로다, 내가 죄 많은 사람이, 내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면하였구나.』이렇게 탄식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에 한 스랍이 제단에서 펄펄 붙는 숯불을 집게로 집어다가 이사야의 입을 지져주면서『이제부터 네 입술이 끼끗하여 졌느니라.』깨끗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조용히 머리를 숙이고 있노라니 까 이상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우리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까?』하나님께서 일군을 찾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 소리를 들고 이사 야는『주여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어 주소서』자기가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여러분, 세계 정세가 어지러울수록, 국내 정세가 어지러워 갈수록, 이 때야말로 이 세 가지를 기억할 때입니다.
이런 때에야말로 우리가 신령한 눈을 열어서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보좌에 앉으셔서 아무리 사람들이 떠들고 세상 사람들이 떠들지마는 결국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이 우주를 다스린다고 하는 이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둘째로는, 이와 같은 하나님 앞에 사는 우리는 무엇보다도 내 자신을 깨끗 하는 것이 가장 필요하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내 자신이 먼저 회개하고 내 자신이 먼저 새 사람이 되도록 힘써야 될 것입니다.
셋째로는, 이런 때 이런 시국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깨끗한 사람을 찾습니다.『우리가 누구를 보낼꼬, 누가 우리를 위해서 갈꼬.』하시며 사람을 찾습니다. 이런 때에 내 사명이 무엇인가, 사명을 깨달아야 됩니다. 기도합시다. (1958년 11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