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수 1:7)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이 사회는 문자 그대로 혼란한 시대입니다. 종교계도 역시 그렇습니다. 불교에도 큰 분열이 있고 천도교에도 내분이 있어 사회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불행히 우리 기독교에도 사상과 질서와 생활, 각 방면에 혼란이 있습니다. 따라서 갈길 잃은 양들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그런고로 오늘 아침은 신앙 생활의 정로(正路), 신앙 생활의 바른 길이란 문제를 가지고 생각하고자 합니다.
지금 읽은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모세의 대를 이어서 가나안 복지를 점령하고자 하는 위대한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모세를 통하여 준 모든 율법을 다 지켜 행하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이 보여 주는 중심적인 길을 걸어가라는 뜻인 줄 압니다. 우리가 신약 시대를 생각해 볼 때에도 좌로나 우로 치우치는 사람이 없지 않아 있었던 것입니다. 가령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나 옛날 풍습이나 특별히 모세의 의식을 지키는 율법으로 치우쳐 믿는 사람들이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이것을 시정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를 기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그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세상에 지식 학문 또는 철학 방면으로 치우친 사람 없이 않아 있었습니다. 이것을 시정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 전서와 골로새서를 썼습니다.
이와 같이 좌로나 우로 치우치는 사람은 어떤 시대에도 있었는데 가령 종교개혁 시대를 볼지라도 루터나 칼빈을 중심으로 한 개혁의 노선이 있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너무 감정에 치우친 재세례파(再洗禮派)가 있었습니다.
해방 후 우리 대한 예수교 장로회 역사를 돌아볼지라도 문자 그대로 나타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오 년 전에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해석하는데 너무 문자주의로 극단적 보수적으로 나아가다가 결국은 우리 장로 교회를 이탈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고려파가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작금간 우리 형제들 중에 오히려 이와 반대로 치우쳤다고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여러분 아시는 조신파가 그들입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그 길이 바른 길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 안에서도 가만히 보면 다른 방면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가령 지금 가만히 보면 너무 감정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설립된 이래 지금까지 사경회를 중심으로 해서 많은 은혜를 받은 것이 사실입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이런 회집을 사경회 즉 성경을 공부하는 사경회라고 했습니다. 그 사경회가 점점 변해서 부흥 사경회가 되었습니다. 부흥도 하고 사경도 하는 부흥 사경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보면 사경은 아주 떨어버리고 부흥회만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가령 찬송도 한 절만 그냥 반복한다든지 손뼉을 친다든지 책상을 친다든지 발을 구른다든지 이렇게 너무 감정에만 치우쳐서 그 집회가 대단히 소란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라는 예수님의 교훈과 모든 일에 질서가 있게 하라는 사도 바울의 교훈과는 거리가 매우 멉니다. 너무 치우칩니다. 또한 안수에 대하여서도 우리가 너무 치우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되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안수는 대략 네 가지 경우에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그리는 제물에 대하여 안수하는 경우가 있고 또는 장로나 집사를 세울 때에 안수하는 경우가 있고 또는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들 특별히 축복할 때에 어린이들을 안고 축복하고 또한 병을 고칠 대에 안수한 일이 있습니다. 본래 그 안수라는 말도 우리 나라 말로 말하자면 안찰 보다도 안수의 근본 뜻은 손을 그 위에 얹는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보면 안수하는 방법도 많이 변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자연히 안수하지 말라고 했는데 함부로 안수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안수가 변해서 주무르고 때리고 심지어는 환자 위에 올라서는 그런 일까지 있다고 합니다. 말하면 안찰(按擦)의 도를 지나고 안마(按摩)도 지나 거의 권투에 가깝습니다. 너무 지나치는 행동입니다.
