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한경직목사

심령이 기갈한 자에게 (요한 복음7:37-44)

새벽지기1 2017. 7. 21. 06:51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를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7:37-38)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는 이 말씀은 우리가 지금 읽은 대로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명절이라고 하는 절기는 장막 절을 가리킨 것입니다. 장막 절은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기 전에 40년 동안 광야에서 해매이던 생활을 기억하기 위해서 지키는 절기인 것입니다.
여러 가지 경험 가운데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잊지 못하는 경험 중 하나는 이렇게 많은 무리가 르비딤이라고 하는 곳에 도착되어서 장막을 치고 거기 머물 때에 아무리 사방을 더듬어 보지마는 물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모세와 다투기를 시작했습니다. 애굽에 그냥 있었으면 이렇게 목말라 죽는 것은 면할 수 있을 터인데, 어찌하여 그들을 그 곳으로 인도해서 그 곳에서 기갈에 넘어지게 하는가 고 모세에게 반박하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짖게 되었고 또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서 가졌던 지팡이로 한 반석을 칠 때에 반석 가운데서 생수가 솟아나서 많은 기갈 한 백성들과 가축이 그 물을 마시고 사경에서 벗어나서 생명을 얻게 된 사실이올시다. 이 위대한 기적을 기념하기 위해서 장막 절을 지키는 한 주간 동안에는 매일 아침 흰 예복을 입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행렬을 지었습니다. 선두에는 레위 사람들로 조직된 성가대가 찬송을 부르며 성전 뜰에서 거리 가운데로 행진해서 남쪽 문을 나옵니다. 그리고 실로암 못에 그 행렬이 도착된 다음에는 준비하여 가지고 갔던 물병에다 실로암의 맑은 물을 할 병씩 담아 가집니다. 다시 성가대를 선두로 해서 행렬을 지어서 성전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에 부르는 노래의 뜻은 특별히 이사야 12장 3절에 있는 말씀으로써『우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기르리로다.』 이 의미의 찬송을 부르며 성전 뜰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차례 차례로 성전 뜰에 있는 제단 옆에 그 물을 부으면서 많은 사람과 같이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는 풍속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주일 동안을 계속하고 마지막 날은 이 식을 폐하는 날입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여러 무리와 같이 예루살렘 성전 뜰에 서서 그 의식에 참여하였습니다. 그 의식이 다 끝난 이후에 예수께서 크게 외치는 말씀이『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리라.』옛날 반석을 생각하고 옛날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생각하는 그 순간에 과연 참 반석이 여기 있고 참 생수의 강이 여기 있다고 하는 진리를 모든 사람에게 선포하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읽을 때에 자연히 옛날 시내 광야가 연상이 됩니다. 오랜 40년간이라는 세월을 황막한 광야에서 배회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또한 연상이 됩니다. 목말라서 사람과 가축이 아울러 죽을 수밖에 없을 때에 반석이 갈라지면서 생수가 쏟아져 나온 그 현상도 다시 연상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기갈이 심하던 모든 사람들과 짐승들이 아울러서 생수를 마시고 새로운 생명을 얻고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광경을 또한 연상해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시내 광야를 통해서 우리는 이 세상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고, 거기 배회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이와 같은 세상에 방황하는 모든 인간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가 있고, 생수를 내어 주는 반석을 통해서 이와 같은 인간들에게 지금도 생수를 강같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또한 상상해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과연 생각해 보면 이 세상은 어떤 의미에서 광야와 같습니다. 광야는 물이 바른 곳입니다. 광야는 매 마른 곳입니다.


저는 일찍이 미국의 서 남방 뉴멕시코와 애리조나 지경에 있기도 하고 혹은 여행을 해 보면서 광야가 어떻게 처참한 곳이라고 하는 것을 친히 목격할 수가 있었습니다. 또한 전번 성지를 순례할 때에 유다 광야를 친히 보고 또한 그곳을 걸어 보았습니다. 광야는 사막은 아니지마는 역시 매 마른 곳으로 쓸쓸한 곳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렇게 적막한 세상입니다. 광야에는 화초가 적습니다. 혹 풀과 나무가 더러 있다 지 마는 어떻게 입사귀가 깔깔하고 가시가 많은지, 광야의 풀이나 나무에 그만 잘못해서 우리의 손과 다리가 닿기만 하면 우리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그런 가시나무가 많은 곳이 광야입니다. 그것은 물이 없는 곳에 나는 식물이니까 자연히 이와 같은 식물이 되는 모양입니다. 이와 같은 종류의 식물만 살수가 있는 모양입니다.


