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한경직목사

생의 황금율 (마태복음7:1-12)

새벽지기1 2017. 7. 19. 07:07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

이 말씀을 문자대로 다시 번역해서 읽으면 이렇게도 읽을 수 있습니다.『그러므로 무엇에든지 사람들이 너희에게 하기를 원하는 대로 너희도 그들에게 하여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올시다. 우리 생의 황금 율법이라고 이와 같이 흔히 말합니다.
전에 유대교에 힐렐이라고 하는 유명한 랍비 선생이 있었는데, 이 선생에게 어떤 젊은 사람이 와서,『선생님, 제가 외발로 서서 있는 동안에 율법과 선지자가 가르치는 모든 교훈을 간단히 가르쳐 주시면 고맙겠습니다.』이런 요구를 하였다고 합니다. 이 때에 이 힐렐이라고 하는 선생이 조금 생각하더니 한 마디로 하는 말이『네가 싫어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가서 하지 말라. 이것이 선지자의 율법의 교훈의 총 대지니라.』이와 같이 말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헬라 철학자 가운데 플라톤과 같은 사람도 인간 생활에 있어서 가장 간단한 원칙을 말한다면 이와 비슷하게 말할 수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 동양의 성현으로 우리가 다 존경하는 공자 님께서도 거의 꼭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기소불욕을 물시여인』(己所不欲勿施與人)이라고, 내가 하고자 아니하는 바를 사람에게 베풀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회회교의 교훈 가운데도 이와 비슷한 교훈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이 교훈은 지금 모든 교훈보다 다른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선생들은 흔히 소극적으로 가르쳤습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라, 다시 말하면 내가 싫어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라고, 이와 같이 소극적으로 가르쳐 주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진리를 가르치실 때에 적극적으로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하기를 원하는 대로 그대로 먼저 다른 사람에게 행하라고, 즉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무엇에든지 남을 먼저 대접하라고 적극적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이 원칙은 옳은 생활의 본질은 악을 제거하는 것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선을 행하는 데 있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소극적 권면대로 하면 이 세상에 악한 일이 물론 적어질 터이니까 대단히 좋습니다. 그러나 선한 행실에 대해서는 별로 권면이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이 황금률은 적극적으로 선행을 하라고 이와 같이 권면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이것은 주님께서 전에 알지 못하던 진리를 새롭게 가르쳐 주신 것은 아닙니다. 율법과 선지가가 이미 가르쳐준 말씀이올시다. 사실 이 교훈은 우리가 보통 말하는 대로 특별 계시에 속하는 진리가 아닙니다 이 진리는 특별 계시 이외에 보통으로 자연 계시라고, 일반인간의 양심을 통해서 나타내어 주신 도덕적 원리 가운데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더 분명하게 가르쳐 주시는 것뿐입니다.
이 황금률이야말로 인륜과 도덕의 진수올시다. 따라서 인간 생활의 원칙이 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 믿는 사람의 생활의 실제 행동의 원칙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 간단한 말씀을 잠간 동안 묵상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이 뜻을 좀 더 잘 깨달으려고 힘쓰려면 먼저 이 말씀에 대한 오해와 역용을 피하여야 되겠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여라』고 예수님께서 교훈 하시니까, 가령 여기에 어떤 아편 중독자가 있어서 나는 다른 사람들이 아편으로 대접하는 것이 제일 좋으니까, 다른 사람에게도 아편을 많이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이것은 전혀 잘못된 오해올시다.
또 어떤 술 잘 먹는 사람이 가만히 있다가 자기는 술대접 받는 것이 제일 좋으니 나도 누구든지 만나면 술대접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어떤 놀음 좋아하는 사람이 이 말씀을 보다가 누구를 만나든지 놀음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서『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데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한 이 말씀은 어떤 사람을 향해서 하는 말인고 아니 적어도 자기가 자기를 무엇으로 대접하여야 될는지를 바로 아는 사람들에 대하여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양심이 있는 사람을 향하여, 양심이 마비되지 아니한 사람을 향해서 하는 말씀이올시다.
