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한경직목사

성령 안에서 하나 (에베소서 4:1-16)

새벽지기1 2017. 7. 28. 06:19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3)

지난 부활 주일에 새로 학습 선 교우들도 여러 분 계시고, 또 새로 세례를 받고 혹은 입교 문답으로 입교한 교우들도 여러 분 계십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고 교회의 온전한 교인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한 온전한 지체가 된 이후에 제일 먼저 사모할 은혜가 무엇인가. 이런 문제를 우리가 자연히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새로이 세례 받은 분만 아니고 이미 오래 믿는 우리들도 우리가 교회의 일원으로서 마땅히 제일 먼저 받을 은혜와 또 우리가 특별히 힘쓸 면이 있으면 그것이 무엇인가를 이따금 생각하는 것이 필요한 줄 아는 것입니다.


에베소서를 보면 사도 바울이 다른 서신에도 보통 그런 방법을 쓰지마는 여기 1장에서부터 3장까지에는 우리 기독교의 진리를 간단히 설명합니다. 그리고 4장부터 마지막 장까지는 그와 같은 진리 안에서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어떠한 생활을 하여야 되겠는가. 다시 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의 도덕적인 면, 도덕적 생활 면을 특별히 교훈해서 가르치는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4장 1절에 보면 이런 말로 시작합니다.『그러므로 주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사도 바울이 서신을 쓸 때에 로마 감옥에 있었습니다. 주안에서 갇힌 나라고 기록했습니다. 아마 그 뜻은 주를 위해서 주님과 같이 있어서「주님 안에 있는 나」라고 하는 의미도 있는 줄 압니다. 하여간 이런 말씀을 쓰는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는 자기가 감옥에 있다고 하는 것을 자랑하는 것보다는 그가 권하는 이 말씀이 실상은 주께서 그의 마음속에 같이 계셔서, 그가 주안에 있어서 주님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권한다고 하는 깊은 뜻이 있는 줄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권면하는 말씀이『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1장에서부터 3장까지 우리 믿는 사람들이 본래 세상에 속하였고 죄악 가운데 죽었지마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아서, 영적으로 죽은 가운데서 부활해서 새로운 생활을 하게 되어서,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거룩하신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지체가 되었다고 하는 설명을 했습니다.


이렇게 우리들이 부르심을 입어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은즉 이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야 되겠다고 하면서, 계속해서 권면하는 말씀이『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줄로 성령이 하나이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그러면서 이 같은 뜻을 16절까지 내려가면서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절에서 16절까지에 제일 중요한 절은 3절이올시다.『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그리스도의 도리를 믿어서, 구원받아서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의 지체가 된 모든 교인들을 향해서 제일 먼저 가장 중요하게 권면한 말씀은 다른 말씀이 아니고『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것입니다.
여기 평안이라고 하는 말은 화평이라고 하는 말과 똑 같습니다. 화평의 매는 줄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 다 연결이 되었습니다. 이 화평의 줄을 끊지 말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하나 되게 하는 것을 힘써 지키라고 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다 한 성령을 받아서 이 한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될 것을 어떻게든지 힘써 지키라고 했습니다.
여기 힘쓴다고 하는 말은 그 원어를 보면 불타는 열심을 가지고 어떻게든지 믿는 사람과 믿는 사람 사이에 화평의 줄을 끊지 말고 하나 된 것을 어떻게든지 뜨거운 열심을 가지고 지키도록 힘을 쓰라고 이와 같이 권면했습니다.


여기 1절에서 16절까지 보면 특별히 세 가지 대지로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먼저 여기 2절 말씀 가운데에는 이렇게 하나는 유지하려고 하면, 우리 믿는 사람 하나 하나가 어떠한 은혜를 받아야 되겠는가를 말씀하셨고, 4절에서 6절까지는 우리 믿는 사람이 하나가 된 근본 기초가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7절 이하에는 우리 믿는 사람이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고 하는 그 의미는 어떤 것이며, 그 성품 질은 어떤 것인가를 우리에게 좀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먼저 성령의 하나가 된 것을 굳게 지키려고 하면 우리 믿는 사람 하나 하나가 어떤 은혜를 먼저 받아야 되겠느냐? 그리스도에게로부터 먼저 어떤 것을 배워야 하겠는가?
여기 몇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첫째는, 모든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먼저 주님께로부터 겸손을 배우라.』는 이 말을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겸손은 교만의 반대입니다. 내 부족한 것을 스스로 깨달아서 항상 자기를 낮춥니다. 우리 신앙 생활에 있어서 이 겸손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가는 여러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 말씀에『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복을 주신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시나 겸손한 자와 같이 계셔서 겸손한 자를 부흥하게 하여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더욱이 이와 같은 겸손의 덕이 공동 생활하는데, 즉 가정에서와 또한 대중생활을 하는 교회 안에서 화평을 유지하는데 얼마나 중요하다고 하는 것은 여러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는 줄 압니다. 먼저 하나 하나가 겸손의 은혜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둘째로는, 온유 하라고 했습니다.

