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철목사

내려가, 올라갈새 (행 8:26-40)

새벽지기1 2017. 4. 4. 07:56


오늘은 교회력(calendar)으로 '주님의 수세일'입니다. 즉 2천 년 이 땅에 오셨던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날입니다.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던 세례자 요한은 깜짝 놀랐습니다. 메시아이신 주님께서 비천한 인간인 자기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나아오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황급히 주님을 만류하면서 말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마3:14)

그때 주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하신 말씀을 마태복음 3장 15절은 이렇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주님께서는 세례를 받는 것이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의를 쉽게 풀이하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뜻한다 했습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 있으면 의는 절로 주어지는 까닭입니다. 성자 하나님이셨던 주님께서는 세례를 받아야할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당신께서 친히 요단강으로 내려가시어 인간 앞에 무릎을 꿇고 세례를 직접 받으시므로, 세례야말로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임을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예수 잘 믿는 며느리를 얻은 시골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주일이 되면 며느리는 으레 시어머니를 모시고 교회를 가려했지만, 그때마다 시어머니는 '너나 잘 믿어라'며 거절하곤 했습니다. 어느 날 며느리가 갑자기 중병에 걸렸습니다. 자리에 누워 일어나지 못하는 것은 고사하고 아예 의식불명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시골 한의원이 와서 진맥을 했지만, 자기도 어쩔 도리가 없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돌아갔습니다. 안절부절못하던 시어머니에게 불현듯, 날마다 '하나님 아버지' 하고 기도하던 며느리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시어머니는 즉시 옷깃을 여미고 며느리를 위해 기도를 드렸습니다.
'사돈 영감! 한번만 봐 주시오.'
며느리가 날마다 아버지라고 불렀으니 자기와는 사돈간이 된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기도를 하나님께서 못 알아들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 시어머니의 중심이 하나님을 향해 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기 때문입니다. 사돈영감을 향한 시어머니의 기도가 주효했던지 며느리의 병이 씻은 듯이 나았습니다. 시어머니는 자기부탁을 들어준 사돈 영감이 너무나 감사해서, 그날부터 며느리와 함께 사돈 영감을 믿기로 하고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작은 시골교회가 할머니로 인해 온통 잔칫집이 되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교회에서 세례식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돈이 된 할머니의 신앙경력은 비록 짧았지만, 그분의 연만한 연세를 감안하여 교회에서는 그분에게도 세례를 베풀기로 하였습니다. 세례식 전날 세례문답 시, 목사님이 할머니께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구 죄 때문에 돌아가셨지요?'
할머니가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이요? 우리 며느리 죄 때문에 죽으셨지요.'
할머니는 며느리가 날마다 '내 죄로 인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주님'이라고 기도하는 것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자,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기 전에 혹 사돈영감이라 부를 수도 있고 하늘이라 호칭할 수도 있지만, 그 중심이 하나님을 향해 있는 한 하나님과의 관계가 시작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내 죄 때문이 아닌, 며느리 죄로 인해 돌아가셨다는 생각으로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이루어질 도리가 없습니다. 나의 죄인 됨과 내 속에 나를 구원할 능력이 없음을 알 때에만, 영원한 구원자이신 그분과의 바른 관계가 형성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례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었다는, 혹은 맺는다는 결단의 예식입니다.

