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특강

탈식민지적 글쓰기와 설교문제(2)

새벽지기1 2017. 6. 14. 06:46


2. 설교(목회)의 식민지성 문제

요즘은 기독교 신문을 볼 기회가 많지 않아서 상황을 잘 모르겠지만, 지난 8,90년대에는 미국의 유명한 모모 교회를 탐방할테니 원하는 사람은 신청하라는 광고가 신문에 자주 실렸다. 한번 다녀오는데 수백만원이 들고, 나간 참에 관광과 물건구입을 하느라 더 많은 돈이 드는데도 적지 않는 목사들이 앞다투어 이런 이벤트성 행사에 참가했다. 이 비용도 자기 돈이 아니라 대개는 교회의 헌금으로 충당했겠지만 말이다. 그뿐만 아니라 미국 신학대학의 분교형식으로 학위를 주는 프로그램도 거의 유행처럼 우리 한국교회를 휩쓸고 있다. 대개는 한국에서 공부를 하고 여름과 겨울, 몇 주일씩 현지에 가서 공부하는 것으로, 또는 현지 대형교회를 탐방하는 것으로 과정을 끝내고 대충 논문을 쓰면 학위를 받게 되어 있다. 물론 이런 미국 교회 탐방이나 성지순례, 또는 무슨무슨 분교 따위의 학위 과정에 들어가는 모든 행위가 비난받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며, 또한 반드시 권위있는 학위과정만 절대적이라는 뜻도 결코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이런 전반적인 행태가 거의 우리의 의식, 무의식에 자리잡고 있는 식민지적 사유에서 토대를 두고있다는 점이다. 외적인 힘을 가진 나라의 가치관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기준으로 삼아 생각하고 판단하는 삶의 유형을 식민지성이라고 한다면 한국 목회자의 의식은 바로 여기에 정확하게 들어맞는 게 아닐까 생각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교회 문제 안으로 들어와서 한 가지 예를 든다면, 찬송가 문제가 그것이다. 558장에 이르는 우리의 찬송가에 수록된 찬송은, 독일 곡도 약간은 있지만, 거의 18,19세기에, 그리고 부분적으로 20세기 초에 영국과 미국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기독교 역사 1백년이 훨씬 넘었고 남한의 기독교인 수만 1천만 명이라고 하는 한국 교회가 여전히 이 삼백년 전의 영국과 미국 기독교인들과 똑같은 정서적 기준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나마 예술적인 품격이 있다면 아직 우리의 준비가 없는 탓으로 자책하면서, 또는 예술의 범세계성이라는 허울을 방패막이로 삼아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곡들은 기독교 신앙을 일종의 개인적인 감상주의나 탈역사주의라는 한계 안에서만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이 문제는 바로 우리 신앙의 병적인(식민지적) 증상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직접 설교 문제와 연결시켜서 이 식민지적 현상을 생각해보자. 지난 여름에 서울의 중대형 교회에서 시무하는 친구 목사들이 우리 집에서 하룻밤 묵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한국 교회의 대표적인 설교자들을 언급하면서 그중에 사랑의 교회 옥한음 목사도 포함되었다. 직접 그분의 설교를 들은 적이 없는 나로서는 일단 그분의 설교집을 한 편 읽는 게 그래도 한국 강단을 이해할 수 있는 첩경이라고 생각되어서 두란노에서 출판된 "그리스도인의 자존심"이라는 설교집을 빌려왔다. 그 내용은 접어놓고 우선 그 전개 과정에서 하나의 특징을 발견했다. 옥한흠 목사가 인용하는 예화나 인물들이 거의 외국의 상황에서 일어났던 것이었다. 엘에이, 워싱톤에서 벌어졌던 일들, 외국 철학자들의 말들을 너무나 자주 인용했다. 예컨대 "그리스도인의 진면모"(목?)이라는 첫 번 설교에 쇼펜아우어, 스펄전, 마르셀이 등장한다. 왜 그들이 그런 이야기를 했을까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도 없이 단지 그들의 그럴듯한 경구만을 부분적으로 인용했다. "성도의 제사장"이라는 세 번째 설교에서는 로스앤젤레스 이야기가 무려 세 군데나 인용되었다. 15편의 설교가 모두 이런 것은 아니지만 대개가 이렇다. 내가 언젠가 짧은 시간 들여다본 지구촌 교회 이동원 목사의 <사도행전 강해>도 역시 미국 예화가 즐비했다. 자신들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미국의 가치가 우월하다는 생각으로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 같은데, 사실 우리도 이런 점에서는 떳떳하지 못하다. 다른 한편으로 많은 목사들이 설교를 하면서 웬 영어를 그렇게 많이 사용하는지 모른다. 대학 강단에서도 가능한대로 우리 말을 바르게 사용하는 게 바람직한데 설교 중에 영어를 남발한다는 것은 어딘가 고장나도 한참이나 고장난 게 아닌가 생각된다. 내가 이 자리에서 몇 설교자들의 설교를 공연히 트집잡으려는 것은 아니다(솔직히 말해서 이렇게 트집잡는 일이 재미가 있긴 하지만). 단지 많은 젊은 후배 목사들이 따라가고 싶어하는 그런 분들의 설교에 내면화 되어있는 그런 의식이 비록 작은 것 같지만 우리의 목회와 설교 전체를 규정할 수 있는 암호라는 점에서 한번 짚어본 것 뿐이다.


