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특강

탈식민지적 글쓰기와 설교문제(1)

새벽지기1 2017. 6. 12. 12:46



1. 탈식민지적 글쓰기 문제

인문학에서는 이 <식민지성> 문제가 이미 오래 전부터 상당히 진지하게 논의된 바 있으며,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들의 문제의식은 오늘의 지식인들이 주체적으로 사유하거나 글쓰기를 하지 못하고 외국, 소위 선진국이라 일컬어지는 나라의 학문적 방법론에 치우침으로써 앎과 삶이, 즉 지식과 실천이 철저하게 이원화 되어 있다는 데에 놓여 있다. 결과적으로 인문학은 학계나 사회에서 거의 무용지물이나 천덕꾸러기처럼 취급당하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오늘의 대학사회에서 인문학이 처한 위치를 살짝 들어야 보기만 하면 확연하게 드러난다. 대개의 대학교에서 철학을 중심으로 한 인문학 강의는 별볼일 없는 반면에 토익이나 컴퓨터 같은 강의는 만원사례다. 지금도 철학개론을 교양 필수과목으로 운영하고 있는 대학교가 대한민국 어디엔가 있기는 하겠지만 아마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현상을 단지 급변하는 이 시대정신의 탓으로만 돌릴 게 아니라 인문학자들 자신의 내부에서 찾아보려는 시도가 바로 이 <탈식민지적 글쓰기>라 할 수 있다. 직접 당사자가 아닐 뿐만 아니라 문외한이기도 한 내가 이 문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왈가왈부할 수는 없지만, 오늘 우리의 정신 사회적 현상에 대한 그들의 통찰이 정확하다는 점만이 아니라, 나름대로 인문학적 지식인 집단에 속하는 목사의 설교도 역시 이런 정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때문에 그들의 문제제기에 도움을 받아서 우리의 속을 들여야 보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모든 주장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외국 선생들의 학문적 성과를 지식 자랑하듯, 또는 상품 소개하듯 우리의 삶과  무관하게 소개하는 것으로 인문학의 역할을 끝냄으로서 한국의 인문학이 공소한 논쟁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말았다는 지적은 옳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구체적인 삶에 적실한 학문을 추구하는 것만으로 이 근본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소위 실사구시(實事求是)라는 게 또 하나의 일방성이나 부분성에 떨어질 위험성이 있으며, 더구나 이 세계와 인간은 그 인간이 예상하는 것을 뛰어넘는(초월적으로) 어떤 힘에 지배받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이렇게 작동하는 힘을 (성)령이라고 하는데, 이 영이 인간 이해에서 훨씬 실질적이라는 점에서 인문학의 이러한 인간 중심적 노력이 그것 자체로만 끝나지 말고 종교적 차원과 접맥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철(인문)학과 신학의 관계설정에 대한 문제는 오늘 강의의 핵심이 아니기 때문에 일단 접어두기로 하고, 우선 탈식민지성을 주체적인 글쓰기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는 전주의 한일장신대학교 철학과 김영민선생의 글을 인용하는 것으로 우리의 이야기를 풀어가자.

다시 정리해두자: 이 글의 중심에 자리잡은 개념, '인문 정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세상의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세상'을 만들려는 정신이며, 삶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만들어가는 사람의 무늬(人文), 그리고 묘(妙)의 지극함을 존중하려는 태도다.  ...중략...  아울러 그것은 도구적 합리성과 기술패권주의의 그늘에서 제대로 피지 못했던 정신의 꽃을 다시 가꾸는 정신이기도 하다. 나아가서 이 땅, 이 시대에 필요한 인문학의 정신은 삶의 터와 역사에 충실해서 생각의 자생성과 주체성을 기르고 사대(事大)의 눈치와 추수(追隨)의 허위의식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신은 우리 현실과 우리 언어의 괴리를 메우려는 용기와 지략이며, 삶과 앎 사이의 소통과 공조를 구체화하려는 말하기와 글쓰기인 것이다. (김영민, 진리.일리.무리, 31.).