안수하는 이도 성경대로 안수하고 안수 받는 이도 성경대로 안수 받아야 실수가 없을 것입니다. 또한 신유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병 낫는 것도 믿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와 권능을 믿음으로써 불치의 병이 낫는 것을 우리가 다 알고 체험하는 바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에 대해서도 우리가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믿음으로 병 고치기 위해서 건강의 법칙과 모든 의약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건강의 법칙도 하나님이 내신 것이고 의약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무시하고 일부러 기도로만 병을 고치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일종의 억지입니다. 또한 언제든지 병 낫는 것은 자기 믿음으로 낫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됩니다. 너무 치우치지 않도록 이 방면에도 우리가 주의해야 되겠습니다. 하여간 사경 회가 단순히 감정 흥분 회나 안 수회나 신유회로 전락되는 것은 너무 치우치는 것입니다.
한번은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와서 이적을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이적을 구한다고 탄식하고 책망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호기심이 있습니다. 이 호기심에 유익한 점이 많습니다. 이 호기심을 통해서 여러 가지 발견도 합니다. 이 호기심이 타락되어서 이적을 구하는 심령으로 변하면 우리에게 많은 해독을 가져옵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이런 심리를 이용해서 믿는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성경에 보면 거짓 선지자들도 이적을 행한다고 했습니다. 이상한 것에 거하고 이상을 찾는 심리를 경계하지 아니하면 어떤 거짓 지도자들에게 유혹될는지 알 수 없습니다.
물질문명이 극도에 달했다고 하는 미국의 할렘이라고 하는 곳에 있는 어떤 흑인 목사는 자기를 가리켜서 거룩한 아버지라고 하고, 교회를 천당이라고 부르고 교회 직분들을 천사라고 부르고 교인들을 천군 이라고 부르는 이상한 교회를 세웠는데 이 이상한 교훈을 따라간 흑인들이 많다고 합니다. 평양에는 해방 후에 어떤 젊은이가 자기가 은혜를 받았다고 하며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니까, 그 젊은 사람을 하나님이라고 숭배하며 심지어는 어떤 이름 있는 장로 부인까지 가서 하나님 하나님하고 따라다닌다고 그 장로가 크게 근심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서울 중앙에서도 재림주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소위 유한 마담들과 심지어 여자 대학생들까지 따라다닌다고 합니다. 이적을 구하는 심리를 삼가야 합니다. 이와 같이 신앙 생활의 바른 길을 걸으려면 우선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 사람은 심리적으로 본래 지적 요소가 있고 감정적 요소가 있고 의지적 요소가 있어서 우리의 신앙 생활에도 지적으로 기독교 진리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고 정적으로 실제를 체험하는 것이 필요하고 의지적으로 그 교훈을 실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세 가지가 조화되어야 합니다. 한 곳에 치우치면 우리가 잘못된 길로 나가기 쉽습니다. 그리고 둘째는 우리가 성경을 억지로 풀지 아니해야 되겠습니다. 베드로 후서 3장 16절을 보면 베드로 사도가 여러 교우들에게 편지할 때에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억지로 풀다가 자기를 멸망 가운데 들어가게 한다고 하는 경고가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의 중심 되는 길을 걸어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동시에 성경 해석을 언제나 공명정대하게 해야 합니다. 보통 지금 듣는 대로 어떤 딴 진리를 발견했다고 선전하는 분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런 것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억지로 푸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잘 아실 것입니다. 이 성경은 어제 오늘 된 책이 아닙니다. 과거 2000년 동안 내려온 책입니다. 그 동안에 수천만 수억만 사람들이 이 성경을 읽고 구원을 얻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가운데는 총명한 사람도 많았고 학자도 많았고 일생을 성경을 위해 바친 사람도 많았습니다.
이와 같이 과거에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연구하고 성경에 대한 주석을 썼는데 아직까지 이 성경 가운데 큰 구원의 진리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허락했겠습니까? 하나님의 구원의 큰 진리는 무슨 해석이 없어도 믿기만 하면 알 수 있으리만큼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그렇지 않으면 과거의 위대한 주석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내어 주었습니다. 사실 지금도 어떤 사람이 딴 해석을 해서 딴 진리를 발견했다고 하는 것은 실상은 딴 해석과 딴 진리가 아니고 잘 보면 전에 다 있던 것입니다. 하나에서 열까지 성경을 억지로 듣고 해석하는데 우리가 속아서는 안 됩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근본 원칙이 하나 있는데 우리가 그것을 항상 잊지 아니해야 됩니다. 그것은 성경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썼습니다.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생활을 썼습니다.
