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철목사

달려가서 (행 8:25-40)

새벽지기1 2017. 4. 6. 06:39


이틀 전, 그러니까 1999년 12월 31일이었습니다. 제네바 시간으로 오전 11시, 세계에서 2000년을 가장 먼저 맞이한 남태평양 키리바티(Kiribati)의 캐롤라인 섬에서 시작된 새 천년맞이 축제는 기스본(뉴질랜드) 시드니 동경 서울 북경 델히 카이로 베들레헴 아테네 로마 베를린 빠리 런던을 거쳐 상빠울로 뉴욕 워싱턴 시카고에 이르기까지, 해가 떠오르는 방향을 따라다니며 온 세계를 축제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습니다. 각 도시가 경쟁적으로 벌인 축제 행사는 참으로 장관이었습니다. 호주 시드니 당국은 그날 단 하루 밤의 행사를 위해 무려 3년간이나 준비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빠리의 폭죽놀이를 위해 에펠탑 안에 설치되어 있던 폭죽과 플래시만도 각각 2만개나 되었습니다. 아예 거대한 밀레니엄 돔을 건축하기까지 한 런던이 이번 행사를 위해 소요한 경비는 무려 7억5천8백만 파운드였습니다. 워싱턴에서는 세계 최고의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거가 연출한, 미국의 과거와 미래를 압축한 영화 '아직 끝나지 않은 여행'이 상영되어 열기가 더욱 고조되었습니다. CNN을 통해 방영된 서울의 행사 장면 또한 굉장했습니다. 


행사가 열린 대 도시마다 100만 명에서 200만 명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군중이 운집하였고, 그들은 한결같이 2000년 1월 1일 0시를 지축이 떠나갈 듯한 열광적인 환호로 맞이하였습니다. 여기에는 단 한 도시의 예외도 없었습니다. 그 모든 장면들은 두 가지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첫째, 이 땅의 모든 인간들은 진정으로 새해를 갈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국적과 연령을 초월하여 세계 모든 도시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열광 속에서 2000년을 맞이할 때 그들이 기대하는 새해 역시, 코소보와 동티모르에서 인종청소가 자행되고, 러시아의 군대가 전 체첸을 유린하고, 프랑스의 영국산 쇠고기 금수조처로 인해 두 나라 국민감정이 폭발하며, 스위스와 오스트리아에서 인종주의자들의 극우정당이 선거에서 승리하고, 북한의 어린이들은 소리 없이 굶어죽어 가며, 터기와 대만은 지진으로 온 나라가 폐허가 되고, 베네주엘라의 홍수로 5만 명이 떼죽음을 당하며, 세계를 지배하는 미국식 경제논리를 위해 기업이윤을 위해서라면 인간성마저 상실해야 하는, 그런 잔인하고 살벌한 한해가 다시 되기를 바라서였겠습니까? 만약 그랬다면 누가 감히 길거리로 뛰쳐나와 환호를 지를 엄두인들 내었겠습니까? 모두 문을 걸어 잠근 채 탄식과 한숨으로 2000년을 맞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온통 한 마음이 되어 소리를 지르며 2000년을 맞았습니다. 2000년은 정말 새해가 되기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해 말입니다. 평화와 사랑과 정의가 강물처럼 흘러 넘치는 진정으로 새로운 해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날 밤 온 지구인이 2천 년을 맞이하며 내지른 환호성이야말로, 참된 새해 새날 새시간에 목말라하는 가련한 인간의 처절한 아우성이었습니다.
둘째로, 새로이 맞는 새해가 진정 새해이기를 소망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염원이지만, 그러나 새해는 인간의 열광이나 거대한 축제행사로 주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곳 제네바의 쁠렝빨레에서도 새 천년맞이 행사가 거창하게 열렸었습니다. 1월 1일 0시 예배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쁠렝빨레 옆을 통과할 때입니다. 그때의 시간이 1월 1일 새벽 2시 40분 경이었습니다.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광장 간이무대에서는 가수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남아 있는 관중들은 여전히 열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광장 주변은 온통 거대한 쓰레기장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네바의 광경만은 아니었습니다. 어제 유로뉴스(EuroNews)에서는, 밀레니엄 축제가 끝난 직후 수백 톤의 쓰레기들로 가득 찬 유럽의 각 도시들을 보여주었습니다. 불과 몇 시간 전 그곳에서 벌어졌었던 화려한 세기의 대 축제를 연상해 볼 때, 그 뒷 광경은 참으로 민망스럽다 못해 처량하고 허망해 보였습니다. 겨우 몇 시간만에 쓰레기 더미로 화해버릴 것으로 밤을 새우며 열광하고 환영한다한들 어찌 새날 새해가 주어질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월요일인 내일 아침이 되면 작년과 똑 같은 불안과 근심, 그리고 좌절과 고통 속에서 새로울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또 한해의 삶을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물질적인 것들로 새날이 주어진다고 믿는 자가 있다면, 그가 믿는 물질이 퇴락해 가는 것과 비례하여 그를 스쳐 가는 시간 또한 쓰레기처럼 버려지고 말 것입니다. 


