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한경직목사

십자가의 도 (고린도 전서1:18-25)

새벽지기1 2017. 7. 26. 07:27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고전1:18)

오늘 아침,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여기「십자가의 도」라고 하는 말씀은 원서대로 말하면 말씀이라고 하는 말이올시다. 요한 복음 1장 1절에『태초에「말씀」이 있으니』하는 말 가운데 말씀이라는 말은 도라는 말과 꼭 같은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십자가의 말씀은 곧 그리스도의 복음이올시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최고 절정은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수는 십자가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네 복음서를 읽어보면 이 복음들은 다 그리스도의 생활에 대한 전기인데 보통 세상 사람들이 어떤 세상 사람들에 대한 전기를 기록한 것과는 다릅니다. 보통 전기로 말하면 그 사람이 난 것과 장성한 것과 그의 사업 같은 것들을 길게 기록합니다. 그 사람의 죽은데 대해서는 별로 기록하는 사람이 적고 혹 기록한다고 할지라도 간단히 해 버립니다.
그런데 이 네 복음을 보면 복음에 적어도 3분지 2이상은 그리스도의 마지막 며칠 동안에 된 일, 곧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말씀은 곧 복음이올시다. 우리 기독교의 복음이올시다. 우리 기독교의 상징은 십자가요. 십자가는 우리 기독교 복음의 진수가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말씀, 이 말씀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십자가가 우리에게 말하여 주는 그 말씀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여러 사람이 여러 가지로 설명하였지마는 그저 간단히 알아듣기 쉽게 말하면 대략 네 가지 진리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제일 먼저,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십니다. 죄를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죄를 벌하십니다. 여기에 다시 말하면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죄에 대한 진노와 심판과 형벌을 우리에게 나타내어 주시는 것입니다. 먼저 십자가는 하나님의 의를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둘째는,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날 때에 죄 가운데 묻힌 만민들을 멸망을 받을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독생자를 친히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만민이 받을 형벌을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하나님께서는 독생자까지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주신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이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십니다.
셋째로, 이 십자가는 대속의 제사를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한갓 애국자의 죽음이 아닙니다. 다만 순교자의 죽음도 아닙니다. 어떤 진리에 대한 희생을 당하신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리스도 자신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와 같이 주님께서 오신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자기 목숨을 주려 오신 것입니다. 이 대속의 제사로 말미암아 만민의 죄 사함이 있을 수 있게 되었고, 멸망가운데서 생명의 길이 비로소 열리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는 이 대속의 진리를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넷째는, 이 십자가는 누구든지 이 십자가의 진리를 믿는 사람은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진리를 말씀하여 주십니다.

누구든지 선을 행함으로가 아니라, 의를 행함으로가 아니라, 법률을 지킴으로써가 아니라, 대속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 사람을 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진리를 이 십자가는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의 도가『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니라.』이와 같이 말씀하였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하나인데 이 십자가의 도를 받는 사람들은 두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가지 종류는 멸망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 종류는 구원을 얻는 자들입니다. 여기 본문대로 좀더 분명히 번역하면 멸망하는 자들이 아니고 멸망하는 중에 있는 자들입니다. 현재 진행으로 썼습니다. 또 구원 얻은 우리라고 번역할 수도 있지마는 좀더 분명하게 번역하면 구원을 얻는 중에 있는 우리라고 현재 진행 사를 여기에 썼습니다.