비슷하게도 이 세상은 우리가 살아 나아갈 때에, 우리 육신에 상처를 주고 우리 심령에 상처를 주는 요소, 이와 같은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는 광야 같은 세상 길을 우리는 걸어 갈 때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광야에 때때로 폭풍이 붑니다. 모진 사나운 바람이 붑니다. 흔히 다른 곳에 바람이 불 때는 비가 내리든지 혹은 눈이 내리지마는 광야에는 바람은 불지마는 내리는 것은 없고, 오직 모래와 흙이 바람에 불려서 지나가는 사람으로 하여금 앞을 볼 수 없으리 만큼 모래와 흙이 온 공중에 차서, 숨을 거의 쉴 수 없으리 만큼 질식 상태에 이르게 합니다. 그래서 이것들을 흔히 폭풍 사라고 합니다. 폭풍우라고 하는 대신에 폭풍 사라고 합니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때때로 천재가 있고 지변이 일어나며, 전쟁이 발발하고 재난들이 계속해서 쓸쓸한 광야와 같은 세상을 지나가는 사람으로 하여금 앞을 볼 수가 없게 하고 질식 상태에 있는 때가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는 이러한 세상입니다. 이와 같은 광야에서 40년 동안이나 이 곳 저곳으로 헤매 이 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연상할 때, 또한 옛날이나 오늘이나 이와 같은 세상 가운데서 방황하며 갈래 길을 대부분 잃고 사는 모든 인간의 모습을 우리가 또한 상상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 시내 광야에 있어서의 이스라엘 백성의 생활의 특색은 갈 곳을 자기 못하고,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지 못하고 목표를 잃은 이 백성이 이 곳 저곳 에 방황하는 것이 한 특색이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에도 목표를 정하지 못하고 이라 저리로 방황하는 가련한 인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의 육신 생활도 방황하는 때가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아마 우리 이 가운데는 문자 그대로 과거 일생을 돌아다 볼 때에 다 내 일생이 비록 짧지마는 이 때까지 얼마나 여러 곳으로 방황했는가, 스스로 감탄하는 이들도 없지 않아 계실 줄 믿습니다.
한국에서 본래 나기는 났지마는 일제 시대에도 한국에 살 수 없어서 멀리 만주로 떠는 분들도 이 가운데 계실 줄 믿습니다.


그 후에 간도 토벌이니 그 같은 어려운 일이 생겨서 또 다시 그곳에서 도피를 해서 혹은 북경을 가고 혹은 천진(天津)을 가고 혹은 남경, 상해, 등지로 방황하신 분들도 많이 계실 줄 압니다. 그러다가 광복이 된 이후에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또 다시 6·25 사변이 생기고 그래서 서울을 버리고 대전으로, 대구로, 부산으로, 저 제주도까지 밀리고 밀려서 방황하다가 마지막에 다시 이 곳까지 돌아와 사시는 분들도 많이 계신 줄 압니다. 문자 그대로 우리의 육신도 방황하는 배회하는, 생활을 하시는 이들이 많이 계신 줄 압니다.
육신 생활만 그런 것 아닙니다. 이와 같은 세상에 사는 그 심령들의 생활을 보면 더 방황하고 더욱 갈 길을 잃고 헤매이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은 이와 같은 사상, 내일은 저와 같은 사상, 오늘은 이와 같은 무리, 내일은 저와 같은 무리, 오늘은 유교에 가 보고, 내일은 천도교에 가 보고, 모래는 불교에 가 보고, 방황하는 심령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방황하고 배회하는 것이 인간의 심령 생활에 한 모습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혼의 목표, 영혼의 안전 지를 찾지 못한 심령들은 아직까지도 이렇게 광야에서 배회하는 가련한 심령들이올시다.