유한한 것으로부터는 결코 새것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유한하다는 말의 의미는 이미 쇠퇴 중에 있음을 의미할진대, 쇠퇴 속에서 어찌 참된 새것이 생성될 수 있겠습니까? 새것은 오직 영원한 것-진리 속에만 있습니다. 그리고 진리 안에서 자라는 자에게만 새로운 시간은 주어집니다. 진리 안에서 자라는 만큼만 새로워집니다. 
1998년 9월 22일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곳 제네바로 오면서 저는, 하나님 앞에서 제가 개인적으로 결단해야 할 여러 가지 사항들 외에, 제네바 한인교회와 관련하여 3년 동안의 제 임기 중 추구해야 목표로 세 가지 사항을 우선적으로 설정했습니다.
첫째는 '하나의 한인교회'였습니다. 제가 올 당시 이곳 제네바에는 두 개의 한인교회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겨우 250여 명 남짓의 한인들이 살고 있는 이 작은 동네에 서로의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두 개의 교회가 별개로 존재하는 것은, 만물을 하나되게 하시는 주님의 뜻일 수 없었습니다. 참된 교회는, 서로 이질적인 사람들이 함께 모여 그리스도 안에서 조화를 이루어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안에서 로마의 장교와 유대의 독립운동가, 불의한 세리와 가난한 납세자, 존귀한 산헤드린 의원과 비천한 어부가 한데 어울려 한 교회를 이루었듯 말입니다.
둘째는 '제네바 한인교회의 자립'이었습니다. 제가 올 때 교회는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이를테면 서울에 있는 주님의교회로부터 매달 2천 프랑씩의 보조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교회가 경제적으로 외부의 도움을 받는 한 교회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란 도움을 주고 나눔을 실천하는 자립기관이지, 외부로부터의 도움을 당연시하는 의타적 단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도움 없이는 존립 자체가 불가능한 양로원이나 고아원에서 매일 예배를 드리고 성경공부와 전도를 행한다 할지언정, 그것을 교회라 부르지 않는 까닭이 이것입니다.
세 번째는 '인류에게 공헌하는 교회'였습니다. 교회 이름이 제네바 한인교회라고 해서 한국인들끼리 모여 예배 드리고 은혜 받는 것으로만 만족한다면, 복음의 세계성과 교회의 보편성이란 관점에서 결코 성숙한 교회일 수 없는 까닭입니다. 제네바 한인교회가 유럽의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한, 미력이나마 유럽을 중심으로 세계와 인류에게 이바지해 가는 것이 주님께서 이곳에 이 교회를 세우신 까닭임은 두말 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저는 이 세 가지 목표가, 제가 이곳에 있는 3년 동안에 성취될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98년 10월 첫째 주부터, 첫 번째 목표였던 '하나의 한인교회'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남은 것은 두 번째 목표와 세 번째 목표였습니다. 그래서 1999년을 맞이하면서 작년 교회의 표어를, 역대상 4장 10절 말씀에 근거하여 '지경을 넓히소서'로 정하였습니다. 우리가 바르고 성숙한 교회를 이루기 위해 '교회의 자립'과 '인류에게 공헌하는 교회'라는 이상적인 목표를 지니고 있다한들, 그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의 지경을 넓혀주시지 않으면 가능할 수 없는 일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일이 가능할 수 있도록 우리의 지경을 친히 넓혀 주셨습니다.
즉 99년 2월부터 교회의 경제적 자립이 이루어졌습니다. 서울 주님의교회로부터의 도움을 5개월만에 사양하고서도, 교회가 교회다운 교회로 존립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류에게 공헌하는 교회로서의 첫 발도 내 딛게 되었습니다. 1999년 한 해 동안 스위스 내에 있는 여러 기관은 물론이요, 아프리카의 앙골라와 남아프리카에서부터 시작하여 코소보, 터키, 동티모르, 대만, 체첸, 브라질, 베네주엘라를 거쳐 북한 동포에게 이르기까지 많은 곳에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지난 1년 동안 이런 목적으로 선교부에서 지출 된 금액이 스위스 돈으로 총 22,000프랑(한화:1천5백4십만원)에 이릅니다. 인류에게 공헌하기 위해 교회 창립 21년만에 내 디딘 첫걸음임을 감안한다면, 참으로 주님의 크나큰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주님께서 제네바 한인교회의 지경을, 우리 한사람 한사람의 지경을 친히 넓혀 주셨기 때문에 가능했음은 재론의 여지조차 없습니다.