세상사람들이 많지마는 이 모든 사람들을 간단히 두 가지 종류로 분류할 수 있는데 멸망 중에 있는 자들과 구원을 얻는 중에 있는 자들입니다. 이 두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기 구원을 얻는 중에 있는 자들은 어떠한 사람들인가? 성경에 보면 구원에 대하여 과거, 현재, 미래, 이 세 가지 방면으로 기록한 데를 볼 수가 있습니다. 어떤 곳에 보면「구원을 얻었다」고 과거로 기록한 데가 있습니다. 어떤 데 보면「구원을 얻는다」고 현재로 기록한 데가 있습니다. 어떤 데 보면「구원을 얻겠다」고 미래로 기록한 데가 있습니다. 사실 이 세 가지 말을 깊이 생각하면 다 옳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구원을 얻은 사람들이올시다. 그것은 어떤 의미냐 하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하는 그 득의(得意)의 견지에서 볼 때, 우리는 예수님을 확실히 믿는 그 때로부터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롭게 우리를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온전히 다 거룩한 사람이 된 것은 아닙니다. 현재의 의미가 있습니다. 성화의 견지에서 보면 점점 거룩한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고, 성화의 교리의 견지에서 보면 우리는 다 구원을 얻는 중에 있는 사람들이올시다. 매일 매일 죄에는 죽고 의에는 살아 나가는 생활이 우리 신자들의 생활이올시다. 이런 의미에서는 우리는 구원을 얻고 있는 현재의 사람들이올시다.
그러나 미래의 의미도 있습니다. 우리는 온전히 구원을 얻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과 우리의 육신의 온전한 구원의 견지에서 보면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 아직도 미래에 있습니다. 구원을 얻어야 되겠습니다. 우리의 심령이 언제나 온전히 완전한 자리에 나아가야 되겠습니다. 우리의 육체까지 부활해서 신령한 몸을 얻어야 되겠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에는 우리의 구원은 아직까지도 미래에 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기 기록한 대로 보통 우리는 구원을 얻으려는 중에 있다고 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묘사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아시거니와 구원이라고 하는 뜻은, 본래 뜻대로 말하면,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고친다고 하는 뜻입니다. 치료를 받는다고 하는 뜻입니다. 병난 사람이 치료를 받아서 점점 나아가는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신령한 뜻으로 생각해 보면 여기 병은 육신의 병을 가르친 것이 아니고 죄를 가르치십니다. 죄는 전염병 같습니다. 죄는 문둥병 같습니다. 이런 무서운 병을 다 우리가 들었는데 그 병 가운데서 점점 치료를 받아서 온전한 자리에 나아가는 중에 있습니다.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이렇게 죄 가운데서 고침을 받는다고 하는 뜻입니다.
또 둘째로는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건진다고 하는 뜻입니다. 위태한 자리에 있다가 점점 안전한 자리로 옮겨진다는 뜻이 있습니다. 가령 물에 빠져서 물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을 어떤 사람이 그를 건져내서 점점 물이 옅은 안전한 곳으로 옮긴다고 하는 뜻이 있습니다. 이것도 신령한 의미로 생각하면 우리는 다 죄로 말미암아서 위태한 자리에 있게 되었습니다. 죄의 결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게 되었습니다.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서 벗어나서 점점 안전한 곳으로 옮겨온다고 하는 뜻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을 얻는 중에 있는 사람들은 마치 어떤 사람이 중병에 걸렸다가 매일 매일 조금씩 조금씩 나아서 건강하여지는 중에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또는 어떤 사람이 위태한 물 가운데 빠졌다가 헤엄 잘 치는 어떤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점점 물 속에서 이끌려 나와서 안전한 자리로 옮겨가는 중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여기 앉은 우리는 그러한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한 구원을 얻는 중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기에 기록한 대로 멸망하는 중에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멸망하는 중에 있는 사람들은 구원을 얻는 중에 있는 사람들과 정반대의 형편입니다. 병이 점점 중하여 가는 환자와 같습니다. 오늘 좀더 열이 오르고, 내일은 좀더 열이 오르고, 모래는 좀더 열이 오르고, 점점 중해 가는 환자와 같습니다. 점점 죽음을 향해서 가는 환자와 같습니다. 제가 전에도 한 번 말하였지마는 방콕에 가서 아편굴에 들어가 보니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참혹한 형편에 있는지 마치 중병 환자가 점점 죽음에로 나아가는 그 현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혹 문둥병자 수용 병원에 가보면 문둥병 환자들 가운데 그 병의 경중을 따라서 여러 가지 종류의 사람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멘 처음에는 손가락 하나만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좀더 중한 환자를 보면 손이 다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좀더 중한 화자를 보면 팔목이 다 없어지고 심지어는 발이 다 없어지고 다만 두부 덩어리처럼 된 문둥병 화자까지 여러분이 볼 수가 있습니다. 점점 병이 중하여지는 그런 가운데 있는 사람이올시다.
멸망하는 중에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영적 형편이 이와 같은 자리에 있다는 말입니다. 또는 점점 물에 빠져 들어가는 사람과 같은 자리에 있습니다. 배로 말하면 점점 가라앉고, 조금 가라앉고 한 시간 후에는 좀더 가라앉고, 며칠 후에는 좀더 가라앉는, 점점 가라앉은 배와 같은 형편 가운데 있는 사람을 가리킨 것입니다. 멸망 중에 있다고 하는 사람은 그 영혼의 상태가 이와 같습니다.


여러분, 누구든지 영적 견지에서 본다고 하면 가만히 서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점점 고침을 받아서 위로 올라가든지, 그렇지 않으면 점점 중한 병이 더해서 아래로 내러 가든지 우리의 심령은 그 두 가지 형편 가운데 한 가지입니다.
멸망하는 중에 내려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날마다 구원을 얻어서 독수리와 같이 날개를 치며 그 심령이 올라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두 가지 가운데 어떤 종류에 속합니까? 내 심령상태가 하루하루 거룩한 자리로 올라갑니까? 그렇지 아니하고 내 심령 상태가 불의한 자리, 더러운 자리, 멸망의 자리로 내려가는 가운데 있습니까?
그런데 십자가의 말씀은 하나이지마는 이 두 종류의 사람 중 종류를 따라서 십자가의 도에 대한 반영이 다릅니다. 십자가의 말씀이 다르게 들립니다. 십자가가 다르게 보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마 금강산에 있는 만물상을 구경하신 분이 여러 분 계실 줄 압니다. 그 만물상은 돌입니다. 돌이 여러 가지 모양으로 생겨서 참 만물처럼 보인다고 만물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기쁜 사람이 보면 그 만물상이 무엇처럼 보이는고 하니 그야말로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서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또 마음이 슬픈 사람이 그 만물상을 보면 그저 상제들이 곡하는 모양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같은 만물상이올시다. 같은 바위올시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에 따라서 다르게 보입니다. 


