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특강

탈식민지적 글쓰기와 설교문제 (3)

새벽지기1 2017. 6. 15. 06:55


3. 식민지적 설교(신앙)의 역사적 토양

황석영 씨가 작년에 펴낸 장편 소설 <손님>은 6.25 당시 북한 어느(황해도?) 마을의 같은 동네 사람들끼리 서로 원수들처럼 싸우면서 수많은 사람이 죽게 되는 과정에서 기독교와 공산주의가 앞장을 서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황석영의 눈에는 이 두 집단이 모두 손님이었다. 그는 이들 손님 때문에 주인들이 살인을 저지르게 된 그 역사적 비극을 현실과 초현실의 교차방식을 통해서 찬찬히 그려냈다. 황석영이 말하려는 바는 기독교를 부정하거나 또는 공산주의를 긍정, 부정하는 게 아니라 양측 모두 우리에게 손님일뿐인데도 우리가 주인으로서 주체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주인이 주체적이어야만 손님들도 손님으로서의 주제 파악이 되고 주인과 손님의 정상적인 관계가 유지될 수 있는데 불행하게도 우리의 현대사에서는 이런 자리매김이 불충분하거나 아니면 왜곡된 셈이다. 이제 우리 기독교의 행태와 설교 안에 이런 비주체적 식민지성이 뿌리박게 된 역사적 실마리를 몇 대목만 간추려보자.

1) 근본주의 선교사

기독교를 한국에 전파한 선교사들이 대개 미국의 근본주의 노선에 속한 이들이었다는 사실은 우리 한국 기독교의 태생적 한계를 확연하게 보여준다. 선교사는 단지 복음만을 전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경험한 문화를 이식하기 때문에 이들 근본주의 경향의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서 우리 한국 기독교는 미국 문화의 못자리가 되었다. 조금 더 비판적으로 들여다본다면 그 당시 선교사들은 열강의 식민지배를 종교적으로 합리화시켜주는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 17,18세기 스페인과 포르투칼이 중남미에서 식민지를 개척해나갈 때 로마 교황의 이름도 한몫 단단히 한 것처럼 말이다. 이들은 기독교의 선교만 보장된다면 그 피식민지 문화가 파괴되어도 아무 상관이 없다고 여기며, 더 나아가서 그것을 오히려 선교라로 보았다. 우리 나라에 복음을 전파하러 온 선교사들이 모두 그렇다고 볼 수는 없지만 대개는 미개한 나라를 미국식으로 계몽시키는 것이 바로 선교의 열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들 덕분에 서양 의료기관이나 교육기관이 생긴 것까지는 좋지만 우리의 모든 가치관 마저 거의 사대주의적 식민지성을 면치 못했다는 점이 문제였다. 계몽이 다른 한편으로는 미몽의 덫으로 작용한 셈이다.

2) 미국 유학파

그런데 이들 미국 선교의 근본주의적 성격은 그들이 활동하던 한 시대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들과 직간접으로 연결되어서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온 우리의 1, 2세대 유학파 신학자와 목사들에 의해서 지속되고 고착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다. <아메리칸 드림>을 갖고 미국에서 공부한 이들은 한국에 돌아와서도 신학교와 교회에서 부지불식간에 미국의 정신과 가치관을 이식시켰다.

내가 신학교에 다닐 때 미국 유학을 다녀온 몇몇 교수들에게서 신학을 배운 기억이 있다. 정 아무개 교수는 성품이 원만한 분이었기 때문에 인간적으로는 존경할만 했지만 가르치는 내용은 형편 없었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필기했던 내용을 적당하게 번역해서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우리에게 받아적게 했다. 우리는 그가 불러주는 조직신학의 내용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베껴쓸 뿐이었다. 또 다른 조 아무개 교수는 박사학위를 획득했기 때문인지 우리에게 받아적게 하지는 않았지만 그 내용이 너무나 천편일률이었다. 1970년대에 공부하는 신학생들에게 18, 19세기 영국과 미국의 개인주의적이고 탈역사적인 신학을 아무런 해석학적 작업도 없이 일방적으로 강의할 뿐이었다. 우리는 이런 과정을 통해서 인간, 세계, 하나님을 폭넓게 배운 게 아니라 형해화된 교리의 체계만, 그것도 매우 개인주의적인 교리만 배우고 말았다.

이미 70년대부터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큰 물결을 일으켰던 CCC의 <사영리>나 <순모임>, 그 뒤로도 이런저런 성서연구 단체의 <제자훈련>과 <큐티> 방식들이 오늘도 한국 교회에서 모범적인 신앙 교육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데, 이런 흐름들이 단순히 미국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성격의 특징이 근본주의의 속성이라 할 성서 문자주의와 탈역사적 경건주의 및 성속이원론적이라는 점에서 적지 않은 문제를 안고 있다. 거의 십자군의 특성을 드러내는 이런 흐름으로 인해서 기독교는 한국이라는 사회로부터 우리가 예상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게토화되고 있다. 교회라는 아주 특별한 조직 안에서만 인정될 뿐이지 교회 밖에서는 그 어떤 구원론적 타당성을 갖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라도 기독교는 다시 신앙을 주체적으로 반성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한다.

3) 교회 외적 요소- 7,80년대 군사독재

다시 거론하고 싶지 않은 7,80년대의 군사 독재 시대가 한국의 기독교로 하여금 위에서 언급한 식민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 또 하나의 이유이다. 그 당시 이 사회가 안고 있던 그 숱한 문제들을, 즉 민주화, 경제정의, 생태문제, 남북분단체제, 미군문제를 설교의 중심 주제로 삼게될 경우에 직접적으로는 정부의 정보기관에 의해서 사찰을 받게 되며, 간접적으로는 교인들의 냉담한 반응을 견뎌내야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설교자는 당연히 우리 사회와 민족의 문제를 기독교 신앙 가운데서 주체적으로 판단하기보다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또는 교회는 세상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만 관심을 보여야 한다는 이원론적인 시각으로 설교하는 게 편했다. 이렇듯 편한 설교에 기울어지게 되면 결국 우리 사회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던 미국의 사고방식에 동조하지 않을 수 없다.

친일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거론되는 말이지만 드러내놓고 친일, 부일한 사람만이 아니라 사실은 힘의 논리에 지배당하는 사람들의 의식이 곧 식민지적 사고방식이라 할 수 있다. 오늘도 소위 박정희 개발독재론이 통하는 걸 보면 식민지성은 그렇게 쉽게 해결되는 게 아닌 것 같다. 흡사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이후에도 종종 애굽 시절에 대한 향수에 젖어들었듯이 말이다.  

4) 신학의 부재

아무리 우리의 뿌리가 미국의 부흥운동이나 복음운동의 근본주의 선교사들에게 있다거나, 7,80년대라는 독재시대를 거쳐왔다고 하더라도 기독교 신학이 바르게 정립되기만 했더라면 그런 숙명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러 이유로 인해서 한국 교회에는 신학이 활성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전도된 흐름을 바로잡지 못했다.

특히 설교(목회)는 기독교의 근본을 해명해주는 신학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단지 교회 발전이라는 단 한 가지의 목표로 집중되었다. 흡사 기업가가 그 어떤 수단 가리지 않고 기업의 외연을 확장시키려는 것처럼 교회의 설교가 이런 상품논리에 젖어들었다. 이렇게 신학적 반성 없는 설교는 당연히 미국이 표방하는 힘의 논리에 영합할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