복음 다음에 오는 모든 다른 책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교훈과 그 마음과 정신에 대하여 해석한 것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그리스도의 정신과 교훈을 중심해서 신약과 구약을 해석해야 됩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를 무시하고 성경 어떤 부분을 따로 읽고 거기에 딴 것이 기록되었다고 주장하다가는 어떤 큰 과오를 범할는지 알 수 없습니다.
요새 듣건대 어떤 사람은 심지어 무슨 말을 하는가 하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첩을 얻었으니 지금도 중혼하여도 괜찮다 하는 이런 말이 들립니다. 이렇게 성경을 해석하다가는 큰 잘못에 빠집니다. 잘못된 길로 나가는 것입니다.
성경을 억지로 풀지 말고 성경을 법대로 해석해서 공명정대한 해석을 좇을 때에만 우리가 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이 성경과 관련해서 조심할 것은 어떤 사람들과 같이 때때로 어떤 딴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옛날도 그러하였고 오늘도 그러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분명히 알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 가지 계시를 주었습니다. 하나는 그의 창조물, 대자연, 전 우주를 통한 계시가 있는데 이것은 자연 계시라고 합니다. 자연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과 지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을 구원하기 위해서 한자지 더 주셨습니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요 예수 그리스도의 생활과 교훈과 해석을 적은 신구약 성경입니다. 이 계시를 특별계시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이 자연 계시와 특별계시를 이미 주셨습니다. 이상 다른 계시가 있다고 할 것이면 이 특별 계시와 합치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성경에 합치되지 않는 특별계시를 하나님께서 주실 이유가 없습니다. 사실 성경에 합치되지 않는 계시는 실상 하나님의 음성의 계시가 아닙니다.
보통 변태 심리자들이 자기 마음 가운데 가지는 자기 망상밖에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무슨 음성 들린다고 다 하나님의 음성이 아닙니다. 그 음성 가운데 성경에 합치되는 말씀만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가운데도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악마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됩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이 거의 열이면 열 교회에 덕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교회에 많은 해독을 끼치고 마지막에는 자기 자신도 멸망한 사람 많습니다.
종교개혁 당시에 재세례파 가운데 째매티스스라는 사람과 레드심짠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했습니다. 문스타라고 하는 곳에 예수님께서 오래지 않아 재림하신다고 하면서 그 곳이 새 예루살렘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성에 웅거하여 왕 노릇까지 한 사람이 레드심짠입니다. 많은 계시를 받는 가운데 마지막에는 계시에 의해서 아내를 열 여섯이나 얻었습니다. 그리고 망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에 조셉 스미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소년 때부터 계시를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몰몬이라는 천사에게 몰몬이라는 책을 받았다고 하면서 그 책을 영어로 번역해서 다른 사람에게 주면서 새로운 계시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상한 말도 많이 하고 이상한 이적도 많이 하니까 많은 사람이 따랐습니다. 마지막에는 계시 가운데 소위 하늘의 결혼이라고 하면서 오 육십 명의 여자를 얻는 다처주의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새로운 계시, 성경에 없는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 말에 속지 않아야 합니다.
한국에 한국주라고 하는 사람이 그랬다고 합니다. 요새 서울에 새로운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이 앞으로 어떤 계시를 받겠는지 우리가 주의해야 되겠습니다.
둘째로는 성경을 바로 해석하며 공명정대하게 해석할 때만 우리가 바른 길을 갈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셋째로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사야 1장 13절에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그 때 사람들이 성회를 모이면서도 여러 가지 악을 행하였습니다.
셋째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기독교는 윤리적 종교인데 기독교의 윤리를 벗어나는 신앙 행동이나 교인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 윤리를 벗어나서 어떤 교훈도 있을 수 없고 신앙 행동도 있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는 교인이라고 하면서, 신앙 행동이라고 하면서 윤리를 벗어난 일을 많이 합니다.