한 마을에 침례교 목사와 장로교 목사가 사이좋게 살고 있었습니다.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가족들까지도 마치 친형제처럼 가깝게 지냈습니다. 이렇듯 친하던 두 목사님이 하루는 대판 싸움을 벌렸습니다. 이유인즉 세례 때문이었습니다. 침례교 목사가 장로교 목사를 공박한 것이 싸움의 발단이었습니다. 세례란 온 몸을 물에 잠그는 침례가 되어야지 진정한 세례이지, 어떻게 머리에 물 몇 방을 뿌리는 것으로 참다운 세례가 될 수 있느냐고 공박한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침례교는 세례 시 온몸을 물에 잠그는 침례의 전통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장로교 목사가 질세라 물었습니다.
'아니, 성경 어디에 반드시 침례여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침례교 목사가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왜 성경에 없습니까?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러 요단강에 내려가셨다고 성경이 증거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려가셨다는 것은 물 속에 잠기셨다는 말아닙니까? 성경대로 해야지요, 성경대로!'
한방 맞은 장로교 목사가 이렇게 되받았습니다.
'좋습니다. 성경대로 해야지요. 그럼 침례교는 성경대로 요단강에 가서 침례를 하지 않고, 왜 목욕탕에서 합니까? 성경 어디에 목욕탕에서 침례를 하라고 되어 있습니까? 성경대로 하자면서요? 성경대로!'
침례교 목사가 잠시 생각 후에 입을 열었습니다.
'요단강에 가서 할 수 없으니까, 하다못해 목욕탕 안에서라도 물 속에 잠겨야지요. 세례란 말의 뜻이 뭡니까? Baptizo란 단어자체가 물에 잠긴다는 의미 아닙니까?'
이번에는 장로교 목사가 잠간 뜸을 들인 뒤 말했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제가 묻는 말에 대답을 해보세요. 자꾸 몸이 물에 잠겨야한다는데, 침례교에서는 침례를 줄 때 도대체 어디까지 잠긴다는 말입니까? 무릎까지 잠깁니까?'-'아니오'
'그렇다면 허리까지 잠급니까?'-'아니오'
'그럼 목까진가요?'-'아니오'
'그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어디까지 잠겨야 한단 말입니까?'-'물론 머리까지지요.'
'분명히 머리까지지요?'-'그렇다니까요.'
'이것 보세요. 그러니까 우리도 머리 위에 물을 뿌리잖아요!'
장로교 목사의 판정승으로 끝나는 것으로 보아 이 이야기는 장로교에서 나왔음이 분명합니다. 과연 이 두 사람의 주장 중에 어느 쪽이 옳습니까? 두 사람 다 옳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물 속에 완전히 잠기는 침례의 경우와 동시에, 베드로가 고넬료 집의 사람들에게 세례를 줄 때와(행10장)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서 간수와 그 권속들에게 세례를 줄 때처럼 그렇지 아니한 경우를 모두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례의 의미와 가치를 외적 형식으로만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두 사람 모두 틀렸습니다. 세례의 참 의미는 물을 머리에 뿌리느냐 아니면 물 속에 잠기느냐는 외적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삶이 본질적으로 바뀌어지는 데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자기 중심으로 살던 인간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 진입하는 출입구가 세례입니다.
주님의 수세일을 맞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오늘의 본문이 그 좋은 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성으로부터 사도들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 가버린 반면, 빌립 집사는 남쪽 광야까지 가서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중신인 내시에게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사도들과 빌립 집사의 이와 같은 차이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대해서는 지난주일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빌립 집사가 성령님의 지시에 따라 내시에게 다가갔을 때 그는 구약성경을 읽고 있었는데, 그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본문 32절-33절이 밝혀주고 있습니다. 해당 구절을 대한성서공회에서 새로 발간한 '개역개정판 성경전서'로 봉독해 드리겠습니다.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구약 이사야서 53장 7절-8절에 해당되는 부분- 즉 이사야 선지자가 이 땅에 구원자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실 고난을 예언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누구에 대한 예언인지를 알지 못했던 에디오피아의 내시는 빌립 집사의 해설을 요청했습니다. 이에 빌립은 그 내용에서부터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상세하게 전하여 주었습니다. 복음이란 한 마디로 무엇입니까? 인간 그 자체로는 죽음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것 아닙니까? 오직 그 죄 값을 대신 치러주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제물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영원한 참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어갈 수 있다는 것 아닙니까? 빌립으로부터 이 복음을 전해들은 내시의 반응을 본문 36절이 전해주고 있습니다.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

내시는 물이 있는 곳에 이르자 빌립에게 세례를 자청하였습니다. 내시는 빌립으로부터 복음을 듣는 동안 자기 속에 도사리고 있는 온갖 죄를 보았던 것입니다. 아무리 스스로 제하고 씻으려해도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추악한 죄-거룩하신 하나님에 의해 심판 받을 수밖에 없는 그 죄를 말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더러운 죄가 씻음 받기를 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시작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꺼이 세례를 자청하였고, 그 결과를 본문 38절이 다음과 같이 밝혀주고 있습니다.