자기가 아편을 좋아하는 것은 자기 자신도 자기를 바로 대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귀한 몸에다 알코올을 부어 넣어서 술독을 만드는 것은 자기 자신이 자신을 바로 대접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우리가 이 황금률을 이대로 실행하려고 하고 이 이치를 깨닫는 사람이 되려고 하면, 내가 먼저 신앙적, 양심적 인물이 되어서 선악을 바로 분간해야 합니다. 내가 내게 대접을 바로 할 줄 아는 고결한 인격의 소요자가 되지 아니하면 이 황금률을 우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와서 아첨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아첨하는 것이 듣기 좋거든요. 그러기에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이놈이 아첨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이 듣기 싫지 않거든.』아첨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자기도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늘 아첨하여야 하겠습니까?
이 황금률을 이해하려고 하고 이것을 실행하려고 하는 사람은 적어도 양심적 인물로서 자기 자신이 어떠한 대접을 받을 줄 아는 사람이어야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선 이 황금률대로 살려고 하면 내 자신을 먼저 수양해서 내 자신을 바로 대접할 줄 아는 그러한 사람이 되어야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자기가 이렇게 양심적 생활을 하고 자기가 수양을 해서 고상한 인격 생활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도 자기가 대접을 받기 원하는 대로 남을 대접할 수 있는 생활을 할 수가 있을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둘째 단계로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또한 다른 사람의 사정에 대한 이해와 동정심이 필요합니다. 내가 내 자리에서 무슨 대접받기를 원하는 것보다도 내가 그 자리에 있으면 다른 사람에게 그 자리에서 무슨 대접받기를 원할지를 생각해서 다른 사람에게 대할 줄 알아야 될 것입니다.


구약에 여러 선지자들이 있지만 특별히 에스겔은 자기 민족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 그 포로 사이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한 아주 역경에 처해 있던 선지자입니다. 포로로 멀리 바벨론의 그발하수가에 잡혀가서 그 불행한 가운데 있는 자기 동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할 때에, 이 에스겔은 먼저 그들과 같이 그발하수가에 가서 그 포로들과 같이 이래 동안을 있었습니다. 같이 생활하며 그들의 고독을 같이 체험하고 또한 그들의 사정을 이해한 연후에야 하나님의 더 큰 역사를 포로 가운데서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에스겔이 포로로 잡혀온 사람들의 자리에 같이 앉아서, 그러한 처지에서 생각되는 모든 것과 그 처지에서 요구되는 모든 것을 깨달은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에게 받은 귀한 말씀을 힘있게 그들에게 가르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단순히 이론적으로 내가 남에게 대접을 받기 원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여야겠다고 말하기는 쉽지마는, 실상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 그런고 하면, 그것은 내가 그 사람의 자리에 있으면 그 자리에서 내가 무엇이 필요할지를 능히 상상력으로 생각할 수 있고 따라서 그들의 정지를 이해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이 젊었을 때에 뉴 올리안즈라고 하는 노예시장에 가서 구경한 일이 한 번 있었습니다. 그 때에는 미국에서 흑노(黑奴)를 그냥 노예로 사용할 때이었음으로 노예시장이 있어서 흑노들을 다른 상품처럼 흥정해서 팔고 사고하는데 이 광경을 링컨이 직접 목격하였습니다. 한 가족인데 아버지는 딴 집으로 팔려가고, 어머니는 또 딴 집으로 팔려가고, 또 큰딸을 다른 집으로 종으로 팔려 가는 비참한 광경을 그가 보았던 것입니다.
비록 얼굴은 까맣고 공부는 하지 못했지마는 인정이야 다르겠습니까? 서로 갈라저 따로 갈 때에 목을 껴안고 울며 떨어지지 아니하려고 하나, 애통 가운데 할 수 없이 온 가족이 분산되는 광경을 링컨은 친히 목도했습니다. 누구나 그런 광경을 볼 때에 동정하지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동정을 더 할 수 잇느냐 하면, 만일 내가 그 자리에 있다고 하면 내가 어떤 느낌을 가지며, 내가 그 자리에 있다고 하면 어떤 대접받기를 원하겠는지를 생각해 보는 사람일 것입니다.
