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한경직목사

신앙생활과 내 자신 (마태복음:26:30-35,69-75)

새벽지기1 2017. 7. 31. 07:00

 
『베드로가 바깥뜰에 앉았더니 한 비자가 나아와 가로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마26:69)

오늘 아침 읽은 성경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올시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 저녁에 예루살렘 다락방을 떠나셔서 감란산으로 가던 중에 주님과 제자들 사이의 대화를 기록한 것입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오늘밤에 너희들이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떼가 흩어지리라 하는 그 말씀이 응할 것이니라.』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에 시몬 베드로가 하는 말이『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아니하겠나이다.』장담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으시고 주님께서 말씀을 계속해서『네가 나를 버리지 않겠느냐? 오늘 저녁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하리라.』하신 것입니다. 이 때에 시몬 베드로 하는 말이『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모든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와 똑같은 음성으로 같은 말을 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때에 자기의 사신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보다도 오히려 자기를 믿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 몇 시간이 지났습니다. 예수께서 과연 악한 사람들에게 붙잡히셨습니다. 대제사장 앞으로 끌리어 갔습니다. 여러 제자들은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베드로는 하회가 어떻게 되는가 보기 위해서 멀찌기 따라 가 마지막에 대 제사장의 집 앞뜰에서 예수님께서 심문 받으시는 광경을 멀리서 보았던 것입니다. 그 때에 베드로는 피곤했을 줄 믿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의 마음 가운데는 환멸이라고 할까, 자기가 상상하지 못하는 모든 일이 전개될 때에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연약한 심리 상태에 있은 줄 생각합니다. 그런 때를 타서 어떤 비자가 나와서『너도 갈리리 사람이 아니냐?』고 말할 때에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한 사실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번만 아니고 두 번째 또 모른다고 했고, 두 번만 아니고 세 번째는 절대로 관계가 없다고 맹세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예수의 시선과 자기의 시선이 마주치게 되고 닭이 우는소리를 들을 때에야 예수님께서 하시던 말씀이 다시 생각나서 곧 그곳에서 나아가서 크게 통곡하였다고 하는 기록을 우리가 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실수는 베드로만 하지 않은 줄 생각합니다. 우리가 다 베드로와 같이 우리 자신을 믿을 때가 있습니다. 보통 사도 베드로와 같이 어떤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경고하는 음성보다도 내 자신을 믿다가 실수하는 때가 많이 있는 줄 생각합니다. 오늘 신앙 생활과 내 자신이라고 하는 문제 아래에서 잠깐 동안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 각 사람에게 은혜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우리의 자신을 아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 것을 옛날 소크라테스 같은 사람의 교훈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항상 젊은 사람들을 만나서 권면하는 말이『네 자신을 알라.』고 권면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연약하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아니면 내 자신만으로는 옳은 길을 찾아 갈 수 없다고 하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높임을 받은 아브라함의 생활을 볼 때에 그의 믿음이 얼마나 위대한 것을 우리가 물론 인정합니다. 어떻게 그이가 갈대아 울에서 부름을 받아서 자기의 고향과 친척을 다 버리고, 알지 못할 땅으로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만 순종하고 나아간 그 믿음이야말로 오고 오는 세대에 항상 사표가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또한 그이가 난?을 지나고 가나안에 들어와서 여러 곳으로 배회하면서도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을 위해서 제단을 어떻게 쌓았다고 하는 것도 우리가 잘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브라함 같은 이도 마침 가나안에 흉년이 들고 애굽 땅에 곡식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애굽 땅으로 지나가게 될 때에 자기 아내 사라보고 하는 말이『우리가 듣건대 이 애굽 사람들은 대단히 악한 사람들이요. 또 내가 보매 당신은 아름다운 여자인데 당신 때문에 이 애굽사람들이 나는 죽일는지 알 수가 없으니 내가 당신을 누이라고 할 터인데 우리 그와 같이 말을 하고서 여기서 지나갑시다.』아브라함 같은 이도 그렇게 부끄러운 죄를 애굽에 가서 짓다가 마지막에는 애굽 사람에게도 책망을 받고 하나님의 도움으로만 그곳에서 나올 수가 있었습니다. 그 때에 아브라함이 자기 자신을 생각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온전히 하나님의 뜻대로만 정직하게 살았다면 오히려 그런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고 안전히 살 수 있었을 줄 생각합니다.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연약한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다윗의 생활을 잠깐 돌이켜 생각할 때에 또한 꼭 같은 인상을 우리가 얻습니다. 이 다윗이야말로 얼마나 젊어서부터 좋은 사람입니까? 어릴 적부터 자기 부모에게 효도한 사람이올시다. 자기 아버지를 도와서 베들레헴 들에 나가서 양을 치던 사람이올시다. 알지 못하거니와 불멸의 시라고 하는 시편 23편을 젊었을 때에 자기가 양을 치면서 이와 같은 시를 지었다고 대체로 추측이 되는 것입니다. 용감한 사람이올시다.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는 가운데서 이스라엘 백성의 큰 원수인 불레셋 사람 골리앗 같은 사람을 차돌 몇을 가지고 온전히 격파한 용감 담대한 용사가 곧 다윗이올시다. 그 후에 한 동안 다윗이 사울 왕의 핍박을 받았지마는 그런 가운데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는 중 낙심하지 아니하고 언제든지 사울 왕에게 대해서 기름부음을 받은 이로서 존경할 대로 존경하면서 자기의 처신을 한 것을 보면 모든 일과 모든 사람에게 얼마나 모범이 되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에는 다윗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고, 일년 후에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왕이 되고, 온 사방을 다 평정하고 그 때야말로 다윗 왕이 능히 도전할 사람이 아무 데도 없는 그런 때를 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연히 어떤 날 오후에 자기 지붕에 올라가서 아름답게 건설되는 예루살렘 성을 내려다보다가 어떤 여자를 보게 되었고, 그 순간에 큰 정욕이 일어나서 그 정욕을 이기지 못해서 자기의 충복의 아내를 겁탈하며, 마지막에는 자기의 충복까지도 죽이는 무서운 간음과 살인의 죄를 다윗이 진 것입니다.