'이에 명하여 병거를 머물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주고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여기에 중요한 두 동사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내려갔다는 동사와 올라왔다는 동사입니다. 빌립과 내시는 함께 물에 내려갔다가 함께 뭍으로 올라왔습니다. 세례를 베풀고 받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실 때에 요단강에 내려 가셨다가 올라오셨음을 마태복음 3장이 밝혀주고 있습니다. 왜 성경은 세례 시, 내려갔다 올라오는 동작을 강조하고 있겠습니까? 그 외적형식이 중요하기 때문이겠습니까? 아니면 그 속에 담겨있는 본질적 의미 때문이겠습니까? 로마서 6장은 세례의 참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3절)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5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11절)

즉 세례의 본질적 의미는 주님과의 연합인데, 이때의 연합이란 주님의 죽음과 연합인 동시에 또한 부활과 연합이란 것입니다. 풀이하면 세례란 죄와 벗하며 살던 옛사람의 죽음임과 아울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이루어 가는 새사람으로의 거듭남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경이 세례와 관련하여 내려갔다가 올라오는 동작을 강조하는 그 참 뜻을 포착하게 됩니다. 뭍에서 물로 내려가 물 속에 잠기면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려간다는 것은 곧 죄의 노예로 살던 이제까지의 자신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여태까지의 삶이 무가치하고 의미 없었다는 고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옛사람은 못 박혀 죽은 것입니다. 반면에 물 속에서 나오면서 다시 호흡을 합니다. 그러나 그 호흡은 물 속에 들어가기 전의 호흡과 같지 않습니다. 이 호흡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호흡입니다. 그 호흡으로 뭍으로 올라옵니다. 이제부터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시가 물로 내려갔다가 올라왔다는 것은 단순히 세례의 형식적 절차를 거쳤다는 것이 아니라, 옛사람은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형성하는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났음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죽음과 부활의 분기점인 동시에, 하나님과 맺는 바른 관계의 시발점이 바로 세례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세례 교인이란 어떤 형식의 세례를 받았느냐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옛 삶의 죽음과 새로운 삶의 획이 분명하냐,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시작되었느냐의 여부에 의해 판가름 나는 것입니다.

로마제국의 콘스탄틴이 기독교를 받아들이자, 그의 휘하에 있던 병사들 역시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당시의 관례를 따라 모두 강에서 침례를 받았는데, 상당수의 병사들이 오른 손만은 강 밖으로 내민 채 침례를 받았습니다. 이유는 이러했습니다. 오른 손으론 칼을 들고 전쟁을 해야하므로 오른 손만은 주님 뜻대로 살지 못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 앞에서 옛사람이 죽는 것이 세례라 할지라도 오른손만은 못 죽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침례를 받기 위해 분명히 강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머리까지 물 속에 잠기는 침례를 받은 뒤 다시 올라왔습니다. 그러나 내면적으로 그들은 죽지 않았고, 죽지 않았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참 생명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참 생명밖에 있는 그들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진정한 세례교인일 수는 없습니다. 


만약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죽지 못한다면 우리 자신이 콘스탄틴의 병사, 아니 앞에서 언급한 시골 할머니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옛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죽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아직 자각치 못했기 때문이요, 나의 죄인 됨을 인정치 않는 자에게 있어 예수 그리스도는 남의 죄 때문에, 며느리 죄 때문에 돌아가신 분 이상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야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어 가는 진정한 세례교인이 될 도리가 없습니다.
중세 종교개혁 당시 태동한 종파 중에 재세례파가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는 종파였습니다. 유아를 대신하여 부모가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효력이 있을 수 없으므로, 유아세례를 받은 자는 모두 정식으로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재세례파였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재세례가 아니라 머리 위에 물 뿌리기를 수백 번 거듭한다할지라도 그의 심령이 죽음으로 내려갔다 생명으로 올라옴이 없다면, 그 분명한 획이 그어짐이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있을 수 없습니다.