온유의 은혜를 받으라고 권유했습니다. 온유는 글자 뜻대로 부드럽다고 하는 뜻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불평이 없이 순종합니다.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경륜에 대하여 불평을 품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온유하지 아니한 까닭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내게 하시는 모든 일에 불만을 가지지 아니하고 순복하고 이해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대하여도 역시 같은 태도를 취합니다.『유순한 대답이 격노를 그치게 한다.』고 하는 잠언의 말씀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예수께서는 산상보훈(山上寶訓)에서『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차지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온유한 자가 천국을 얻습니다. 이 온유의 덕이 우리 단체생활, 교회생활에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도 우리가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는 줄 생각합니다.


셋째로는,「오래 참음으로」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인내의 덕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너희가 인내로써만 내 영혼을 보전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지라도 참는 그 성품, 분할 때에도 참는 그 성품, 자기가 상처를 입어도 아픈 것을 참는 그러한 아름다운 덕은 그리스도의 성품입니다. 오래 참는 이것이 우리 공동 생활하는데 얼마나 필요하다고 하는 것도 길게 말할 필요가 없는 줄 압니다.『너희들은 인내로써 달음박질 마당에 달리라.』고 친히 성경에 교훈 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넷째는,『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라.』로 했습니다.

좀 다른 점이 있을지라도 너그럽게 생각하고 누가 실수가 있을지라도 좀 용납해 주고 한 걸은 더 나아가서 사랑 가운데서 용서해 주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화평의 줄로 설령의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려고 하면, 우리 믿는 사람 하나 나가 이와 같은 은혜를 먼저 받아야만 되겠습니다. 겸손하고 온유하고 오래 참고 사랑으로 용납할 줄 아는 사람이 모인 그 교회는 언제가 화평한 교회일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교만하고 거칠고 조급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적어서 피차에 용납하지 않고 용서하지 아니하는 이런 교회는 언제나 불평이 많습니다.


여기 기독교 도덕을 가르칠 때에 로마서에서 보거나 에배소에서 보든지 제일 먼저 겸손의 덕을 그르쳤습니다. 사실 이것이 기독교 윤리의 특색입니다. 그래서 옛날 니이체 같은 사람은 기독교 도덕을 노예의 도덕이라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이 도덕적 요소 하나 하나가 우리 주님 그리스도의 성품이올시다. 이 요소 하나 하나가 하나님 아버지의 속성이올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와 같은 태도로 대하여 주십니다. 먼저 이와 같은 겸손의 덕이 교회의 화평을 유지하는데 필요하다고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가 됨에 근본적인 기초를 우리에게 지적하여 가르쳐 주십니다. 왜 우리 믿는 사람이 주안에서 하나가 되어서 화평의 줄을 끓지 아나하여야 되겠는가?
일곱 가지를 가르쳤는데 첫째는,「몸도 하나이요」여기 몸이라고 하는 말은 그리스도의 몸을 가르쳤습니다. 곧 그리스도의 교회를 가르쳤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하나입니다. 지금도 신령한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 뿐입니다. 보이는 교회는 여러 교회로 나누어졌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아니하는 신령한 참된 교회는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 교회의 머리를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이 한 교회에 속하였습니다.
둘째는,「성령도 하나」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께서 보내신 보혜사(保惠師)는 한 분뿐입니다. 오순절(五旬節)에 모든 교우들이 받은 그 성신은 오늘도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십니다. 옛날 사람이 받은 성신이나, 오늘날 믿는 사람이 받는 성신이나, 한 성신입니다. 미국 사람들이 받은 성신이나, 아프리카 사람들이 받은 성신이나 우리 한국 사람이 받는 성신이나 성신은 한 분입니다. 성신에 두 분이 없습니다. 한 성신을 우리가 다 받아서 진리를 깨닫고 주를 믿습니다.
셋째는「소망도 하나」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없는 불멸의 영원한 썩지 아니하는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마지막에 다 한 아버지의 집에 갈 것입니다.
유감스러운 일은, 구리가 다 사람들인 까닭으로 어떤 때에는 한 교회에서 잘 모여서 예배를 보다가도 서로 불화해서 따로 갈려 나가, 따로 예배를 보는 경우가 혹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우리가 다 인간인 까닭으로 생기는 줄 압니다.
그런 일에 대하여 들을 때마다 어떤 때는 무슨 생각이 들어오는고 하니, 세상에서는 저렇게 따로 모여서 예배도 보고 그러치마는 그런 정신으로 그냥 가다가 이 다음에 천당에만 가면 함께 모일 수밖에 없겠는데 그러면 그 때는 어떻게 될까? 혹 그런 생각이 마음가운데에 일어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언제나 기억할 것은 우리의 소망도 하나님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 나라에 가서 화평한 가운데 한 하나님을 섬기게 된다고 하면 이 세상에도 어느 정도까지나마 화평한 가운데 한 하나님을 섬기어야만 될 것입니다.
넷째는,「주도 하나이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은 한 분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 하신 구주는 한 분밖에 없습니다. 우리 교회를 저장하시는 통치자는 한 분밖에, 곧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한 주님께 속했습니다.
다섯째는「믿음도 하나」라고 말씀했습니다. 물론 신조는 교파를 따라서 각각 조금씩 다릅니다. 예배하는 의식도 교파를 따라서 조금씩 다르고 또한 시대에 따라서 조금씩 변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은 근본적으로 하나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누구든지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은 하나입니다. 둘이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은 하나입니다.
그리고 여섯째는「세례도 하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나 어떤 교파에 가서 세례를 받든지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딴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하면 그것은 세례가 아닙니다. 세례는 하나 밖에 없습니다. 한 믿음을 기초로 한, 한 구주를 기초로 한 세례는 하나 밖에 없습니다. 똑 같은 세례로 죄 씻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일곱째는「하나님도 하나」이십니다. 만유의 아버지시이요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 유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은 이 우주가운데 한 분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다 한 하나님의 자녀이며 한 하나님을 공경하는 족속들이올시다.