그것과 비슷하게 같은 십자가입니다, 같은 십자가의 도입니다. 그렇지만 멸망하는 중에 있는 사람에게와 구원을 얻는 중에 있는 사람에게는 각각 다르게 보입니다. 그래서 여기 하는 말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중에 있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미련하게 보인다고 합니다. 멸망 중으로 점점 내려가는 사람은 십자가가 미련하게 보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미련하게 들립니다. 우선 십자가 자체가 미련하게 보입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없지 않아 있습니다. 십자가는 본래 옛날 로마에서 노예든지 식민지 백성을 극형에 처형할 때 쓰는 형 구올시다. 가장 천하고 가장 더럽고 가정 무서운 것이 십자가였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가장 천한 사람들만 못 박히는, 이런 데 처형을 받은 어떤 분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것이 미련하게 들리지 않겠습니까? 미련하게 들립니다. 그래서 옛날 헬라 사람들에게 미련하게 들렸습니다. 로마 사람들도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미련하게 들었습니다. 알 수가 없고 미련하게만 들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도는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너무 단순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셨는데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는 너무나 단순한 교리입니다. 거기에 무슨 철학이 없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도 말합니다.『기독교는 깊은 맛이 없다. 차라리 불교는 깊은 맛이 있는데, 그리고 옛날 노자가 가르친 도덕경을 읽어보면 거기에는 깊은 맛이 있지. 기독교야 깊은 맛이 있어야지. 그저 애들과 부인들이 믿기를 좋지.』나같이 학식이 많은 사람이야 믿을 것이 못 되는 미련한 것으로 보입니다.
옛날 철학을 많이 숭상하던 헬라 사람들에게는 미련하게 들렸습니다.『믿음으로 구원을 얻다니 내가 선을 행하고, 내가 덕을 닦고, 그야말로 도고덕부(道高德富, 도가 높고 덕이 부)하여 내가 구원을 얻는 것이지, 무엇 어떤 진리를 믿어서 십자가를 믿어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 무슨 말이야. 그 덕이 없는 사람들, 그 천한 사람들이나 믿어서 구원을 얻는 것이지 우리 같은 사람이야 덕을 행했으면 얻지.』라고 말하며 비웃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미련하게 보입니다. 또 더욱이 대속한다는 진리가 많은 사람들에게 미련하게 들립니다. 누구든지 정직한 사람이나 정정당당한 사람이야 자기의 책임을 자기가 지는 것이지, 남의 덕에 구원을 얻겠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고 하며 자기는 자기 덕으로 구원을 얻겠다고 합니다. 물론 인류의 깊은 연대성과 자기의 성품이 얼마나 죄악으로 말미암아 부패하여졌다고 하는 보다 더 깊은 사실을 보지 못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입니다. 여러분 자세히 들으세요. 누구든지 십자가의 도가 이렇게 모이면 그것은 그 사람의 영혼에 멸망의 상태가 이만큼 중태로 빠졌다고 하는 것을 증거 하는 것뿐입니다.


사실은 십자가의 도가 미련한 것은 아닙니다. 미련하게 보입니다.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많은 철학을 연구한 사람들, 많은 학문을 연구한 사람들은 십자가의 도를 미련하게 보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맑은 날 대낮에 해를 쳐다보면서 어떻게 해가 밝지 못하고 어둡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은 단순히 눈 병신일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미련하게 보인다고 하면 그만큼 그 사람의 심령이 부패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밖에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구원을 얻는 중에 있는 자들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지혜도 됩니다. 그렇지만 지혜라고 하는 것보다 더 구원을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십자가의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의 죄를 깨닫게 하는 능력이 십자가의 말씀에 있습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회개하게 하는 능력은 십자가밖에 다른 데에는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변화하게 해서 더러운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불의한 마음을 의롭게 하고 부정직한 마음을 정직하게 하는, 즉 사람의 마음을 변화하게 하는 능력은 오직 십자가의 도밖에는 다른 데서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죄악 가운데 빠지고 죄악에 얽매여서 죄의 종이 되었던 사람에게 그로 하여금 죄의 쇠사슬을 끊고 해방을 받아서 자유스러운 사람을 만드는 능력은 십자가의 말씀밖에는 다른 데는 없는 것입니다. 죄를 이기게 하는 능력과 기쁨과 화평을 주는 능력이 십자가의 도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의 도는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나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제 한 주일 동안, 우리가 수난 주간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 수난 주간을 통해서 십자가를 바라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앞에 더욱 가까이 나오는 기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앞에서 내 자신을 스스로 반성하는 은혜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십자가를 전파하는 기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 걸은 더 나아가서 사도 바울과 같이 십자가를 자랑하는 그 자리에까지 올라갈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1959년 3월22일·저녁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