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화의 영웅인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는 많은 작가에 의해 연극으로 다루어졌지만, 그 중에서도 기원 전 430년경에 상연되었던 소포클레스의 희곡이 가장 유명합니다.
테베의 왕 라이오스를 죽인 오이디푸스는 테베의 왕위와 왕비 이오카스테를 차지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죽인 라이오스는 자기 아버지요, 자신과 동침한 왕비 이오카스테는 자기의 친어머니라는 엄청난 사실이 밝혀집니다. 어머니는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하였고, 부모조차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던 오이디푸스는 자기 두 눈을 뽑아버리고 맙니다. 의식을 잃었던 오이디푸스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의 입에서 나온 제1성은 놀랍게도 '오! 빛이여!'라는 말이었습니다. 두 눈을 잃은 자가 마치 빛을 보고 있는 듯 말했으니 주위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까닭을 몰라하는 사람들을 향해 오이디푸스는 이런 독백을 읊조립니다.
'세상의 눈을 가진 그대는 이 빛을 보지 못하리!'
이것은, 옛날 그리스 사람들은 자연계의 태양 빛과는 전혀 다른 빛이 존재함을 알고 있었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눈과는 상관없이 존재하고 있는 빛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빛이 어디에 있습니까? 옛날 희극 속에만 존재합니까?
오늘 본문은 일반적으로, 후에 위대한 사도 바울이 된 헬라파 유대인의 거두-사울의 회심장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실은 적절한 표현이 아닙니다. 회심이란 인간이 주체적으로 행하는 방향전환인데 반해 본문에서의 바울은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로, 주님에 의해 일방적으로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문은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는, 바울의 소명장이라 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본문 1절-2절이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다메섹이란 지금 시리아의 수도인 다마스커스의 히브리식 발음입니다. 본래는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아람의 수도였지만 주전 732년 앗시리아 제국에 의해 멸망당했다가, 주전 64년부터는 로마제국의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다마스커스는 예루살렘으로부터 240Km나 떨어져 있었지만, 오래 전 아브라함 때부터 이스라엘과 관계를 맺어온 까닭에 많은 유대인들이 그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주후 66년 네로 황제의 대 박해 시에 다마스커스에서 학살당한 유대인의 숫자만 1만5백 명이었던 것으로 밝혀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보다 30여 년 전인 본문의 시기에도 상당히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울이 이 먼 도시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사도행전 8장 1절이 밝힌 바, 스데반의 순교로 촉발된 대 핍박으로 인해 예루살렘으로부터 유대와 사마리아와 모든 땅으로 흩어진 사람들 중에 다마스커스를 행선지로 삼은 그리스도인들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그들을 색출하여 예루살렘으로 연행해오기 위해 자진하여 대제사장의 공인을 받은 뒤, 일행을 거느리고 다마스커스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본문 3절-4절의 증언입니다.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본문의 '홀연히'는 '갑자기'란 말입니다. 느닷없이 하늘로부터 빛이 쏟아지더니 그 빛이 바울(사울)을 휘감았습니다. 그 빛의 기운이 얼마나 강했던지 바울은 즉시 땅바닥에 꼬꾸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느냐'는 소리가 꼬꾸라진 바울을 사로잡았습니다.
본문 5절이 다음과 같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이 땅에 구원자로 오시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날 바울에게 빛으로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대목이 하나 있습니다. 대체 이때가 하루 중 몇 시쯤이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때로부터 약 20년이 지나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이 순간의 경험을 간증할 때, 그는 사도행전 22장 6절을 통해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다메섹에 가까웠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서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취매'
바로 그때의 시간은 오정-즉 낮 12시였습니다. 낮 12시라면 태양이 하늘 한 가운데 있을 때입니다. 다시 말해 태양의 빛이 가장 빛날 때입니다. 촛불이나 전구의 빛은 그 태양의 빛 앞에서 빛으로서의 구실을 전혀 할 수 없을 정도로 태양 빛이 눈부실 때입니다. 다마스커스는 태양이 유난히 작열하는 중동이고 보면, 한 낮 정오의 태양 빛은 그 눈부심이 더욱 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눈부신 중동의 한 낮 정오에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 빛은 태양 빛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도대체 그 빛이 얼마나 밝았으면 한 낮 정오의 햇빛 속에서 그 빛을 볼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후에 아그립바 왕 앞에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습니다.
'왕이여 때가 정오나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행26:13)
그 빛은 분명히 해보다 더 밝은 빛이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정오의 태양 속에서 그 빛을 볼 수 있을 리 만무합니다. 이처럼 바울은 한낮에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은 일대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바로 그 빛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도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국사범으로 죽이기 위해 빌라도 총독에게 끌고 갔습니다. 이에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진리이신 주님을 향해 진리가 무엇인지를 물었던 것입니다. 그 순간 빌라도는 이 세상에서 진리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진리의 생명에, 진리의 인격에, 진리의 향취에, 전혀 무감각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로부터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했지만, 예수님을 무죄석방 시킬 경우 민란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예수님께 사형을 선고한 비겁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하여 요한복음 19장 13절-14a절이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와서 박석(히브리 말로 가바다)이란 곳에서 재판석에 앉았더라 이 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이요 때는 제6시라'
빌라도가 그처럼 어처구니없는 짓을 하고 있을 때가 제6시였다고 성경이 밝혀주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시간으로 제6시란 곧 정오, 낮 12시를 의미합니다.