예를 들면 전도하는 일도 신앙 행동입니다.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러나 듣는 대로 어떤 사람들은 꼭 믿는 사람의 집으로 다니면서 전도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전도가 아니고 양의 도적입니다. 여덟째 계명을 범하는 것입니다.
윤리를 떠난 전도가 있을 수 없습니다. 가령 교회 설립하는 것 얼마나 좋습니까? 신앙 행동입니다. 교회 일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교회를 설립하는 것 보면 조용한 교회에 가서 분열을 짓고 당파를 일으켜서 딴 교회를 세운다고 합니다. 작년에도 분열시키고 금년에도 또 분열시켜서 딴 교회를 세운다고 하는 말이 들립니다. 윤리를 떠나서 교회를 세우는 일입니다.
예배당 세우는 것 좋은 일이고 신앙 행동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교회를 짓되 남의 교회 앞에다 짓습니다. 상식과 윤리를 벗어난 교회 일입니다. 바른 길로 가야 합니다. 교회 일도 바로 해야 합니다. 가령 교역자가 다른 교회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내 어떤 교역자가 다른 교회로 가면서 사십여 세대를 데리고 갔다고 합니다. 사실이라고 하면 윤리를 떠난 교역자의 행동입니다. 찬송하는 것, 기도하는 것,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하지만 요새 찬송 전술, 기도 전술이라는 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배당을 빼앗기 위해서 찬송하고 밤새도록 기도합니다. 거룩한 하나님을 찬송하고 기도하는 찬송과 기도를 싸우는 도구로 씁니다. 이 이상 더한 모독이 없습니다.
윤리를 떠나서 신앙 행동이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은혜 받으면 마음이 깨끗해지고 남녀의 교제도 거룩하게 할 수 있는 줄 압니다. 그러나 은혜 많이 받고 신령해 졌다고 해서, 에덴 동산과 같이 살자고 해서 의복도 쓸데없고 남녀가 동서하자 하는 이와 같은 허무맹랑한 말을 하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다고 합니다.
상식이나 윤리를 벗어난 신앙 행동이나 교회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윤리적 종교인데 비윤리적 신앙 행동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언제든지 기독교 윤리 아래에서 신앙 행동을 할 때에만 우리가 바른 길을 걸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복잡한 세상 가운데서 신앙의 바른 길을 걸어가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 것입니까?
첫째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성경을 중심으로 하여 신앙 생활을 할 것입니다.
둘째는 성경을 억지로 풀지 말고 공명정대한 주석을 따르고, 딴 무슨 해석, 딴 무슨 기술을 삼갈 것입니다.
셋째는 언제든지 기독교 윤리 아래에서 교훈을 하고, 신앙 행동을 하고, 교회 일을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어찌해서 우리가 곁길로 가는지 아십니까? 어떤 이들은 마음에 교만이 있어서, 학문의 교만, 진리의 교만이 있어서 어떻게 무지한 사람들과 같이 믿을 수 있나 나는 좀 고상하게 철학적으로 윤리적으로 믿어야지 하는 교만으로 잘못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적을 구하는 심리 때문에 좀 이상하게 믿으려고 하고, 좀 다르게 믿어 보려는 심리 때문에 곁길로 나가는 사람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러나 셋째로는 교회는 다니기는 하지만 아직도 참된 신앙에 들어오지 못해서 참된 신앙의 즐거움을 맛보지 못했으므로 마음속에 공허함을 느낍니다. 혹 이런데 만족을 느낄까 해서 이 곳 저곳 다닙니다. 먼저 참된 신앙을 얻어야 합니다.
넷째는 단순히 성경 진리를 몰라서 이곳 저곳 따라갑니다. 우리 몸이 약할 때는 백가지 병이 침노합니다. 그러나 건강할 때는 모든 병이 물러갑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힘쓰는 가운데 참된 신앙에 들어가게 되면 자연히 이런 모든 곁길로 끌려갈 필요가 없고 정로를 걸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1955년 6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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