이렇게 일곱 가지 기초 위에 우리 믿는 사람들은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화평의 줄을 끊지 말고 이 줄을 있도록 힘써 지키라고 간절히 권면한 것입니다. 그리고 7절 이하에는 그러면 어떠한 의미에서 우리가 주안에서 하나가 되었는가? 하나라고 하는 의미는 그럼 무슨 의미인가? 우리가 주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말은 우리 사람의 얼굴과 성품과 모든 것이 똑같이 하나가 되었다는 말인가? 물론 그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고린도 전서 12장을 읽어보면 이 원리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거기 우리 몸에 배유해서 그르치셨습니다. 몸은 하나이지만 몸에 붙은 지체를 여러 가진데 이 지체는 각각 다릅니다. 따라서 각각 맡은 바 직무도 다릅니다. 그러나 다 이 지체가 연합해서 하나가 되어 몸을 이룹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몸과 같이 하나입니다.
그 안에 있는 모든 교인들은 다 각각 조금씩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본래 다르게 내셨습니다. 지력이 다르고, 체력이 다르고, 그 모든 것이 조금씩 다릅니다. 또 하나님께서 같은 성신을 주시기를 주셨지만 성신을 통해서 주시는 은사 선물은 다 각각 조금씩 다릅니다. 이 다른 것은 오히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일을 하는데 유익하게 하게 위해서 이와 같이 만든 것입니다.