중동의 한낮인 정오, 작열하는 태양, 그 눈부신 햇빛 아래에서 빌라도는 진리를 향해 진리가 무엇인지를 묻고, 인간의 힘으로 결코 죽일 수 없는 진리를 향해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반면에 그 똑 같은 중동, 똑 같은 정오, 똑 같이 작열하는, 똑 같이 눈부신 태양 빛 속에서, 사울은 바울로 거듭나는 인생의 코페르니쿠스적 대 전환점을 맞았습니다. 똑 같은 대낮 12시에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람간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도대체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 다시 말해 빛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여부입니다.
바울은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 빛 속에서 세상의 빛이 참 빛이 아님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그 빛 속에서, 이제껏 세상의 빛 속에서 살아온 자신의 모든 삶이 허구와 거짓임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래서 본문 8절-9절이 이렇게 일러주고 있습니다.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
빛이신 주님을 만난 바울은 사흘 동안이나 세상을 보지 못했고, 아무 것도 먹지도, 심지어는 먹지도 않았습니다. 빛이신 주님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세상의 빛만을 빛이라 생각하며 살아온 자신의 삶이란 더 이상 쳐다볼 가치도 없었고, 그런 삶을 위해서라면 먹고 마셔야할 의미 또한 있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사흘이야말로 이 이후로 오직 진리이신 주님의 빛 속에서만 살아가려는, 전혀 새로운 출발을 위한 진통의 기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그는 이 빛 속에서 위대한 사도의 길을 걸었습니다.
반면에 빌라도는 주님과 얼굴을 마주 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빛이심을, 진리이신 주님만이 참 빛이심을 알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세상의 빛만이 모두라 생각했습니다. 세상의 빛 속에서 스스로 자신의 재판석에 앉아 행하는 모든 판결은 언제나 옳고,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한낮 정오에 로마제국 총독으로서의 위엄을 다 해 주님께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명백한 오판이었고, 그로 인해 그는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세계 모든 그리스도인에 의해 고발당하고 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당하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이것은 오늘도 우리가 우리의 신앙으로 고백한 사도신경의 일부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로마군병에 의해 고난을 당했다고 고백치 않습니다. 분명히 본디오 빌라도라고 예배 때마다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이 세상의 빛만을 모두라 생각했던 빌라도의 그릇된 오판에 대한 고발입니다. 문제는 만약 우리가 주님의 빛 속에 거하지 아니하면 우리가 백주에 행하는 모든 일이란, 실은 빌라도가 한낮 정오에 진리를 짓밟았던 그 그릇된 행위와 전혀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창세기 1장 2절-3절에 의하면, 태초에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으로 뒤덥혀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온 세상이 카오스(chaos)의 상태였습니다. 그 카오스를 향해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빛이 있으라' 명령하셨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빛에 의해 카오스는 코스모스(cosmos)가 되었습니다. 코스모스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세계, 곧 우주를 가리키는 말인 동시에 질서를 의미합니다. 창조 이전에 혼돈과 공허 그리고 흑암 천지이던 카오스의 세계가 하나님의 빛에 의해 코스모스의 세계로 바뀐 것입니다. 카오스를 코스모스 되게 하는 이 창조의 빛이 태양 빛을 의미하지 않음은, 하나님께서 그 이후 나흘째 되는 날에 이르러서야 태양을 창조하셨음을 창세기 1장 14절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태양 빛이 동녘에서 수억 번 밝아온다 할지라도 인간의 카오스가 코스모스로 바뀌지는 않습니다. 이 세상 그 어떤 피조물의 빛으로도 안 됩니다. 오직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빛으로만 가능합니다. 태초에 카오스를 코스모스 되게 하셨던 바로 그 빛 말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예언하였습니다.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취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영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 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영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마칠 것임이니라'(사60:19-20)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빛이 임할 때 그 빛 앞에서 하늘의 태양은 더 이상 빛일 수 없음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태양 빛 앞에서 촛불을 빛이라 부를 수 없음과 동일한 이치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그 빛에 의해 인간의 슬픔이 종식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슬픔이란 실은 인간의 유한함-즉 인간의 혼돈 공허 흑암으로부터 비롯되는데 반해, 하나님의 빛은 그 모든 카오스의 고리를 끊고 코스모스를 안겨주시는 까닭입니다.