지난 9월25일 저녁에 미국 대사관의  홍보 참사관이 대구 지역 목사 몇몇을 초청해서 간담회를 가졌다. 이런 간담회라는 게 늘 형식적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관심이 없었지만 중간에 다리 역할을 한 분의 얼굴을 생각해서 참석했었다. 그 참사관이 하는 말이 미국인들은 남한을 자기들의 고귀한 가치를 가장 잘 실현한 나라로 본다고 한다. 즉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를 가장 모범적으로 실현한 나라가 바로 남한이라는 것이다. 그가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남한의 기독교가 놀라울 정도로 빠른 시간 안에 성장했다는 점도 역시 미국인들이 한국을 보는 시각에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런 이들의 평가가 얼마나 사실에 접근해 있는지 하는 문제는 우리의 관심이 아니다. 다만 남한은 미국의 가치를 열심히 따라온, 그래서 그것을 가장 적극적으로 성취한 나라로 여긴다는 대목이 마음에 걸렸다. 우리 남한은 미국이라는 선생이 잘 키운 수제자라는 말이다. 그들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사실상 우리도 그런 생각에 물들어 있다. 특히 기독교는 거의 일방적으로 이런 미국 편향적 사고방식에 물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자리에 참석한 어떤 분은 그 참사관에게 미국 비자 좀 잘 내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위에서 설교와 목회에 드러난 식민지성의 몇 가지 사소한 예를 들었지만, 그것은 어쩌면 겉으로 드러난 작은 현상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 내면에 숨어 있는 문제를 짚어보는 게 훨씬 바람직하다. 그 문제의 핵심은 곧 인간 삶을 주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소위 선진국의 문화에 의존적이기 때문에 우리의 설교가 공소성(空疎性)에 빠졌다는 점이다. 따라서 대개의 설교가 일종의 종교적인 잔소리나 여담일 뿐이지 우리에게 어떤 충격을 가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 회심(메타노이아, 하나님 나라를 향한 방향 전환)으로 이끌어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설교의 공소성은 두 가지 극단적인 성격으로 나타난다.