링컨은 젊은 시절에 이러한 광경을 보고 언제든지 그 광경이 자기의 머리에서 떠나지 아니했습니다. 내가 저 자리에 있으면 어떤 대접을 받기 원하겠는가? 그 대접을 이 흑노들에게 하지 않으면 안 되겠는데 그와 같이 하려고 하면 부득이 저 사람들도 나와 같이 자유스러운 사람이 되게 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겠다고 하는 굳은 결심을 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 사람의 처지에서 어떤 대접받기를 원하겠는지 그 대접을 생각해서 내가 다른 사람에게 대접할 수 있는 그러한 동정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지금도 80노령에 저 아프리카의 커메른 지방에서 일을 하고 있는 슈바이처 박사가 본래 독일에서 대학교 교수의 자리를 내어놓고, 자기가 다시 의학을 공부하고 자기 아내로 하여금 간호원 공부를 하게 해서 직접 자기들이 아프리카로 일하려 간 그 깊은 동기 가운데도 이와 같은 생각이 그 머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슈바이처는 어떤 날, 우연히 거리에서 조그마하게 만들어 놓은 흑인 동상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 흑인 동상을 통해서 그의 눈에는 아프리카에 수없이 많은 흑인들을 연상할 수가 있었습니다. 벌써 수 백년 동안 아프리카 발견된 이후에 우리 백인들이 저 흑인에게 어떤 대접을 하였는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얼마나 많은 학대를 했고, 얼마나 많은 압박을 하였고, 얼마나 많이 상품처럼 이용을 하였고, 착취를 했는지, 백인의 한 사람으로써 얼마나 가슴이 무거웠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자기 혼자라도 저 흑인들이 받기 원하는 대접을 하여 보겠다는 결심 가운데서, 좋은 자리를 다 내어놓고 직접 그 사람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그 사람들의 상처를 만져 주고, 병을 고쳐 주는 그 사업을 지금까지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기 원하는 대로 너도 남을 대접하여라 하는 이 주님의 명령을 순복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그런 고생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잘 아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생각할 때도 역시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 가다가 불한당을 만났습니다. 인사 불성이 되었습니다. 레위 사람과 제사장이 그를 보고 그냥 지나갔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지나가다가 차마 그냥 지나가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이 레위 사람과 제사장과 사마리아 사람의 차이를 가만히 생각해 본다면, 어느 모로 보든지 제사장이나 레위 사람이 먼저 이 사람을 구했어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보다 오히려 사마리아 사람이 이 사람을 구해 주었습니다.
아마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 있지마는, 그 가운데 제일 중요한 것은 이 사마리아 사람은 좀더 외로운 사람이올시다. 유대 사람 사이에서 외로운 사람이올시다. 외로운 사람인 까닭으로, 저렇게 어떤 사람이 외롭게 불한당을 만나서 넘어져 있게 되었는데, 만일 자기가 그렇게 혼자 다니다가 그런 형편을 당했다고 하면, 자기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대해서 무엇을 해주기를 바랐겠는가 하는 점이 있어서 이 사마리아 사람이 레위 사람이나 제사장보다 더 크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는 다른 사람의 사정을 이해하고, 다른 사람의 정지를 동정하는 것이 어떤 누구보다 더 강했던 모양입니다. 이것이 이 사마리아 사람으로 하여금 사마리아 사람이 되게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이 황금률을 실행하려고 한다면 다른 사람의 자리에 앉아서 그 사람의 정지를 상상해 보고 그 사람의 성질을 이해하고 동정하는 마음이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을 생각해 보면 그야말로 일생을 통해서 이 원리대로 사신 오직 한 분인 줄 생각합니다. 그는 사람의 정지를 알기 위해서 자기가 친히 육신을 입으셨습니다. 자기가 친히 고생을 당하셨습니다. 자기가 친히 주림을 당하여 보셨습니다. 자기가 친히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그 때 사람들과 꼭 같이 하셨습니다. 마지막에는 이와 같은 죄인의 자리에 앉아 이 죄인들을 구원하는 길을 오직 십자가밖에 없는 까닭으로 자기가 십자가를 사양하지 않고 강도와 같이 십자가에 달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황금률을 실행하려고 하면, 둘째로는 이와 같이 다른 사람의 정지를 내가 친히 살펴서 그 자리에서 남의 요구를 깨달아 아는 그 마음이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로 내가 양심적 생활을 해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분간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다른 사람의 자리에 앉아서 그 사람의 정지를 이해할 줄 아는 그러한 사람은 자연히 이 황금률에 가르치는 이대로 누구보다 더 가까운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단계로 이와 같은 생활을 하는 사람의 특색은 무엇이겠는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마는, 그저 간단하게 네 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 줄 압니다.