이에 2000년도를 맞이하면서 올해의 표어를 '범사에 자랄지라'로 설정했습니다. 에베소서 4장 15절이 이렇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우리가 우리의 중심을 다해 주님을 신뢰하면서 우리 자신을 주님께 맡길 때, 주님께서 지난 1년 동안 우리의 지경을 친히 넓혀주심을 경험하고 확인한 우리들은, 이제부터 그 넓어진 지경 위에서 범사에 주님에게 이르기까지 자라나야 하겠습니다. 어제 1월 1일 0시 예배를 통해 상세하게 말씀 드린 것처럼, 우리가 주님 안에서 자라나는 만큼 우리의 삶이 본질적으로 새로워지고, 우리를 스쳐지나 가는 시간의 의미가 새로워지며, 새로워진 우리를 통해 주님의 새로운 역사가 펼쳐질 수 있습니다.
뇌성마비란 뇌의 성장이 중지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더 이상 자라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뇌성마비 환자가 달력을 수십 번 교체해도 새해를 맞이할 수 없는 것은, 그를 스쳐 가는 모든 시간이란, 세 살 때이든 혹은 다섯 살 때이든 그의 뇌가 정지된 그 시점을 뛰어넘을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그를 스쳐 가는 모든 시간은 언제나 예전의 묵은 시간만 될 뿐, 새로운 시간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새로운 시간이 없는 그에게 새로운 삶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범사에 자라나지 못할 때,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 모습 또한 그와 똑 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3주 동안 살펴본 바와 같이, 사도들이 예루살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채 예루살렘이 마치 지구의 끝인 양 고수하고 앉아 있을 때, 헬라파 유대인 출신이었던 빌립 집사에 의해 사마리아 성이 복음화 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그 소식을 전해들은 사도들 중 베드로와 요한이 직접 사마리아 성으로 가서 현장을 확인하고,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성령님께서 임해 주실 것을 기도했습니다. 그때 그들 자신에게 임하셨던 동일한 성령님께서, 평소 사람으로 여기지도 않았던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도 똑 같이 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사도들로 하여금 어디에서 무엇을 해야할 것인지를 일깨워 주신 성령님의 역사였습니다. 그 순간부터 사도들은 이방인과 이방을 향해, 즉 주님께서 명령하셨던 최후의 목적지-땅끝을 향해 그들의 삶을 던져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25절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두 사도가 주의 말씀을 증거하여 말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갈새 사마리아인의 여러 촌에서 복음을 전하니라'