첫째, 우리의 설교는 가현설적 성격이 지나치게 강하다. 설교의 가현설적 성격에 대한 문제는 이미 헬무트 틸리케가 <현대교회의 고민과 설교>에서 명쾌하게 해명해 준 바 있는데, 이런 현상은 우리 한국 교회의 설교에서는 훨씬 노골적이다. 헬라의 영지주의에 영향을 받은 이 가현설은 인간을 이원론적으로 이해한다. 영과 육, 선과 악, 빛과 어두움 등등. 이 세상에 이런 대립적인 요소들이 없진 않지만 늘 그런 식으로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성서와 기독교 2천년 역사는 이런 부분적인 현상에 휩싸이지 않고 그 모든 근원을 하나님 안에서 발견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경우에 설교가 세계, 인간, 역사를 이원론적으로 구분한 가운데서 진행된다. 예를 들어서 옥한음목사의 설교 "성도의 제사장직"의 결론 부분을 한번 발췌해보자.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의 영광스러운 신분을 함부로 땅에 굴리지 마십시오. 죄와 타협하지 마시고, 세상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추종하지 마십시오. 대궐같은 집에 초대받아 가 보면 의외로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의 내면은 말할 수 없이 황폐한 경우를 가끔 볼 수 있습니다. 차라리 작은 집에 살면서 하나님 나라의 곳간에 재물을 쌓는 생활을 했다면, 그 사람의 제사장 신분이 얼마나 영광스럽게 보이겠습니까?(54).

이 설교는 참으로 좋은 말들로 채워졌지만 너무나 추상적이며, 동시에 이원론적 세계 이해에 머물러 있다. 물론 옥목사는 앞부분에서 제사장답게 사는 게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긴 하지만 그런 설명 조차도 여전히 가현설적이라는 데에 더 큰 문제가 있다. 예컨대 제사장답게 사는 것은 세상에서 죄를 짓지 않는 것이라고, 아주 당연한 공자 말씀처럼 하고 있지만 거기서 생각하는 죄가 무엇인지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가 예를 들 듯이 나이트 클럽을 운영하다가 예수 믿고 바르게 살려고 하니까 결국 나이트 클럽이 망하게 되었고, 그래도 영적으로 즐겁게 사는 것이 바로 제사장다운 삶일까? 그가 생각하는 죄는 세상을 이원론적인 시각으로 죄악시하는 청교도적인 차원에서 한걸음도 더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이런 죄 이해는 아주 구체적인 것 같으면서도 실상은 공허하다.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에, 그리고 이 사회 내에 교묘한 방식으로 자리잡고 있는 죄의 뿌리를 성서와 기독교의 근본에서 잡아내지 못하고 단지 개인적인, 사회적인 부도덕성에만 집중하고 있다. 약간이라도 생각이 있는 회중이라고 한다면 이런 설교에서 흡사 근본주의적 복음주의자인 빌리 그레함의 설교를 다시 듣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다른 한편으로 설교가 지나치게 값싼 실용성에만 머물러 있다. 설교의 가현설적 성격이 하나님의 말씀을 추상화 시켜버렸다면 이 실용주의적 성격은 신앙을 자기가 살아가는 삶의 도구로 삼음으로써 또 다른 공소성에 빠지고 말았다. 일종의 인간중심주의라고도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도구화가 바로 우리의 신앙과 설교의 특징이라는 사실은 비교적 괜찮다고 이름난 설교를 약간만 들여다보면 아주 확연하게 드러난다. 금년 10월호 <기독교 사상>의 "내가 추천하는 이 한편의 설교"에 실린 이재철(前주님의 교회)목사의 설교 "하나님께로부터"에 나오는 결론 부분은 이렇다.

한 가정 주부가 쓴 아름다운 글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아이들 위해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는 귀하고 복된 삶을 누리게 해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지만, 또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딸꾹질을 멎게 해주십시오. 아이가 고통스러워합니다. 하나님, 트림 잘 나오게 해주십시오. 토하면 어떡해요. 하나님, 변을 본 지 너무 오래되었습니다. 빨리 변을 보게 해주십시오. 하나님, 소화가 잘 되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조금씩만 먹는데 소화까지 잘 안 되면 안 되잖아요. 하나님, 지금 손톱을 깎아줍니다. 이 작고 여린 손가락, 다치거나 피나지 않게 해주십시오. 하나님, 코가 막혔습니다. 저는 할 수 없으니 하나님이 뚫어주세요." 정말 아름다운 글입니다. 이 주부는 아이의 트림 속에서, 아이의 딸꾹질 속에서, 아이의 일거수일투족 속에서 하나님을 뵙고 있습니다.이처럼 매사에 하나님을 뵙고 느끼며 사는 이분의 매일이 새날이 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107).