첫째로 이런 생활을 하게 되는 사람은 아마 누구보다도 공의와 공평을 힘쓸 것입니다. 공의라고 하는 것은 각 사람에게 마땅히 줄 것을 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명예에 대해서나, 그 사람의 지위에 대해서나, 그 사람의 물질에 대해서나, 절대로 차별이 없고 무리한 것이 없이 공평과 공의를 힘쓸 것입니다.
둘째는 누구나 실수하는 것을 우리가 다 압니다. 나도 실수하고 다른 사람도 실수합니다. 내가 실수하고 내가 죄를 지을 때에 우리는 자연히 다른 사람이 내게 대하여 자비로 대해 주고, 인내로 대해 주고, 관용으로 대해 주기를 원합니다. 그럼으로써 이런 사람의 생활은 자연히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 특별히 실수하는 사람, 죄를 짓는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든지 그 실수를 고치고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 자비한 태도와 인내의 태도와 관용의 태도를 가지도록 힘써야 될 줄 생각합니다.
또한 셋째로는 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같이 사랑의 생활을 실천하도록 힘쓸 것입니다. 할 수 있는 대로 좀더 친절히, 할 수 있는 대로 좀더 협조해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것을 협력해서 선을 이루도록 힘을 쓸 줄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황금률을 가만히 생각해 볼 때에, 만일 이런 모든 방면을 실천하게 되다고 하면, 우리의 생활이 어떻게 되겠는가 생각하여 보십시오. 가령 부부간에, 고부(姑婦)간에, 친척과 친척 사이에, 친구와 친구 사이에, 고용주와 직공간에, 주인과 점원간에, 주모와 식모간에, 공무원과 국민 사이에, 정당과 정당 사이에, 민족과 민족 사이에, 또한 나라와 나라 사이에 이 원칙을 어떻든지 우리가 실행한다고 하면 우리의 사회가 어떻게 될까요? 아마 이 원칙을 우리가 실행한다 하면, 무엇보다도 먼저 윌 사회에 싸움이 좀 적어질 줄 압니다. 따라서 좀더 명랑하여질 줄 압니다. 따라서 모든 건설과 발전이 빨라질 줄 압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왜 이와 같이 싸움이 많으며, 왜 이와 같이 명랑하지 못한 가운데서 우리가 살게 됩니까? 다 내 자신만 생각하고, 내 대접만 생각하고 내가 받기 원하는 대접을 남에게 먼저 대접할 줄 모르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현 세계는 자연 과학이 상당히 발전되었습니다. 그렇지마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과학 혹은 정치, 경제, 사회학 같은 것은 아직까지 유치하고 곤란한 시대입니다. 더욱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근본적인 도덕 사상, 윤리 사상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그야말로 정글 지대의 그 사상 그대로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생존경쟁이니, 우승열패니, 약육강식이니, 이와 같은 도덕 사상을 가지고 살므로 말미암아 오늘날 이 세계가 이 모양이 된 것이 아닙니까?


이 우주는 법의 우주입니다. 우리가 사는 자연계는 일정한 법률에 의지해서 움직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사회도 일정한 도덕률에 의지해서 움직입니다. 우리가 자연의 법칙을 어기면 우리 자신이 해를 받을 것밖에 없습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일정한 규칙이 있는데 이 법칙을 내가 어기면 내 자신이 손해를 받을 것밖에 다른 것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이 황금률은 무슨 새로운 것을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이 우주를 지으시고, 인간을 지으시고, 인간을 지으신 이후에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이것이 진리인 것을 우리에게 지적하여 주시는 것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황금률을 가르치실 때에, 기도를 가르치시다가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의미가 심장 한 줄 압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생활을 하려고 할지라도 사실 우리의 힘만으로는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정신으로써 사시고, 이 정신의 화신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의 마음가운데 오실 때에, 우리가 구하고, 우리가 찾고, 우리가 문을 두드리고, 성신을 충만히 받아서 그리스도의 신으로 우리의 마음이 움직이게 되고 충만하게 될 때에만 이 황금률을 어느 정도까지 실행할 수가 있는 줄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 귀한 교훈을 한 번 더 생각하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서 그리스도의 능력을 충만히 받아서 우리가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국가에서나, 조금 더 이 황금률을 실행해서 좀더 축복을 받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1959년 2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