사도들은 이방으로 향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예루살렘으로 되돌아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저 한 것이 있다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있는 사마리아인의 동네에서 복음을 전한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이 순간까지 그들에겐 이방이니 이방인이니 하는 개념 자체가 없었습니다. 땅 끝이란 그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곳일 뿐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때의 그들은 예루살렘의 수준에서 성장이 멈춘 상태였습니다. 범사에 주님에게 이르기까지 자라려는 생각조차 않고 있었습니다. 당시 그들은 마치 영적인 뇌성마비 환자와 흡사했습니다. 그와 같은 그들에게 매일 동쪽에서 해가 다시 떠오른들 새 날일 수는 없었습니다. 성장이 멈춘 그들을 스쳐 가는 모든 시간이 묵은 시간일 수밖에 없는 탓이었습니다.
무식한 갈릴리의 어부들이 주님의 위대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면, 주님께서 그들의 지경을 얼마나 넓혀주신 것입니까? 그러나 주님께서 주신 그 넓은 지경 위에서 그들은 더 이상 자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성장이 멈추어버린 사도들이 머지 않아 사도행전에서 제외 되어버리는 것은 사필귀정이었습니다.
반면에 빌립 집사는 사도들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본문 26절-28절이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일러 가로되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데 병거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빌립이 주님께서 지시하는 곳으로 갔을 때, 그곳에는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신하로서 에디오피아의 모든 재정을 책임 맡은 고위관리가 있었습니다. 간다게는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당시 에디오피아 왕조의 명칭이었는데, 빌립이 그곳에서 만난 여왕의 신하는 뜻밖에도 내시였습니다. 그리고 본문 29절이 이렇게 계속되고 있습니다.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그것은 참으로 마음 꺼리는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에디오피아란 말의 뜻 자체가 '검은 피부'이듯이, 그곳에 있는 사람은 당시 유대인들이 경멸하는 이방인이요, 이방인 중에서도 더 경원의 대상인 흑인이었습니다. 게다가 에디오피아 사람은 본래 구스족이었습니다. 구스족이란 노아의 세 아들 중에서 저주받은 함의 후예였습니다. 상종할 가치조차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더욱이 내시였습니다. 내시란 선천적이든 혹은 후천적이든 고자를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고자들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은 자로 간주하여 사람으로 취급해주지를 않았습니다. 한 마디로 그 사람은 빌립이 선대해 줄만 한 자격이나 가치가 전혀 없는 사람, 아니 도대체 사람일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는 그 인간 같잖은 내시를 향해 나아가라고 빌립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본문 30절은 빌립이 달려갔음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에디오피아의 흑인 이방인이요, 저주받은 함의 후손이요, 인간 축에 끼일 수 없는 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빌립은 투정을 부리며 천천히 걸어간 것이 아니라, 지체없이 달려 나아갔습니다.


사도들은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육신을 입고 계신, 즉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뵐 수 있는 주님으로부터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명령에 아랑곳없이 여전히 예루살렘을 벗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빌립 집사에게는 육신을 가지신 주님이 아니라,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성령님께서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나아가라 명하셨습니다. 도저히 사람으로 여길 수 없는 사람에게 말입니다. 그렇건만 빌립은 보이지 않는 성령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달려 나아갔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주님의 말씀 앞에서 날마다 자라나는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주님 앞에서 여태까지의 한계와 편견을 날마다 벗어 던지는 자였습니다. 명실공히 범사에 자라나는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가 만약 범사에 자라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던들, 결코 내시를 향해 달려 나아갈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범사에 중단 없이 자라나는 자였기에, 주님 안에서 날마다 새날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가 범사에 자라나 예루살렘의 수준을 벗어났을 때에 그는 사마리아의 새 날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마리아의 상태를 너머 서자, 이번에는 에디오피아 내시와 더불어 또 다른 새날을 맞을 수 있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본문 40절에 의하면, 날마다 자라기를 멈추지 아니 한 그는 아소도와 가이사랴에서의 새날까지 누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범사에 자라나는 자만 누릴 수 있는 새 시간이요, 새 날들이요, 새 인생이었습니다. 이처럼 매사에 자라나는 그리스도인이었기에, 빌립은 사도가 아니면서도 사마리아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 첫 번째 그리스도인으로 성경에 기록되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자라기를 멈춘 사도들을 제치고 말입니다.
새해 새날은 수많은 불꽃으로 밤하늘을 밝힌다거나, 열광적으로 환호를 지른다고 해서 찾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새 시간은 범사에 자라는 자에게만 주어집니다. 진리 안에서 자라나는 만큼만 시간은 새로워집니다.