일상의 작은 부분에서 늘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아야 된다는 그의 생각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또한 기본적으로 그런 생각에 동의하고 있지만, 이 문제를 이런 식으로 접근한다는 것은 우리가 신앙을 도구화 하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설교를 신자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도구로 여긴다는 것이다. 이미 이목사는 이 설교의 도입부에서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시간은 인생이고 인생은 곧 흐름입니다. 그러나 그 흐름의 객체가 되느냐 아니면 주체가 되느냐는 이처럼 엄청난 차이를 초래합니다. 그러므로 이미 내 눈앞에 버티고 서 있는 1994년을 정녕 새해가 되게 하기 위해서는, 어제와 변함없는 자리에 가만히 앉아 다가오는 새해를 수동적으로 맞이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 경우 흐름의 주체가 된 1994년은 또다시 나와는 아무 상관없이 흘러가 버리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어제의 자리를 털고 일어나 1994년 속으로 뛰어드는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에 흐름의 주체가 된 나는 객체인 시간을 새 시간, 새해로 가꿀 수가 있습니다.(100).

이 얼마나 비신학적이고 비성서적인 생각인가? 이목사는 서양근대주의의 <주객도식>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의 주권인 시간마저도 인간이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신자들은 자기들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얼마든지 자신만만한 인생을 구가할 수 있다고 부추겨주니까 은혜를 많이 받는 것으로 착각한다. 인간이 시간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지 깨닫고 진작에 어떤 의도를 포기하고 <솔라 그라티아>에 의존해서 살아가게 하는 것이 설교인데도 불구하고 한국의 많은 설교자들은 우리 인간이 마음먹기에 따라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소위 <아이 켄 두 잇> 이념을 기독교 신앙으로 변호하고 있다. 물론 겉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이라고 말은 하지만 의식 속에는 인간중심주의, 업적주의, 자기만족주의가 가득 차 있다. 이런 설교는 비록 종교적인 단어를 나열하기는 하지만 인간이 성취해야할 도덕성, 사회봉사, 능력개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세속적이다. 신앙 마저도 자기 능력으로 여기고 있으니까 약간 세련되었다는 교회의 설교도 역시 초등학교 교장의 훈계나 아니면 대학 선생의 주부교양강좌 수준에서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못한다. 근대주의가 이성을 도구적으로 여겼듯이 우리는 여전히 이 신앙을 통해 이 세상에서 (모)범생으로 살아가는 것을 설교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서로 대립적인 이 두 요소가, 즉 이원론적인 가현설과 도구적 실용주의가 한국 교회의 설교에서는 교묘하게 착종되어 있다. 열광주의적 소종파처럼 이 세상을 이원론적으로 보고 어떤 피안적 구원을 추구한다면 이 세상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포기해야만 하는데, 이상하게도 기독교인들이 훨씬 이 세속의 차안적 구원에 매몰되어 있다. 영적인 면에서는 관념적이고 실제 삶에서는 세속적이라는 말이 된다. 이 세속적이라는 말이 반드시 물질이나 사회적 입지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사회봉사와 도덕성의 강조라 하더라도 결국 사회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이니까 결국은 세속적인 가치이다.

위에서 언급한 두 요소가 식민지적 사유의 근거에서 배태되었다고 보는 까닭은 우리가 우리의 삶을 주체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어떤 강한 세력의 구도에 치우침으로써 이런 가현설적 설교와 실용주의적 설교로 흘러들었다는 데에 있다. 만약 우리의 삶을 주체적으로 생각할 줄 안다면 그렇게 주먹구구식으로 자신도 잘 알지 못하는 거룩한 삶, 영생을 거들먹 거리거나 이 세상의 죄와 짝하지 말라고 일방적으로 선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은근히 자본주의와 세속주의에 영합하도록 설교하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