여기 우리 한국말로 꼭 표현하기 어려워서 영어의 글자를 그대로 표현한다고 하면 영어에 무슨 말이 있는고 하니「유니티 인 다이버시티 」(unity in diversity)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유니티(unity)라고 하는 말은 하나가 된다고 하는 뜻입니다.「다이버시티」(diversity)라고 하는 말은 여러 가지 모양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여러 가지 모양가운데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다양성 가운데 일치적 성질을 보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것은 꼭 무슨 교회와 교파 관계를 생각하면 모든 교파를 다 없이 하고 꼭 한 교파를 만든다고 하는 뜻은 아닙니다. 포도나무에 원 줄기는 하나입니다. 근간은 하나입니다. 그러나 포도나무에 여러 가지가 붙었습니다. 꼭 포도나무는 한 가지만 만들자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 하나라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어 각각 다르나 다른 가운데서 서로 연결해서 화평과 협조하는 그런 사람의 줄을 끊지 말고 주안에서 화평한 생활을 하라고 하는 듯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성품이 조금씩 다르고, 우리의 맡은 바 책임도 다르고, 하는 일도 조금씩 다르고, 사실 우리 믿는 것도 조금씩 다르지마는 다 주안에서 하나가 되어서 화평하고, 어떻든지 단결하여 주를 위하여 협력하여야 된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할 때에 고린도 교회에 당파가 있었습니다. 그런 사정 아래서 권면을 하실 때에 이런 말씀을 썼습니다.『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그리스도는 하나인데 너희가 하나된 그리스도를 나누고자 하느냐?』단단히 책망했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계의 현상을 살펴보면 교회 안에서 파당을 짓고 교회를 분열시키는 것을 너무 등한히 생각합니다. 주안에서 성도의 교제를 끊는 것을 너무 경하게 생각합니다. 사실 교회 안에서 파당과 분열과 교파끼리 싸움을 하며, 혹은 예배당을 중심하고 쟁탈전을 하며, 혹은 재판소에 나가서 믿는 사람들이 싸움을 하는 이와 같은 일들은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의 몸을 분열하게 하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몸에 피가 흐르게 하는 일인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만 되겠습니다.『화평의 줄로 성령의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우리 믿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이 교훈을 받아야 되겠습니다. 특별히 우리 한국 민족은, 우리끼리 있으니 말이지, 사살 약점 가운데 하나가 서로 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도 이런 이야기를 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몇 해 전에 상해에서 시애틀로 비행기를 타고 가 시애틀에 내려서 버스를 탓느데 바로 내 옆에 동양 사람 하나가 와 앉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얼른 보고 일본 사람인지 중국사람인지 모르겠기에 어디서 왔는가 고 말을 해 보니까 일본 사람이었습니다. 하와이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이 하와이에 우리 한국 사람이 많은데 하와이에서 오래(교사 일 보는 학교에서)있었으면 한국 사람을 더러 만나서 아는 사람이 있겠다고 내가 물었습니다. 자기는 여러 사람을 알고 있다고 하면서 누구누구라고 이름을 말했어요. 그러면서 나는 묻지도 않았는데 그 사람은 즉 왜 하와이에 사는 한국 사람들은 자꾸 싸움만 하는가 고 묻습니다.
여러분, 하와이에서 온 분에 계시면 용서하십시오. 이것이 사실이니까 말하는 것입니다. 또 사실 저도 하와이의 과거 사정을 좀 아는데 상당히 싸움이 많습니다. 다른 교포들은 서로 협조하면서 화평한 가운데 삽니다. 우리 겨레가 이렇게 교포간에 서로 싸움이 잦은 것은, 우리 민족의 한 약점인, 합하지 못하는 것 때문인 줄 압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과거의 죄를 회개하고 화평의 그리스도를 우리 주로 섬긴다고 하면서 우리 믿는 사람들끼리 하나가 되는데 본을 보여 주지 못하고 안 믿는 사람과 똑같이 그냥 싸움하고 파당을 일으키고 분열한다고 하면 중생의 의의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믿는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기독교도들을 가르치실 때 먼저 말씀하신 이 교훈을 언제든지 명심하여야 되겠습니다.
바로 지난주간 미 대통령 아이젠하워가 나토(NATO)이사회에서 연설하면서 단결이야말로 우리 나토의 생명이라고 고조를 했습니다. 과연 이 시대야말로 우리 기독교들이 어느 시대보다도 협조하고 단결하여야 할 때입니다. 문자 그대로 공산주의, 유물주의, 무신론적 사상, 세속주의 등 온갖 부패한 세력이 한국을 휩쓸고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든지 이 때에 화평하고 단결해서 우리 민족을 이 죄악 가운데서, 악한 사상 가운데서, 건져내는 데 총 진군해야 될 때입니다. 그런데 보면 너무 우리 믿는 사람들끼리 자체의 분쟁 때문에 정력을 소비해서 복음을 전파할 힘을 가지지 못하는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날, 잡히기 전 날밤에 제자들을 모아놓고 간곡한 말씀을 하실 때에『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준다』고 말씀했습니다. 열 가지 계명 외에 새 계명을 그들에게 준다고 말씀했습니다. 그 새 계명이 무엇입니까?『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우리들끼리 서로 사랑하는 것을 보면 우리가 주님의 제자인 줄을 세상 사람들이 알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 가시기 전에 모든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실 때에 제일 중요하게 기도한 제목이 무엇입니까?『저희들로 하여금 다 하나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아버지와 내가 하나가 된 것과 같이 저희들을 다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하신 것입니다.
산상보훈에『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제일 먼저 우리 믿는 사람들이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에 매는 줄로 성형의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은혜를 받읍시다.
(1959년 4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