사람의 육신이라고 하는 것이 이와 같이 연약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아니면 오늘 여기에 앉아 있는 우리도 언제, 어느 때에, 어떠한 환경 가운데서, 어떠한 무서운 죄에 들어갈는지 누가 납니까? 내 자신의 연약한 것을 내가 미리 알아서 조심해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흔히 신약을 읽을 때에 가룟 유다 같은 청년은 아주 약한 사람인 줄 압니다. 그렇지 아니합니다. 사실은 이 가룟 유다도 처음에는 높은 이상과 좋은 포부를 품고 자기의 민족을 위해서 염려하고 메시야를 대망(待望)하던 귀한 청년들 가운데 하나이었습니다. 갈릴리에서 새로운 선지자가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멀리 유다 지방에서 예수 님께 따라온 줄 압니다. 어떻게 모든 것을 열심히 잘 하던지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뽑히었습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도 돈주머니를 맡는 회계의 책임을 맡은 걸 보아 무슨 일이든지 똑똑히 하고 분명히 하고 책임감이 있던 청년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런 귀한 청년이 그만 예수를 3년 동안 따라다녀 보니 자기의 기대하고는 꼭 맞지를 아니합니다. 암만 살펴보아도 예수 그리스도는 결국은 그때 세력을 잡은 사람에게 무참히 희생을 당할 것이 뻔히 보입니다. 이런 예수를 더 따라 다녀야 쓸데없다는 그런 생각이 점점 마음가운데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럴 바에야 아예 돈도 받고 내 안전한 자리로 옮겨 앉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시험에 들었습니다. 결국은 자기자신을 믿던 그 육신이 시험에 들고 만 것밖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어떤 교육자가 자기 친구와 같이 길을 가다가 길거리에 술이 잔득 취해서 넘어져서 정신 없이 자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교육자가 그 친구에게 하는 말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나도 저 사람과 같이 되었을 것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부르시는 그 거룩하신 손의 도움이 아니면, 내가 내 자신과 나만 의지하고 살다가는 어떠한 환경, 어떠한 처지 가운데서 어떤 무서운 죄를 지을 는 지 우리가 모릅니다.
우리가 신문지상을 통해서 어떤 청년이 무슨 살인을 했다, 강도를 했다, 무슨 택시 강도가 되었다. 은행에 들어가서 돈을 빼앗았다는 이런 기사를 많이 읽습니다. 그 후에 그 사람들이 법정에 나와 진술하는 것을 읽어봅니다. 다 이구동성으로 진술하는 말이 자기가 어떻게 그런 죄를 범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런 죄를 생각지도 못했는데 그저 그 때 어떻게 되어 죄를 지었었다고 합니다. 그것도 사실인 줄 생각합니다.
얼마 전에 신문을 보니까 80된 노인이 담배 대로써 자기의 아내를 쳐서 살인을 했다고 합니다. 그 노인도 그 일을 저질은 후에 스스로 놀랐을 줄 압니다. 80까지 살다가 더욱이 자기하고 같이 살던 여자를 때려죽일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자기도 놀랐을 줄 압니다.