이렇게 육적으로, 영적으로 방황하고 배회하니까 자연히 그 심령들이 곤비(困憊)해집니다. 육신도 피곤하여집니다. 기갈이 심하여집니다. 평화를 구하지마는 광야 같은 세상에서 참된 평화를 찾지 못합니다. 안전을 구하지마는 이 세상에서 안전 보장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을 구하지마는 냉랭한 이 세상에서 참된 사랑을 찾지 못합니다. 만족을 구하되 만족을 얻을 수 없고 행복을 찾아서 다니지마는 참된 행복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그 결과는 마음속에 불평이 일어나고 불안이 가득해지고 불만과 불평이 가득히 찬 인간들이 모인 사회인지라 그 사회에는 도처에 분쟁과 분열이 접종해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오늘날 우리 한국 사회를 심리학적으로, 사회학적으로 분석해 본다면, 이 사실을 여실히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결국 광야에 헤 매이는 인간들은 불행한 인간들이올시다. 그려는 동안에 어느덧 청춘은 살지고, 기력은 쇠퇴해지고, 머리카락에는 어느덧 서릿발이 잡히기 시작할 때에 인간의 환멸과 탄식 속에 계속할 수 없는 생애를 계속하는 것밖에 다른 것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배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방랑의 생활을 하는 가련한 인간의 심령의 모습을 우리가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광야에 반석이 있었습니다. 반석을 칠 때에 갈라지면서 그 가운데서 생수가 솟아났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황막한 세상에, 기갈이 심한 심령들이 방화하는 이와 같은 세상에 반석이 임했습니다. 이 반석이 갈라지면서 생수가 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반석은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이상하게도 제가 정지에 가보니 물들이 흔히 반석에서 납니다. 이제도 말했지마는 실로암 샘물은 예루살렘 반석 가운데 굴이 있고 그 굴속에서 맑은 샘물이 강 같이 흘러나옵니다.   