인생은 마치 모래시계와 같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모래시계의 특징은 지나간 시간과 남아 있는 시간을 눈으로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지나간 시간은 아래쪽에 쌓여 있고 남아 있는 시간은 위쪽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나를 스쳐 지나가고 있는 시간들은 그 한 가운데를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한 해가 또 지나갔다는 것은 모래시계 윗 부분의 모래가 그만큼 아래쪽으로 떨어졌음을 의미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윗 부분의 비어 있는 공간이 그만큼 더 넓어졌다는 말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 각자의 인생 모래시계를 한번 들여다보십시다. 어떻습니까? 어느 쪽에 모래가 더 많이 들어있습니까? 위쪽입니까? 혹은 아래쪽입니까? 실은 그것은 그리 중요치 않습니다. 위쪽에 자리잡고 있는 모래의 양은 우리 권한 밖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양을 결정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이 시간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위쪽에 비어 있는 공간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온 시간의 양과 똑 같은 크기의 빈 공간이 거기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 빈 공간의 의미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진리 안에서 성장하기를 이미 멈추어버린 자라면 그 공간의 의미란 인생무상이 고작일 것입니다. 진리 안에서 자라기를 거부한 인생의 주체는 자기자신일 수밖에 없고, 결국엔 공동묘지에서 끝나버릴 유한한 인간이 주체된 인생이란 봉우리가 높을수록 허무의 골이 더 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인생무상의 공간으로부터 떨어지는 시간들 역시 허망한 세월로 쌓여갈 뿐입니다. 아무 의미도 없이 덧없는 묵은 날들의 축적으로 말입니다.
반면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범사에 그분에게 이르기까지 자라기를 멈추지 않는 자라면, 그 공간 속엔 이미 영원한 진리와 생명이 충만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원한 공간으로부터 흘러내리는 1초 1초는 새 시간들이 되어 아래쪽에 진리의 실체로, 말씀의 실상으로 축적되고 있을 것입니다.
새해 새날은 구호나 치장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새해 새 시간은 범사에 자라는 자에게만 주어집니다. 진리 안에서 자라나는 만큼만 시간은 새로워집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제 막 시작된 2000년이 진정 새해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이 해가 명실공히 새로운 밀레니엄의 출발점이 되기를 소망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는 자들이 되십시다. 날마다 범사에 주님에게 이르기까지 자라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또 한해의 귀한 기회를 주셨는데, 어떤 경우에도 올해마저 작년처럼 의미 없이 흘려버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내 인생의 모래시계는, 지금 이 순간에도 소리 없이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또 한해의 기회를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자라는 만큼만 내 인생이 새로워짐을 일깨워 주심도 감사합니다.
날마다 진리 안에서 자라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범사에 자라나게 하옵소서.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 이르기까지, 자라기를 멈추지 않게 하옵소서. 빌립이 주님의 말씀에 따라, 다가갈 수 없는 자에게 달려가는 심정으로 날마다 자라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올 한해 365일 매일 매일이 새해 새날이 되게 하옵소서. 2000년이 진정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밀레니엄의 시작이 되게 하옵소서. 나를 스쳐 지나가는 모든 시간들이 진리의 실체로, 말씀의 실상으로 축적되게 하옵소서.
그와 같은 나의 삶이 이 어둠의 세상을 밝히는 진리의 등불이 되게 하옵소서.
-아 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