그런가 하면 요한사도는 요한복음 1장 1절-5절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 지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한 사도는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그 하나님의 빛이 바로 이 땅에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태초에 카오스를 코스모스 되게 하셨던 그 빛이 말입니다. 그러나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했습니다. 인간들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자연계의 빛만을 빛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 빛은 하나님의 빛 앞에서는 어둠에 지나지 않는데도 말입니다. 그래서 그 빛을 외면한 인간은 아무리 그럴 듯해 보여도 실제로는 어둠의 자식, 카오스의 노예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치 로마제국 총독의 의관을 갖추고 위엄을 다해 재판석에 앉아 진리를 향해 사형선고를 내리는 빌라도처럼 말입니다. 그의 몸은 한낮 정오의 햇빛 속에 경건하게 앉아 있었지만, 그러나 그의 마음은 칠흑 같은 카오스 속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이라고 해서, 우리라고 해서 전혀 예외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범죄가 주로 밤에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밤에 범죄를 저지르는 자는 고작 잡범에 지나지 않습니다. 크고 중한 범죄는 실은 모두 한낮 사무실에서, 삶의 현장에서 계획되고 실행됩니다. 만약 내가 빛이신 주님 안에 거하지 않는다면 나의 한낮이 한밤중과 어찌 구별될 수 있겠습니까? 내 사무실과 나의 집이란 나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혹은 내가 욕망하는 바를 위해, 진리를 못 박는 빌라도의 법정과 무슨 차이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 같은 카오스 속에 어찌 코스모스가 저절로 생성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고서야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당하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란 신앙고백을 어떻게 행할 수 있겠습니까? 이 고백의 참 의미는, 나는 결코 빌라도 같은 카오스의 노예가 되지 않겠다는 결단을 뜻할 테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에서 이 빛을 만나며 어떻게 이 빛을 얻을 수 있습니까? 요한복음 12장 46절을 통해 주님께서 친히 이렇게 답변하고 계십니다.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어둠의 카오스를 헤매고 있는 나의 삶을 당신의 빛으로 코스모스 되게 해주시기 위해, 이미 주님께서 빛으로 나를 찾아오시어 그 빛으로 나와 함께 하고 계시기에 가능합니다. 마치 다마스커스 도상의 바울을 찾아 가시어 그와 함께 하셨듯 말입니다.
영국 런던의 기념품 가게에 진열된 상품 중에 다음과 같은 감동적인 내용이 적힌 액자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인생의 길목에서 만난 주님과 나눈 대화의 내용입니다.
I said to the Lord who stood at the corner of my life.
-Give me a candle that I may tread safely into the unknown.
And He replied.
-Put your hand into mine and just go forward.
That shall be to you better than a candle
and safer than a known way.
(나는 내 인생의 길목에 서 계시는 주님께 말씀 드렸습니다.
-제게 촛불을 주셔서 미지의 길을 안전하게 걸어갈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네 손을 내밀어 나의 손을 잡고 그냥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거라.
그것이 촛불보다 나을 것이요 네가 아는 길보다 안전하리라)
대체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주님께서 내 삶의 앞길을 밝히시는 빛이시오, 내 마음속의 어둠을 물리치는 빛이시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보게 하시는 빛이시기에 가능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2000년 2월 20일 오늘, 우리 각자의 삶의 길목에서 빛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걷고 있는 각자의 인생길이 2천년 전 바울이 가던 다마스커스 도상이 되게 해주시기 위합니다. 홀연히 바울을 휘감았던 그 빛이-그 빛의 진리가, 그 빛의 사랑이, 그 빛의 생명이, 지금 우리를 품고 계십니다. 바울을 부르시듯 우리를 인격적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바울처럼 응답할 차례입니다. 내가 바울이 될 것이냐 혹은 빌라도가 될 것이냐는, 바로 지금 내가 어떻게 응답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우리 모두 그 빛을 좇아 나섭시다. 그 빛 속에 거합시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이 세상이 온통 칠흑 같은 어둠과 카오스 천지라 할지라도, 그 어둠과 카오스의 고리를 끊는 한낮의 사람, 빛의 사람, 코스모스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 각자의 인생길목에서 지금 빛으로 우리를 기다리시는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어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요12:35-36)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주님!
참으로 어둡게 살았습니다. 한낮에도 카오스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매일의 삶이 그저 혼돈과 공허의 연속일 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나를 가치 없다 버리지 않으시고, 오늘이란 내 인생의 길목에서 빛으로 나를 맞아 주시니 감사합니다. 빛으로 감싸주시고 빛으로 불러주심을 진정 감사드립니다.
이제부터 이 빛을 좇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빛의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이 빛 속에서 우리의 심령이 대낮처럼 밝게 하시사, 우리 삶 속에서 모든 어둠과 혼란이 종식되게 하옵소서. 지금까지는 비록 빌라도처럼 카오스였다 할지라도, 이 이후로는 사도 바울과 같은 코스모스가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향하여, 사람을 향하여, 무엇보다 내 자신을 향하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수정처럼 투명한 삶이 되게 하옵소서. 내게 이것이 가능하도록 친히 나를 찾아오시사 지금 나와 함께 하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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