우리 사람의 육신이라고 하는 것, 내 자신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연약한 지 알 수 없습니다. 유혹이 올 때에 어떠한 시험에 들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경고하여 줍니다.『스스로 섰다고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우리가 우리의 자신을 믿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믿어야 됩니다. 그런고로 잠언의 저자는 젊은 사람들을 향해서 하는 말이『내 아들아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明哲)을 의지하지 말라.』내 명철을 의지하지 맙시다. 하나님을 의지하여야 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스스로 속지 말라고 경고를 하여 주십니다. 베드로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속았습니다. 다윗 왕도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속았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속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물론 내 자신을 자랑하지 말 것입니다. 자랑하는 자는 오직 주를 자랑할 것밖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 자신이 얼마나 연약하고 얼마나 시험에 들기 쉽다고 하는 이 사실을 기억하고 미리 조심해서 모든 유혹을 파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여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나 자신을 부인하라 혹은 이기라는 말씀으로 권면했습니다. 마태복은 16장 24절에 예수께서 친히 제자들을 향해서 하시는 말씀이『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내 자신을 온전히 부정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 뜻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뜻을 내 뜻으로 삼으라고 하시는 말씀인 줄 생각합니다.
또한 어떤 데 보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러한 말로 가르치셨습니다. 갈라디아 5장 24절에는『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그 육신과 그 자신과 함께 거기 붙은 정과 모든 욕심까지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아서 온전히 죽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의 경험을 스스로 말씀한 것처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였으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체험을 영적으로 자기가 당하였습니다. 자기 자신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친히 목 박여 죽었습니다. 대신 그리스도께서 자기 속에 계셔서 같이 사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대로 우리 자신 가운데는 옛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의 자신 가운데는 죄를 향하는 그 성품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깊은 진리를 모르는 우리 동양의 왕양명(汪洋明) 같은 사람도 산중에 있는 도적은 잡아 없애기 쉽지마는 마음가운데 있는 도적은 잡아 없애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 마음가운데는 도적이 있습니다.
미국의 문호 가운데 스티븐슨 같은 사람은 우리 사람의 속에 하이드 맨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숨은 사람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지킬 박사와 같이 점잖지마는 그 속에 숨은 사람은 악하다고 더럽고 추합니다. 이 숨은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사람이 하는 일을 성경은 이와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권모 술수와 원수 맺음과, 분쟁과 시기와 화남과, 당파를 짓는 것과 분리하는 것과, 이간과 투기와, 술 취하는 것과 방탕한 것과, 또 이 모든 것을 주장하는 속에 있는 옛 사람입니다.

이 죄의 법을 죽이고 우리의 신앙 생활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어 그 몸이 죽은 것과 같이 우리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처럼 못 박혀서 온전히 죽어야 합니다. 3일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같이 우리의 영혼이 다시 살아서 영적으로 부활한 생활을 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올시다. 이 십자가와 부활의 체험이 우리 심령 속에 있을 때에만 우리가 옳은 신앙 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로는, 네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로마서 12장 1-2절을 읽으면『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내 자신을 산 제사로 온전히 하나님께 드립시다. 나 자신을 온전히 맡겨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나 자신을 주장하도록 합시다. 나 자신을 내 마음대로 인도하려고 하지 말고 내 심령에 인도하는 그 권세를 예수 그리스도께 맡깁시다. 그리스도로 하여금 내 마음의 배의 선장으로 삼읍시다. 그리스도로 하여금 내 심령의 대상으로 삼읍시다. 내가 내 생활을 스스로 하려고 하지 말고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서 하나님께서 내 마음속에 계셔서 내 생활을 주장하게 합시다.
그래서 사도 바울 선생과 같이 나는 할 수 없지마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만큼 우리의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는 생활을 우리가 합시다. 몇 가지를 성경이 우리에게 우리 자신과 신앙 생활에 있어서 특별히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내 약점이 무엇이고 내가 항상 연약한 방면이 어디 있는지 미리 알아서 이것을 조심하지 아니하면 안 되겠습니다. 내 속의 죄의 법을, 옛 사람을 온전히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같이 못 박아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몸과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서 우리의 생명을 주장하도록 하여야 되겠습니다.
1861년 2월 11일 아침이올시다. 아브라함 링컨이 미국의 대통령으로 선택을 받아서 취임하기 위해서 자기가 20년 동안 살던 그린필드를 떠나는 아침이었습니다. 그 때에 미국은 큰 시련기를 당하였습니다. 노예 문제로 말미암아 또한 그 밖에 여러 복잡한 문제로 말미암아 남북 전쟁이 일어날 큰 위기, 즉 미국이 분열이 되느냐, 파괴가 되느냐 하는 어떻게 될는지 알 수 없는 큰 국가적 위기에 이 링컨이 대통령으로 취임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링컨을 전송하기 위해서 역에 나왔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링컨이 고맙다는 말을 하고 맨 마지막으로 이 말을 했습니다.『일찍이 워싱턴의 어깨에 놓였던 짐보다 더 큰 책임을 진 나는 언제 이곳에 돌아올는지 사실 다시 돌아올 수가 있을는지 알지 못하면서 이 곳을 떠납니다. 그(워싱턴)를 도와주신 하나님이 또 나를 이 때까지 인도하시고 내 전 운명을 주장하시는 이의 도움이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의 도움이 있을 때에는 나는 실패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신앙을 가지고 그는 대통령으로 취임한 것입니다.
이 신앙을 가지고 7, 8년이라고 하는 오랜 남북 전쟁을 통해서 미국 유사 이래에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서의 자기의 책임을 완수했습니다. 내 자신을 압시다. 이 세상의 물결은 높습니다. 악한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으려 다닙니다. 내 자신을 믿지 맙시다. 우리의 운명을 총괄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십시다. 내 자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마는 하나님의 도움이 있을 때에는 실패할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성공합니다.
(1959년 4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