위의 인용된 글을 따라 읽다보면 언어의 수사가 지나치다는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어쨌든지 인문정신의 개념을 정확하게 요약해주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 문장의 핵심은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간추려진다. 사람의 무늬와 그 신비함. 앎과 삶의 연속적인 연관. 올바른 합리주의정신. 자생적, 주체적 사유와 글쓰기. 이것을 다시 줄여보면, 인문정신이란 인간 삶을 주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런 정의에 의하면 식민지적 글쓰기는 인간의 삶을 소중하게 들여다보지도 않고, 그나마 약간의 흔적이라는 것도 여전히 비주체적으로 스쳐지나가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인문정신과 동떨어진 것이다. 지금까지 많은 인문학자들은 외국에 나가서 혼신을 기울여 공부한 내용들을 그대로, 또는 적당하게 가공해서 서양과는 전혀 다른 삶의 정황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한국 사람들에게 전수하는 것을 지상 목표로 삼았다. 오늘 한국의 지성인들은 헤겔, 니체, 푸코, 데리다, 하버마스 같은 이들의 사유논리를 그대로 따라가도록 강요받는 셈이다. 이들 거장들의 생각이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게 아니라 자신들의 자리에서 생각한 것을 우리의 자리에서 그대로 모방한다는 것은 인문정신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성악공부를 예로 들어 설명해보자. 우리의 음악대학에서는 서양음악과 국악이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는데, 두 음악 세계의 뿌리가 다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여기에는 무언가의 한계나 함정이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즉 성악과 교수들이 하는 일이란 단지 서양음악의 대가를 따라가는 것에 불과했지 그것을 우리가 주체적으로 해석해내는 일이 못되었다는 말이다. 음악이라는 것이 결국은 소리를 통해서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해보자는 것인데, 그렇다면 우리 한국 사람들의 정서와 삶의 경험에서 어떤 소리가 그런 미학적 범주에 들어올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아야 그 대답이 주어진다. 아직 대답이 없다면 그것을 찾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전통적인 남도창과 이탈리아의 아리아를 적절히 혼합해서 당장 써먹을 수 있도록 새롭게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는 게 아니라, 모든 인간 행위를 주체적으로 사유하고 실천해 나가는 기본 태도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앞에서 인용한 김영민 선생이 외에도, 이 문제를 여성학적 관점에서 접근한 대표적인 학자는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조(한)혜정 선생이고, 동양신학적 관점에서 해석한 학자는 부산 경성대학교 신학과 김승철 선생이다. 이들의 접근 방식이 모두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바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주체적 사유와 책읽기, 글쓰기 운동을 전개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  

이 <식민지성> 문제는 우리가 일제 하에서 한 세대 이상 피식민지 생활을 했다는 구체적인 역사적 경험 때문에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표면상 피식민지 상황이 끝난 이후로도 그런 식민사관에 젖어 있는 이들이 이 사회를 견인해 나왔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경제 분야에서 상당한 성과를 이룬 오늘에도 여전히 우리의 삶이 철저하게 비주체적인 상태에 있다. 이렇게 오랜 세월 우리 나라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만해도 그렇다. 최근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치사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의 정부와 일반 대중은 무의식적으로 미국에 의존적이다. 1,2백년이 지난 다음 우리의 후손들은 미군 주둔문제를 부끄럽게 평가할 가능성이 훨씬 많다. 이런 정치, 사회적인 식민지성 문제는 우리의 삶 전반에 깊이 뿌리박고 있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다. 문제의 핵심은 이런 사회학적 현상을 이용하고 있는 정치집단과 기업집단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진리에 충실해야 할 인문학자들 마저 자신도 모른 사이에 이런 식민지성에 물들었을 뿐만 아니라 부화뇌동하며, 더 나아가서 그것을 부추기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이런 식민지성에 근거한 권위주의와 허위의식에 안주하면서 자기의 학문적 재주를 확대재생산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시대가 아직은 어두운 시절이지만, 그나마 이런 문제의식을 중심에 두고 새로운(주체적) 글쓰기와 말하기의 장을 열어가는 일단의 인문학자들이 있다는 게 다행한 일이다. 이런 정도의 인문학적 상황을 말머리로 삼아 이제 우리의 문제로 넘어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