여기 양덕(陽德) 온천에 가보신 이가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양덕 온천에 가 보면 굴속에서, 반석 속에서 뜨거운 물이 솟아납니다. 실로암 못에는 찬물이 솟아납니다. 여리고에 가보면 엘리사의 우물 역시 반석 가운데서 생수가 콸콸 솟아나서 강 같이 흘러 내려갑니다. 그래서 여리고 가 되었습니다. 제주도에 가면 이런 샘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와 같이 쓸쓸한 광야 같은 세상에 반석으로써 임해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수가 이 광야에 흐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의 주시는 은혜, 예수의 진리, 예수의 주시는 생명, 그리스도의 주시는 성신의 축복은 이 생수와 같습니다. 생수라고 하는 것은 웅덩이의 물과 다릅니다. 웅덩이 물은 냄새가 납니다. 생수는 새롭고 맑고 한 번 마시면 사람의 심령을 상쾌하게 합니다. 곤비하여진 기갈이 심하여진 심령들이 웅덩이 물 같은 세상의 오락, 세상의 향락, 세상의 무엇가운데서 그 기갈을 멈추려고 하지마는 실망하고 맙니다. 오직 생수와 같은 그리스도의 진리에 접촉해서 새로운 생명을 받을 때에 그 심령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주신 물은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내리는 물인 까닭으로 새로운 물입니다. 웅덩이 물은 죽은 물입니다. 가만히 있습니다. 곰팡이가 낍니다. 생수는 움직입니다. 그럼으로써 누구든지 그리스도 앞에 나와서 참으로 은혜 받고 성신을 충만히 받은 그 심령 속에는 새로운 움직임이 있습니다. 양심의 움직임이 있습니다. 지력의 움직임이 있습니다. 체력에도 움직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본래 주신 내 재능의 움직임이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여러 가지 운동이 일어나고, 여러 가지 사업이 일어나고, 언제든지 무슨 일을 하려고 할 때에 은혜 받은 사람은 기쁨으로서 협력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이 생수는 솟아오르는 물입니다. 물의 근본 성질을 우리가 흔히 말하기를 내려간다고 합니다. 사실 물은 내려갑니다. 이 생수는 솟아오르는 물입니다. 물이 얼마나 올라가는고 하니 수평선까지 올라갑니다. 자기 본래 있었던 자리까지 올라갑니다. 이 원리를 이용해서 우리가 수도를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이 샘물은 본래 하나님 보좌 옆에서 흘러내리는 까닭으로, 주님께서 주시는 이 생수는 높이 하늘 나라까지 그러므로 영원하도록 솟아납니다. 이 생수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시내 광야에서 목말라 헤 매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석에서 나는 생수를 마시면서 새로운 활기를 얻은 모습을 우리가 상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주님 앞에 나와서 이 생수를 마시고 은혜 받은 믿는 사람들의 모습이올시다. 예수께서 여기 말씀하시기를 그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리라고 말씀했습니다. 믿는 사람에게는 그 속에 생수가 있는 반석이 있습니다. 속에 생명의 강이 흐릅니다.
이제도 말했지만 여리고 근방에는 다 황막한 광야입니다. 그러나 여리고 성에만 들어가면 거기는 종려나무 가지가 푸르고, 아름다운 감람나무가 무성했고, 채소가 있고, 높은 뽕 나무가 있고, 모든 생명이 약동하는 아름다운 동산이 되어 있습니다. 그 까닭은 여리고 성안에는 엘리사의 우물과 같은 생수가 있는 까닭입니다.
제가 지난번에 솔로몬의 동산 있는 곳을 가보니, 어떻게 그 곳에 솔로몬의 동산을 만들었느냐 하면 그 곳에도 땅 속에서 솟아나는 생수가 있습니다. 이 생수를 근원으로 해서 솔로몬의 동산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심령은 물 대인 동산 같습니다. 성경에 있는 말씀 그대로 물 대인 동산 같습니다. 우리의 심령 속에 생명수가 있습니다. 시편에 보면 믿는 사람의 심령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다 광야로 흘러내리지마는 요단강 근처에는 아름다운 나무 속 무성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까닭은 그 속에 요단강이 있는 때문입니다. 믿는 사람의 속에는 말하자면 이 요단강이 있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의 생활에는 생명이 있고, 장성이 있고, 아름다운 꽃이 피고, 복스러운 열매를 맺히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의 심령에는 기쁨과 만족과 영원한 노래가 다 있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을 떠났지마는 전에 볼티모어에 있는, 존 홉킨스 대학의 외가 의사요 교수로서, 또 특별히 독실한 신앙을 가지고 전도에 열중하던 켈리 박사라고 하는 유명한 분이 계셨습니다. 저도 친히 그의 말씀을 한 번 들어보았습니다. 켈리 박사의 일화 가운데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그이가 언제든지 그의 양복 옷에다 좋은 장미꽃을 늘 꽂고 다니는 습관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 교수가 꽂고 다니는 장미는 도무지 시들지를 아니하고 그저 금방 꺾어서 꽂은 장미와 같은 꽃을 늘 꽂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선생님 꽃은 어떻게 그렇게 도무지 시들지 않는데 무슨 비법이 있느냐고 물었답니다. 그러니까 웃으면서 그 비법은 별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양복 앞섶을 뒤집어 보였습니다. 그 속에 보니까 조그맣게 옆집을 달고는 그 속에 물병을 넣었단 말이요. 그래서 실상 그 꽃이 물 속에 꽂히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시들지 아니하고 언제나 청청하게 보였던 것입니다.
그 때 이 켈리 박사가 하는 말이 우리가 이 세상에 다니면서 언제나 신선하고 아름답고 항상 향기를 나타내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가 되려고 하면 우리 생활 속에 뿌리가 이와 같이 물 속에 있어야 된다고 했습니다. 생명수 속에 있어야 된다고 그 진리를 가르쳐 주었다고 합니다.
『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내게 와서 마시라.』예수 그리스도는 생수를 주시는 반석이올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앞에 나와서 이 생수를 마실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습니다. 그에게 내 전 생명을 바칠 수 있습니다. 그 진리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속에 생명의 강이 흘러서 언제든지 풍부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1959년 2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