반면에 부모의 신앙고백으로 대신한 유아세례자일지언정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이루고 있다면, 그는 누구보다도 성숙한 참된 세례교인임에 틀림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절-2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증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홍해를 건넌 것을 가리켜 본문이 세례라 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홍해를 건널 때 그들이 물 속으로 침례를 하거나 혹은 머리 위에 서로 물을 뿌리는 예식을 행한 적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갈라진 홍해 한 가운데를 지나 시나이 반도로 건너갔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그것을 가리켜 세례라 부르고 있습니다. 세례를 위한 그 어떤 외적형식도 취한 적이 없었지만, 이집트 노예의 삶을 청산하고 가나안을 향한 새 삶의 획이 그어진 곳이 바로 그 홍해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죽음과 삶의 분기점 그리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의 출발점이 바로 그 홍해 한가운데였다는 말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본질적으로 세례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일본의 유명한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는 비가 쏟아지는 날, 비속에서 비를 맞으며 스스로 세례를 받았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날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비속에서 그의 옛사람은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스스로 세례를 받은 그를 가리켜 아무도 세례교인이 아니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의 삶엔 누구보다도 죽음으로 내려갔다가 생명으로 올라온 획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 사람들이 다 우찌무라 간조처럼 모든 형식을 배제하고 스스로 비속에서 세례를 받을 수는 없습니다. 본질의 중요성을 아는 자는 그 귀한 본질을 담는 그릇인 외적 형식 또한 소중하게 다루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세례의 본질을 위해 당시의 형식에 따라 인간에게 친히 세례를 받으실 정도였으니, 하물며 우리야 두말 해 무엇하겠습니까?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는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장로교, 로마 캐톨릭 등 출신교단과 종파가 다 동일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각각 상이한 세례의 형식을 거쳤을 수 있습니다. 또 아직까지 세례의 형식적 절차를 거치지 아니 한 분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면에서는 우리 모두 동일합니다. 즉 우리는 다 본질적으로 세례교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례의 외적 형식이 중요하다면, 그 예식은 본질적으로 세례교인이 되겠다는 혹은 되었다는 공개적 선포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남녀가 굳이 결혼이란 외적 형식을 통하여 가정을 이루는 것은, 우리는 부부로 죽도록 사랑하며 살겠다는 본질에 대한 공개선포의 중요성 때문인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본질을 상실한 공개선포란 덧없는 메아리와 같을 뿐입니다.
성베네딕트회 서울 수도원 피정의 집에서 발행되는 '징검다리'에 다음과 같은 글이 실린 적이 있었습니다. 내용은 오래 전 영세를 받은 친구와 갓 영세를 받은 친구의 대화입니다. 로마 캐톨릭에서는 세례를 영세라 부르고 있습니다.
'자네 영세 받았다면서?'
'그래, 그렇게 되었어'
'그럼 교리에 대해 많이 배웠겠군. 어디 좀 물어 보세나. 그분은 어디서 태어나셨던가?'
'글세.....'
'성사는 몇 가지나 되지?'
'잘 모르겠는걸'
'그럼 십계명은 다 외울 수 있는가?'
'그렇지도 않다네'
'아니 영세를 받았다면서 그런 것도 모른단 말이야? 그럼 대체 자네가 아는 건 뭔가?'
'그렇다네. 아닌게 아니라 정말 난 아는 게 별로 없다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네. 자네도 잘 알다시피 3년 전에 난 술에 절어 살았고, 노름에 빠져 집안 꼴은 엉망이었지. 하지만 지금 난 술이라면 냄새조차 맡지 못하고, 도박과는 벌써 인연을 끊었다네. 이게 모두 그리스도께서 내게 이루어주신 것이라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기념주일 맞이하여 우리 모두 요단강의 예수님처럼, 본문의 내시처럼, 내려갔다가 올라오는 자들이 되십시다. 본질적인 세례교인들이 되십시다. 죽음과 삶의 획을 분명히 그으십시다. 오늘이 과거의 청산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분기점이 되게 하십시다. 매일 진리 안에서 변화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십시다. 그때 올해는 분명히 새해가 될 것입니다.
변화는 새것 속에 있지 않습니다. 변화 속에 새것이 있습니다. 변화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 있습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님의 수세 기념주일을 허락하시고, 세례의 본질적 의미를 일깨워 주심을 감사 드립니다. 이 시간 주님과 함께 요단강에 내려갔다가, 주님과 함께 올라오게 하심을 감사 드립니다.
이 이후로 날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죽게 하시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죽으므로 날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부활하게 하옵소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날마다 구축되게 하옵소서. 내가 본질적으로 세례교인 되었음이, 진리 안에서 변화되는 나의 삶으로 나타나게 하옵소서.
세례교인 된 나의 삶을 통해 주님의 생명이 이 땅위로 흘러 넘치게 하옵소서. 그 생명의 빛으로 이 땅의 어둠을 밝히는 이 시대의 양심이 되게 하옵소서.
-아 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